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은 없다-남궁인>을 읽고
나는 평생에 의료계와는 연이 없다.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한창 진로를 정하는 고3 때, 취업이 잘 된다는 이유로 간호학과는 항상 지망 1위였다. 내 친구들도 문과 이과 가리지 않고 지망했다. 특정한 희망 전공이나, 직업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간호학과로 가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내가 미술을 하지 않았어도 그 길만은 분명 피했을 것이다. 아무리 대학을 잘 갈 수 있다 해도 가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분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정신 의학과 관련된 심리학도 좋아하고 상담하는 것도 좋아했으니까. 다만 매일 아픈 사람을 봐야 하고 그 사람의 목숨이 내게 달려있다는 게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직업에 종사할 자신이 없었다! 직업상의 윤리와 사명의 무게가 지나치게 컸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엔 너무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친구들의 길을 응원했다. 돈 때문이든 취업 때문이든, 사람을 살리는 직업임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존경할 만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뿐으로, 내가 그 길을 더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격이 없다고 느껴 아예 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아예 관심이 없어서 더 그랬던 걸까. 책을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막연히 응급실에서는 어떤 일도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만 했는데 이렇게 끔찍한 일이 많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그것이 일상이라는 점에서 끔찍했다. 활자로 다가온 순간들이 나에게 너무 크게 다가와서 무서웠다. 목숨으로 이루어진 일상이 일순 평범하게 다가올수록 그 비극이 안쓰러웠다. 그런 생활은 살벌한 줄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보다도 힘들지 않을까…. 당사자들에 대한 감정으로만 충격은 끝나지 않았다. 그 밖에서 내가 일상생활을 해 왔다는 것도 소름이 끼쳤다. 내가 울고 있을 때 누군가는 웃고, 내가 웃으면 누군가는 울 수도 있다는 건 넓은 세상이기에 당연한 이야기다.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인가. 그래도 이렇게 실감할 때면 두려워진다. 너무 광활한 곳에 놓인 어린아이의 심정이랄까...
내가 경험한 유일한 응급실 경험과는 많이 달랐기에 더 놀라웠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심장이 아파 급하게 가게 되었던 날, 응급실이란 곳에 대한 공포와 첫 경험이라는 설렘, 친구의 상태로 흥분과 공포, 걱정이 뒤섞인 상태로 구급차에 있던 순간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내리고 나서 응급실이 생각보다 고요하고 침착해 가슴을 쓸어내렸고 (만약 비명이라도 난무했다면 나는 또 한 명의 환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보호자 칸에 뭐라 써야 할까 걱정하다 먼저 쓴 사람들의 예시를 보고 걱정 없이 친구라 써넣었다. 친구와 우리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고 담요를 가져다주고 하다 보니 약 처방을 받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친구의 상태가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잠시 놀라 어쩔 줄 몰랐지만, 곧 부모님이 오셨기에 다행스러웠다. 그 사이사이에 몇몇 환자가 더 들어왔지만 다들 체하거나 복통 등의 가벼운 문제였다. 그래서 내게 응급실 이미지는 생각보다 평탄한 곳이었다. 한편으로 실망했을지도 모르나, 한편으로는 안심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좋게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응급실에는 내 친구가 심장이 아파서 온 것처럼 심정지가 와서 온 사람도 있고, 자살 기도를 해서 온 사람도 있고, 살해당해 온 사람도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안 것이다. 많은 참상 중 자살 기도가 제일 충격이었고 다음으론 살인이었다. 자살을 그토록 많이 한다는 것이 안타깝고 끔찍했고, 보호자와 환자 모두를 보는 사람으로서 의료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벅찬지 느껴졌다. 보호자의 의문과 투정을 모두 감당해야 하는 사람. 그런데도 아무 감사 표시 없이 지날 수 있는 사람. 살인이 난 것이든 어쨌든 우선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므로 경찰의 조사 이전에 환자가 더 중요한 사람. 그 모든 일을 해내야 하는 사람이라니. 의료계의 모든 사람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 책을 보고 가장 떠오른 건 응급실에 함께 간 친구가 아닌 간호사가 막 된 친구였다. 당차고 대담해서 어떻게 살던 잘 살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 친구지만 이토록 힘든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물론 실습도 잘하고, 일 처리도 똑바른 친구이니 괜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친구로서 많은 안타까움이 앞선다. 친구가 해준 우스갯소리가 있다. “절대 직장에선 보지 말자”라고. 친구뿐만 아니라 의료계 사람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표현이라고 한다. 직장이 생명을 다루는 곳이니 봐서 좋을 게 없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나는 내 평생에 의료계와 인연이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너무 짧은 생각이었다. 많은 관계 속에 어떻게 그런 인연 하나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나와 같은 길이 아니지만, 내가 결국 알아두고 신경 쓸 길이었던 것이다. 의료계는 어려운 길이다. 생명이 달려 무엇보다 어렵고 무겁고 진중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누군가의 비극이 누군가의 일상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비극으로 이루어진 일상은 마냥 개운한 행복이 아니지 않은가.
최근 코로나가 터지면서, 의료계에 대한 비난도 있었고 칭찬도 있었다. 더 나아가 역사상으로 비윤리적인 의료인이 있어 비극을 자아냈었다. 물론 악인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악명 때문에 의료인들의 수고와 노고에 대해서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그 고생과 일은 누군가의 비극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 있을지언정 가치 없는 일이 아니다. 소수의 악으로 다수의 본질마저 흐리지 말아야 한다. 생명을 다루는 건 누구라도 피하고 싶을 무거운 일이 아닌가. 그걸 무시하는 순간부터 인류는 내리막을 걷게 될 것이다.
활인(活人)을 얕잡아 본 국가 중 무너지지 않은 국가가 있던가.
의료인에 대한 존경과 배려는 언제까지고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