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 최태성>을 읽고
그걸 배워서 어디에다 써먹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걸 왜 해? 그건 스펙도 안 되잖아.
이 말은 놀랍게도 어른에게서 들은 말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또래에게서 나왔다. 모두 나와 비슷하게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순수하다시피 나온 질문이었다. 역사를 배워 어디에다 쓰냐고. 훗날 취업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능력으로 취급받는 것도 아닌데. 왜 연도를 외우고 인물을 알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살아온 세월은 고작해야 15년. 나는 그런 의문에 말문이 턱 막혔었다. 역사를 왜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재밌다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역사가 어렵다는 친구들과는 서로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배워야 하느냐는 질문은 더 어려웠다. 영어처럼 외국에서 활용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수학처럼 수능에 필수인 것도 아니다. 국어처럼 기본으로 지녀야 할 소양도 아니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애매했다. 그렇게 해답을 미뤄온 지 어언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른다. 몇 달 전인가, 한 역사 선생님의 말씀이 sns에 올라왔다.
“너희가 세상에서 살려면 무기가 필요하다. 너희를 지키고, 너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무기는 수학과 영어다. 하지만 그 무기의 방향을 결정하는 건 역사다. 역사에서 너희는 그 방향을 배울 수 있다. 방향이 없으면 무기는 위험하다.”
정확하지 않을 순 있어도, 이런 맥락이었다. 충격이었다. 바로 이게 내가 꿈꾼 답변이었다! 역사가 얼마나 많은 교훈을 담고 있던가. 동화나 설화보다도 다양한 인간상이 보이고,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가 보이니 말이다. <역사의 쓸모>도 그와 비슷한 해답을 내게 보여주었다.
역사는 사람들의 기록이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기록하고,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중대한 일을 남긴다. 설사 그 기록이 편파적이래도, 여러 연구와 증거로 그때의 시대상을 알 수 있다. 어느 시기에 무슨 발견이 되었는지,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어떤 왕조가 망하고 또 어떤 왕조가 건국되었는지 모두! 그 말은 아주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누가 멍청하고 미련한 선택을 했는지 누가 옳았는지 전부 남겨진다는 소리다. 실제로 어떤 나라가 망했을 때 누가 배신했고 누가 멍청했고 누가 잘못했는지 기록되지 않은 바는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가 나라를 전성기로 이끌었는지, 그 토대를 누가 세웠는지, 모두가 알고 있다. 사람은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존재지만 참 똑똑한 존재들이다. 기록을 남겨 선례를 남기고, 그 선례를 바탕으로 더 발전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다. 당장에 불합리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걸 묵인할지언정 기록을 부정하지 않는다. 기록하는 것 역시 막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알기 때문이다. 결국, 진실만이 남고 악은 평생 오명을 쓴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올바른지 아닌지, 이 길이 옳은 길인지 아닌지는 역사를 보면 답이 나온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도 사람은 그다지 본질에서 변하지 않았으니까. 남보다 좋은 생활을 누리고 싶고, 위대한 사명보다 지금의 안락이 반가운 건 언제나 그래 왔다. 고작해야 몇천 년 동안 무슨 종족의 변화가 일어났겠는가. 인류는 몇백만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진화했다. 문자가 만들어지고 기록이 생겨 ‘역사’가 시작된 이후는 아직 너무나도 찰나의 시간이다. 역사 속 인물 누구를 보더라도 우리가 큰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다.
만일 역사가 단지 몇 명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그 의미는 아주 다를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역사는 정말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배층에 쏠려 있긴 하지만 백성들의 이야기, 상인들, 관리들, 노비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이름 없는 여성들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고, 당시에 아무리 힘들었어도 뛰어난 이의 모습은 언제고 빛을 발한다. 우리는 그들의 인생과 태도로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아주 높고 철학적인 주제부터 단순히 무엇이 몸에 해로운지까지.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바른 지 물을 필요도 없다. 배신자의 이름을 좋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던가. 한때 성공 가도를 달린 엘리트 출신의 관리 5명, 을사오적의 명성은 아직도 떳떳하던가? 한평생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쓰고, 굶주려 죽을 지경이었던 일가의 이름은 그들과 비교할 수 있는가? 모두가 한마음으로 답할 수 있다. 독립운동의 명성은 영원히 아름답게 남을 것이다. 매국노들의 이름은 영원히 굴욕스러울 것이다. 그들의 후손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는다 해도, 역사는 변치 않는다. 그 사실만 알아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많은 의지가 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역사는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이나 영어처럼 어떤 과목으로 완벽히 분리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 조상의 삶이고, 선대의 인생이고 이야기이다. 우리는 사는 환경과 배우는 지혜, 사소한 신념까지도 모두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끼리의 감정과 생각과 운이 합쳐져 나온 것이 역사다. 그걸 알고 있다면, 우리는 살면서 마냥 막막한 일은 없을 거다. 행운이지 않은가. 그 많은 선례가 우리에게 있다. 예시가 많고, 교훈도 많고, 옳고 그름도 명확하다! 역사의 쓸모를 제대로 써먹어 보자.
몇천 년에 걸친 기록과 지혜를 썩혀 두긴 너무 아깝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