<홍천기-정은궐>을 읽고
이 책은 내가 너무 사랑하는 작가님의 책이라 안 볼 수가 없었다. 소설을 본 게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할 정도였지만, 작가님의 작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애틋한 사랑과 유쾌한 일상, 날카로운 성찰과 섬세한 고증이 완벽했다. 남녀 주인공의 이야기는 탄탄하고 예뻤고 서글펐다. 하지만, 그 둘의 사랑은 내게 두 번째였다. 깊게 박힌 요소는 따로 있었다.
바로 여주인공, 홍천기의 재능이었다. 홍천기는 여인의 몸으로 화공인 인물이다. 조선이라는 시대에 화공은 천대받는 직업임에도 그녀의 재능만큼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게 드러난다. 검은 선 대신 여백을 먼저 바라보고, 그걸로 화면을 구성하는 천재. 한 번 보면 잊지 않고 살려 그리는 재능. 성별은 그녀의 능력을 가리지 못했다. 도화원의 명망 있는 화공도, 라이벌 화단주도 다 인정한다. 오랫동안 동문수학한 벗이 말하길 “재능이 물건이라 훔쳐올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이미 그 앨 죽이고 훔쳐왔을 것이다”라고 할 지경이다. 나는 그 벗, 최경이라는 그 사람이 참 눈에 밟혔다. 분명 제일 뛰어난 사람은 홍천기지만, 나는 그녀의 입장이었던 적이 없어 완전히 좋아할 순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곁에서 그 오랜 시간 함께 공부하면서 무너지지 않은 사람이 더 멋있었다. 재능이 압도적인 권력을 가지는 예술의 세계에서 천재에 의해 무너지지 않기란 가능하던가? 재능은 무서운 힘이다. 다른 사람에겐 어려운 것이 누군가에겐 너무나 쉽다. 그걸 바라보는 주변인은 그 모든 과정을 안다. 자신이 힘겹게 여러 날 공을 들인 것이 얼마나 하찮게 무너지는지. 시간이며 정성 무엇 하나 뒤처지지 않음에도 얼마나 결과물이 다른지. 그 순간들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자신을 해치게 된다. 끝나지 않는 좌절 때문이든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 때문이든…. 하여 많은 이들이 천재를 떠난다. 자신을 지키고 천재와 더 이상 마주하지 않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혹은 천재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끔찍하게 느껴져서. 그러나, 최경이란 홍천기의 동문수학 벗은 달랐다.
그는 도화원에 들어갔지만 홍천기의 그림만은 종종 들러 확인했다. 홍천기의 얼굴은 못 볼지언정 그림은 꼭 보고 갔다. 그 정도로 재능에 대한 동경과 감탄이 강했지만 자신의 화풍을 잃지 않았다. 초상화에 뛰어난 실력을 갈고닦아 널리 인정받게 만들었다. 천재 옆에서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도 서로 말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친했다. 서로의 일도 다 알아 알게 모르게 배려하며 때로 감싸주기도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재능이란 벽 앞에 어떤 관계도 빛을 잃는다고 생각한다. 그게 부모 자식 간이어도, 연인 간이어도, 오랜 친구 간이어도 마찬가지다. 유명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분명 뛰어난 수재였음에도 천재 모차르트를 이기지 못한 살리에리의 그 애환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다. 뛰어났기에 자신 앞의 벽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그렇기에 그 가치를 알면서도 넘어설 수 없음을 체감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심정은 수재 앞의 나와 별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약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래서, 최경이란 사람이 참 신기하고 멋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 역시 있다. 만약 홍천기가 남자였으면, 그래서 광인인 아버지 외에 그 무엇 하나 흠 없는 사내였다면 최경이 쭉 벗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여인이란 사회적 불리함 때문에 최경의 자존심과 마음이 위안을 받아 이겨낸 거라면 너무 잔인하다. 사실 최경에게 그 정도 위안이라도 없다면 버틸 수 없었겠지만. 그 자신도 홍천기의 재주를 사랑했으니 무조건 나쁜 관계가 되었으리란 보장도 없지만. 최경에겐 이미 충분히 잔인한 조건들이지만…. 동문수학한 두 사람이 여전히 친밀한 관계인 이유에 성별의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란 점은 슬프다. 물론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로 인정한 관계였으니 홍천기에겐 성별로 인해 친할 수 있었다는 게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성별 때문에 큰 좌절감을 느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홍천기는 자신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체감하지 못한다. 잘한다는 걸 알면서도 타인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모른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혼자 파악하기 힘드니까. 문제는 그게 타인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뿐. 그런 걸 또 생각하면, 여인이란 성별이 홍천기란 사람에게는 벗을 가지게 된 유일한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나는 천재를 동경한다. 숨길 생각은 없다.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노력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지만 하다 보면 알게 된다. 내가 10을 할 때 100을 손쉽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내가 못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걸. 그런 순간은 마냥 기분 좋게 넘기기도 힘들고, 오랫동안 아프게 남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내가 이상하고 못나다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아마 최경을 비롯해 홍천기의 주변 사람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그 덕에 홍천기의 주변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천재가 아닌 사람의 시선일 뿐이기에, 천재를 어떻게든 깎아내리고픈 마음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천재의 곁에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못된 생각이 숨어 있어서. 결국 한계는 존재하는지라, 그런 속 좁은 시선이 나도 모르는 사이 담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금 결말의 최경을 떠올려본다. 마지막에 다다른 최경의 모습은 이상적이다. 홍천기와 여전히 절친하면서도 자신의 실력을 향상해나가고, 좋은 기회도 생긴다. 안정적으로, 나름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모습으로. 최경과 비교해보면,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나 역시 진정으로 그때의 최경처럼 단단해지기를 바라본다.
살면서 싫든 좋든 천재를 만날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