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의 말- 타샤 튜더>를 읽고
제일 유명한 삽화가를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 많은 이들이 타샤 튜더를 꼽지 않을까?
자신이 직접 가꾼 화사한 정원 앞에서 웰시코기와 미소짓고 있는 모습의 여성을 말이다.
‘피터 레빗’을 비롯해 정감이 가는 삽화로 자리 잡은 그녀는 고전적인 모습으로 이름을 날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전생이 과거에 분명 있었다고 자신한다. 그만큼 옛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코르셋과 보닛을 비롯해 각종 의상을 입고, 실과 천을 자아내고 옷을 짓고, 옛 화구에서 골동품 식기로 생활을 하는 모습은 정말 어느 옛날이야기 속 인물처럼 비현실적이다. 마치 그녀의 삽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이랄까? 아니면 조끼를 입은 토끼와 손을 잡고 나올 것 같은 모습이랄까? 그런 그녀의 모습은 자연스럽게도 캔버스 위에서나 도자기 위에서만 숨 쉬고 움직일 것 같은 사람으로 상상됐다. 절대 따스한 피와 살결을 가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가 ‘먹고 살기 위해’ 삽화를 그렸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은 그녀를 현실로 데려온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납득하게 하는 단서로서 역할을 아주 톡톡히 했다. 하지만 그 특유의 품위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입체적인 인물로 보이게 했다. 그 이야기는 자기 뜻대로 살아온 사람 특유의 멋이 흘러넘치는 말이었다. 굳이 포장하지도 메꾸려고 하지도 않고 인정하는 모습은 빛나기 마련이니까.
나는 늘 시골과 도시 중 하나를 택하라면 시골을 택해왔다. 물론 그 시골은 도서관과 와이파이와 편의점은 있어야 하지만, 백화점이나 놀이공원, 클럽, 술집보다 바다와 산이 더 좋기 때문이다. 혼자 살기엔 도시가 낫다는 걸 외면할 수 없지만, 도시의 군중은 정말 끔찍하니까. 그 우글거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보고 있어도 그 속에 섞여 있어도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다. 그 어떤 파도나 지진보다도 움직임이 매스껍게 느껴진다.
그래서 타샤를 발견하게 되면 외면할 수가 없어진다. 타샤의 삶을 엿보는 것보다 더한 대리만족은 없을 테니까. 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재능도, 성격도, 실력도 부러워진다. 따라잡고 싶은 마음도 일순 치솟지만 이내 현실적으로 따져보게 된다. 그러고 있노라면 타샤가 말한 생활비로 잡은 붓의 이야기가 가슴에 제일 박힌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대로 해보려면 돈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실에만 메이기에는 삶이 너무 짧다. 그렇기에 타샤는 작업과 생계와 낭만을 합쳐 생활한 것이다.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지만, 타샤는 해냈다. 그러니 착각하지 말자. 타샤는 낭만에 살고 낭만에 죽은 사람이 아니라 낭만을 누리기 위해 현실에서 살아간 사람이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온전히 마음에 달려 있어요. 난 행복이란 마음에 달렸다고 생각해요.”“인생이란 워낙 중요한 것이니 심각하게 맘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날 장밋빛으로 본다. 보통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다. 내 본모습을 못 보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우리는 달과 같아서, 누구나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어두운 면을 지니는 것을.”,
“인생을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에게 해줄 이야기는 없다. 철학이 있다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자신 있게 꿈을 향해 나아가고 상상해온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이라면, 일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만날 것이다.”
이런 타샤의 말에서 타샤가 결코 현실을 무시한 낭만주의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현실에 눈을 떼지 않은 사람이고, 생각이 깊다. 인생의 지혜와 자신의 깨달음을 잘 그러모아 이슬처럼 맑게 울리는 사람이다. 이런 타샤가 너무나 부럽다. 내세울 것이라곤 젊은 나이밖에 없는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일 지경이다. 타샤의 말처럼 너무 사람을 장밋빛으로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흔히들 20대에는 답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휘말리고 뿌리가 얕게 느껴지는 20대보다 깊이 박혀 단단한 노년이 너무나도 부럽다. 모든 노년이 타샤와 같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타샤의 지금 생활은 노년이기에 할 수 있는 생활이라고도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고 싶지는 않다. 주저앉아 쉬어도 되고, 잠깐 잔디밭에 누워 바람을 느껴도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앉는 느낌이 싫다. 그렇다고 마냥 순탄히 걷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넘어지지는 않으니까.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매일 하려고 마음먹은 걸 하나하나 하면서 느끼는 쾌감과 안정감은 중독을 부르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성취’에 집중해서일까?
타샤의 말이 유독 와닿았다. 내가 언젠가 타샤처럼 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걸 이루어 현실에서 누릴 수 있을까? 타샤가 정원을 정리하면서 날 보고 너무 얽매이는 게 아니냐고 물어보는 것만 같다. 아쉽게도 내겐 정원과 꼭두각시만큼 정이 가는 것이 책과 그림 그리기 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나 자신을 더 알아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면서, 언젠가는 타샤처럼 되기 위해. 그녀의 인생을 배우기 위해! 그녀는 즐거움을 삶으로 가져온 가장 유명한 사람이므로. 물론 “5월의 새로운 환희 속에서 눈을 그리지 않듯, 크리스마스에 장미를 갈망하지 않는다네.”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훗날 올 그날을 위해 오늘에 아스팔트를 뿌리진 않을 테다. 쉽지는 않지만, 알고 있다! 초라한 나도 나고, 힘든 나도 결국 나 자신인걸. 그러다 보면 낭만은 내 인생에 스며들 거고, 현실은 내 곁에서 걷고 있을 것이다. 참 좋은 결말이 아닌가? 우리의 낭만을 누리기 위해, 현실에서 잘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