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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Aug 01. 2021

너무 어렵고 슬픈 이야기에 대하여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마르셀 랑어데이크>를 읽고

안락사. 자살보다도 더 무거운 단어의 울림이다. 합법적인 자살이라고 여겨져서일까? 

그 말을 내뱉은 후의 파장도, 자살과는 비교할 수 없다. 참 어렵고, 막막한 주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고른 것은, 단순한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안락사는 내 사회 주변에도 들어올 확률이 높다.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지금 사람들의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때가 되면 그동안 생각해온 대로 행동하고 싶다. 닥쳐서야 허둥지둥하는 것보단 미리 고찰해보는 게 현명한 길이 아니겠는가. 당장 슬프고 불편해도 결국 내게 이로운 건 오랫동안 고민해보는 것일 테고…. 언제 내 주변에 들어올지 모르는데 지금부터 시작을 하는 게 나쁘진 않다고 보았다. 물론 그런 현실적인 결론을 내린다고 마음까지 깨끗하게 다스려지진 않았다. 뻔한 흐름일지 몰라도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다.  

   

딱 죽음을 다루고 있는 만큼 서글펐다. 동시에 현실적이고 입체적이라서 뭐라 단정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제목을 보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어린 동생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면 희귀병에 걸린 아이라거나. 아무튼 어리고 병약한 사람일 거라 상상했다. 무엇 하나 들어맞지 않은 예측이었다. 작가의 동생은 한때 성공해서 사업이 번창한 모범적인 아들이었다. 결혼도 했었고, 아들들도 있고, 알코올 중독이긴 했지만 병원에서만 사는 것도 아니었다. 알코올 중독이란 병명에 내가 움찔하지 않았다곤 못하겠다. 작가가 가족이라서 가볍게 넘어간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좀 더 읽다 보니 오히려 훨씬 중요하게 여겼으면 여겼지 무시한 게 아니란 게 금방 느껴졌지만 말이다. 작가와 동생은 성향이 달랐다. 외향적인 아이와 내향적인 아이의 차이였다. 하지만 그게 서로 소통을 아예 안 한단 소리는 아니었다. 같이 여행도 다니고, 뜸할지언정 연락도 했다. 그래, 평범하다면 평범한 가족이었다. 동생이 사는 걸 힘겨워하는 사람이란 걸 모두가 알기 전까지는. 동생이 알코올 중독에 이른 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아내도 부모님도, 동료도 모두. 놀랍지 않은가? 중독이란 주위에게 티가 나기 마련이다. 그게 심각해질 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단 소리는 본인이 강하게 억눌렀단 이야기다. 동생인 마르크는 폐를 끼치는 것도 싫어하고 완벽주의자 성향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쉬이 떠올리는 중독자와는 다른 양상이다. 그는 인생에서 선택을 하기보다는 주어진 것에 따랐단다. 무엇을 얻으려면 싸워야 하는 법인데 그걸 참 싫어했다나. 그래서 본인에게 두려움과 긴장이 몰려와도 그걸 털어놓지 못하고, 다루지 못하고 혼자 삭히다 술에 손을 댄 것이다. 그게 8년 세월의 병원 방문과 입퇴원, 가족과 사회와의 고난을 불러왔다. 가족들은 지쳐가고, 마르크는 같은 중독자들과 함께 살아가다 쫓겨나고…. 그럼에도 작가는 말한다. 마르크가, 동생이 정말 죽고 싶을 리가 없다고, 안락사를 원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저 관심이 필요한 탓에 그런 것뿐일 테니까. 나는 그 솔직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슬프게도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에는 둔감하지 않던가…. 

    

형의 추측, 어쩌면 희망이었을 그 생각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언젠가 마르크가 돌아와 다른 이들처럼 다시 성공해 살아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는 1년 6개월이 꼬박 걸리는 심사를 이미 충족했다. 그렇게 죽는 날은 다가왔고, 안락사로 작가의 동생 마르크는 떠났다.      


그 사실이 언론에 퍼지자 정말 많은 비난이 몰아쳤다고 한다. 그는 노인도, 중환자도 아닌, 성공한 청년이었으니까. 안락사가 알코올 중독자를 죽였다는 것부터 동생의 모든 걸 파헤쳐보려 했단다. 불법으로 사진을 올리고 기사를 쓰는 것도 모자라 인신공격도 많았다. 가슴 아픈 일이다. 사람들은 안락사로 사람이 죽었단 점에 집중할 뿐 그 유족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비난은 하나같다. 참 우습다.   

   

‘힘들 수 있다. 알코올 중독으로 몸이 미칠 듯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게 아무리 아프고 괴로워도 어쨌든 살아야 한다. 설사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너무 잔인한 말이 아닌가! 나 역시 삶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게 우리가 타인의 죽음이나 결단에 참견할 권리가 있단 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살아있을 때 도와야 한다. 도와주지 않으면서 말만 지껄이는 건, 아무 책임도 의무도 없이 참견만 하겠다는 이기적인 태도다. 더군다나 목숨이 그토록 귀하다면서 살아있는 사람인 유족에게 그리 잔인한 건 뭔가. 그런 이들에게 정말 생명이 중요하긴 한 것일까. 그냥 자신들이 비난할 대상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정말 생명이 귀하고, 존중받고, 잘 살아야 한다면 섣부르게 고인이나 유족을 나무랄 게 아니라 지금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게 먼저다.      


작가는 말한다. 자신 역시 안락사가 너무 슬프고 무서운 일이라 여긴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냥 사는 걸 힘들어하기도 한다고. 그런 이들의 의견을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솔직히 나는, 아직도 안락사가 그저 막막하다. 누군가는 사는 것이 너무 힘겨울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누군갈 그렇게 보낼 자신이 없다. 그게 혹 누군가에겐 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 사람의 자유보다 부양인의 부담이 더 중요해지는 건 아닐지 걱정스럽다. 한 권의 책으로 내 결정을 내리기엔 너무 깊은 주제였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있다. 우리는 섣불리 고인에 관한 이야길 할 필요가 없다는 것. 더불어 유족에게도 함부로 비난해서도 안된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큼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 그건 가족이나 친구라도 마찬가지다. 혹 누군가 너무 힘겨워 먼저 떠났다면 그 원인이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닌지를 먼저 알아봐야 한다.    

  

얼굴 모르는 죽음이라고 말 먼저 뱉지 마라. 

그 대신, 삶을 좀 더 쉬이 살아갈 방도를 이야기하라. 함께 살아가 보자.

세상은 정말 힘들고 살기 싫어도, 사는 맛이 있다.      


기억하자. 우리는 아직도 너무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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