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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Oct 16. 2021

기억하는 첫 책, 첫 순간은
언제나 훌륭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좋은 시작에 대해서

뭐든지 시작이 중요하다. 흔해 빠졌지만,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이다. 시작은 처음에만 가능한 일이기에, 막막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일단 움직이고, 행동한 후에 점점 수정해가며 바꿔나가면 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가끔, 시작 자체가 너무 훌륭한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 그 시작이 인생의 큰 축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시작이 엄청나게 특이하거나 별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한 번쯤은 사람들이 겪었을 시작이었다. 어찌 보면 굉장히 밋밋하기도 했다. 엄마가 읽어주시는 동화책을 듣는 순간이었으니까. 나는 어릴 때 외갓집에서 자랐다. 첫 외손녀인 데다, 부모님이 맞벌이로 바쁘신 탓이었다. 덕분에 사랑도 양껏 받고 외로움 없이 자랐다. 그렇지만 엄마 아빠와의 낯가림은 어쩔 수 없이 따라왔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외할머니와 붙어 있고 이모 소리가 입에서 떠나지 않던 아이가 바로 부모님을 따를 리 있으랴. 부모님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빈자리의 허전함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색한 순간은 선명했다. 초등학교로 올라가면서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묘한 어색함이 짙었다. 서로 애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색한 건 정말 불편한 일이다. 어린아이에게는 그 불편한 공기가 더 무겁게 느껴졌었다. 내 방도 있었고 이야기도 곧잘 했지만, 완전히 해소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그렇게 되는 데 일등공신을 한 건 의외로 아주 단순했지만 말이다.      


눈치챘겠지만, 그 일등공신은 다름 아닌 엄마의 동화책 낭독이었다. 그때 엄마는 딸도 돌봐야 했지만 집에서 일도 해야 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리해야 하는 게 한두 개도 아니었고 아이는 아직 어리고…. 온통 정신이 없었는데, 자기 전에 책을 읽어주시곤 했다. 나긋나긋하면서도 실감 나게. 나는 그 순간이 참 좋았다. 내가 기억하는 책과의 첫 순간이다. 그 전에도 분명 책을 읽었겠지만, 희한하게도 그 순간만큼 분명하지는 않다. 성인이 된 지금도 엄마의 목소리가 어른거리는 걸 보면 내 생각보다도 나는 그 순간에 행복했었던 것 같다. 침대에 누워 음성을 듣고 있노라면 나른하고 미소가 지어졌었던가. 그래서 그 이전의 기억은 묻혔을지도 모른다. 신데렐라, 빨간 모자, 잭과 콩나무 따위의 그 동화책들은 엄마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살아났었다. 분명 우리 엄마는 목소리가 좋긴 하지만, 특별히 능청스럽다거나 연기력이 좋지 않다. 뻔뻔하지도 않고 유머 감각이 철철 넘치는 사람도 아닌데 그때의 엄마는 정말 뛰어난 몰입력으로 책을 읽어주셨다. 어린 마음에도 구연동화 선생님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떠올려보니 희한할 지경이었다! 엄마들은 엄마가 되는 순간 슈퍼우먼이 된다더니 그게 이런 경우를 말함인가, 싶었다. 우리 엄마는 활발하기보단 차분하고, 말로 정리하기보단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걸 좋아한다. 어렸던 내가 크면서 모르던 엄마의 모습을 점점 보게 됐고, 그렇게 본 엄마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는 그 순간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게 이상하다거나 섭섭하단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어린 딸에게 그 정도의 인상을 남겨줬는지, 엄마 같은 사람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느껴져서 울컥했다.      


그러니까, 엄마가 내게 선물한 책과의 시작은 대성공이었다. 옛날의 그 순간에도,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어릴 땐 나를 웃게 해 줬고, 책을 읽는 게 어떤 재미인지 확실히 알도록 도와주셨다. 성장한 후에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고 나를 지탱하는 하나의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이런 경험이 있다는 건 참 행운이다. 사람의 시간은 다 다르게 흐르고, 제각각의 방향과 깊이로 나아간다. 같은 시간이지만 그걸 다루는 건 각자에게 달린 일이니까. 이따금 엄마가 존경스럽다. 어떻게 육아라는 첫 환경에서 나에게 그런 훌륭한 시작을 안겨주셨는지. 괜히 그 사실에 부담을 느낄 때도 있지만, 마음속에서 빛나는 그 시작을 생각하면 참 좋다. 내가 지금 열정적으로 이것저것 도전해보는 건, 그렇게 좋은 시작을 접했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 시작으로 나는 내 생애 내내 함께할 친구도 얻었고, 재주도 얻었고, 자신감도 얻었으니까. 시작이 무조건 좋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때로 이런 순간도 있단 걸 자각하면 시작 자체에 겁이 없어진다. 살기 힘든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고 해야 하나?     


시작에 거부감이 들고 무섭다면 우리의 좋은 첫 순간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인생의 계기를 찾는 그 시간은 짐작보다도 더 행복하고, 충만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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