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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윤 Oct 17. 2021

어떨 땐 안타깝고, 밉고, 그저 고맙다

내 첫 단짝 책에 대하여

어릴 땐 단짝 친구가 없으면 세상을 헛되게 산 줄 알았다. 크고 나서야 헛되단 표현을 붙인 게 아니다. 막 열 살을 넘긴 때였는데도, 사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친구를 만드는 것도 힘든데 단짝이라니! 단짝은 모름지기 서로 모르는 것이 없으며, 너무나 잘 맞는 영혼의 짝꿍이 아닌가. 그때는 공부하는 것보다도 단짝을 만드는 게 더 막막했다.      


안쓰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한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좀 우습기도 하다. 아니, 그냥 친구들이랑 잘 지내면 되지, 뭘 단짝까지 있어야 하나. 그것도 마음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사이인 단짝이. 나는 단짝이란 존재가 별 것 아니란 걸 너무 늦게 알았다. 고등학교 즈음에야 최고 친구란 게 사실상 없단 걸 깨달았으니까. 모든 걸 함께해야 친구인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을 할 때 유독 잘 맞는 사람이 있단 걸 알았다. 한 쌍의 손이나 발처럼 움직이는 사이는 꿈같은 소리라는 것도.      


내가 그토록 단짝에 대해 숭고한 의미를 부여했던 건, 내 어릴 적 베스트셀러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베스트셀러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을 말한다. 내게 너무 허황된 꿈을 심어 준 책. 친구와 우정을 동경하게 만든 책. <빨간 머리 앤>이 그 범인이었다.      


지금도 저 짧은 세 단어에 가슴이 뛰지만, 그 시절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앤의 붉은 머리부터 초록빛 눈, 주근깨와 입담, 풍부한 상상력과 똑똑한 머리까지! 내게 앤은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 애는 고아였지만 너무나 대단했다. 사람에게 상처 받기도 하고 실수도 많이 했지만 이상하게도 완벽해 보였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 때문인지, 내겐 없는 친구들과 날씬한 몸매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게 질투로 가지 않았단 점을 생각하면 그냥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저 눈에 들어오고, 그러고 나서 빠져나가지 않았을 뿐이라 해야 하나. 나는 앤 셜리의 모든 게 부러웠고, 좋았다. 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앤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 모두가 흡족했다. 어울리는 표현을 찾자면, 내가 앤의 열성 팬이라고 하는 게 가장 맞는 것 같다. 아이돌을 좋아하면 관련된 걸 하고 싶어 한다고 하던가. 내가 딱 그런 팬의 모습이었다. 앤이 그토록 원한 단짝 친구의 흔적이 그토록 깊이 남았으니.    

 

사실, 모두 앤의 탓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단짝 친구란 초등학교란 작은 사회에서 부모님과도 같은 존재감이니까. 거기다 친구를 사귀기 어려워했던 내 처지도 한 원인을 차지했을 테다. 타오르는 듯 새빨간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앤이 날 나무랄지도 모른다. 남 탓만 해서 쓰냐고. 내가 분명 다이애나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그럼 나는 다이애나와 닮았지만 다른 검은 머리를 들썩이며 반박할 거다. 앤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단짝이란 존재를 그렇게나 열망했을 것 같냐고. 십 년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너의 존재가 뚜렷한데, 그때는 말해 무엇하느냐고. 앤이나 나나 말하길 좋아하고 한 성격 하는 여자애들이니, 그 싸움은 오래갈 거다. 차라리 그런 싸움이라도 한번 했으면 좋겠다. 책을 친구로 삼는 건 이게 서럽다. 나는 책과 함께한 추억과 영향을 다 간직하는데 책에겐 티끌 하나 영향이 가질 않는다. 사람이 싸움도 하고, 서로 서러움도 풀고, 문제도 해결하며 나아가야 하는데 책은 그러질 못하니 억울한 일이다. 흔한 친구들처럼 사이가 멀어질 염려는 안 해도 되지만, 함께 깊어지질 못한다. 그게 아무리 좋아했던 책이라고 해도. 

    

그러니 내가 아무리 단짝 친구 사건에 대해 앤을 범인으로 뽑아도, 달라지는 건 없다. 내가 앤의 영향으로 단짝 친구란 존재에 대해 오랫동안 갈망하며 괜한 불안을 느꼈대도 결국 나의 일일 뿐이니까. 이럴 땐 참 책이란 존재가 얄밉고 원망스럽다. 물론 그렇다 해도 책을 마냥 미워할 수도 없다. 앤은 내게 단짝 친구가 얼마나 좋은지 보여주면서, 동시에 친구를 사귈 때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는지,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사람을 만나고 잘 지내는 걸 알려주었으니까. 거기다 알려준 게 없을지라도, 나는 앤을 완전히 미워할 수 없다. 그 가냘픈 몸이 얼마나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해주었는데 그런 감정을 품을 수 있겠는가.   

  

아까 책은 결국 함께 성장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했는데, 어쩌면 그게 책의 존재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라고, 그 책은 그대로 있으면서 사람이 성장한 걸 알게 해주는 것. 그러면서도 좋은 영향 나쁜 영향 다 주어 훌륭한 짝꿍의 임무를 다하는 것. 내 친구 <빨간 머리 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내 최초의 친구일지도 모르는 앤 셜리는, 이런 내 생각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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