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윤 Oct 15. 2021

책 읽는다고 굶기도 했었죠

책을 사랑했던 중학생 시절의 어이 없는 이야기

한 친구와 오래 사귀면, 작든 크든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이건 꼭 사람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서, 책의 경우에도 똑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 함께한 친구이니 좋은 영향도 많았지만 탈도 참 많았다.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학창 시절에 특히나! 아직도 동창 친구들하고는 두고두고 이야기할 정도다. 몇몇만 알기엔 아까운지라, 그중 하나를 소개해본다.     


중학교에 막 진학했을 때였다. 위인전이나 학습 만화, 키다리 아저씨나 작은 아씨들 같은 명작만 읽던 아이가 처음으로 판타지 소설이라는 세상을 접했다. 그때의 그 황홀한 충격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눈이 커지고 입은 벌어지는데 아무 소리도 나올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은근히 추천하기에 집어 들었더니, 놓는 법을 잊었다. 되새겨보면, 그때도 ‘책을 좋아하는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했었다. 명작이며 위인전 같은 것만 책이라고 여기고 스스로를 뿌듯해했었는데, 새로운 세상의 아름다움은 그걸 무너뜨렸다.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현대를 본 고대의 사람들의 기분이 그랬을까? 피라미드를 처음 발견한 고고학자가 그런 감정이었을까? 처음 보는 세계, 처음 보는 인물들의 모습이 펼쳐지는데 너무나 아찔했다. 분명 소설이니 검은 글자에 불과했을 텐데, 총천연색이 눈앞에 선명히 드러났다. 누군가는 왜 그런 소설을 읽었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 봐야 읽을 가치가 떨어지지 않느냐고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독서’와 진정으로 담쌓고 지낸 사람이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책이란 공부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기도 하지만 즐기기 위해 읽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의 상상으로 이루어진 걸 경험하면서 새로운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현실을 버틸 힘을 얻는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과거에 있었던 일도 아니고, 발견한 사실도 아닌 순수한 한 인간의 창작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누린다니. 나는 그때 판타지 소설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라는 작품으로 그러한 세계에 들어갔다. 아, 예쁘고 위험하고 끝이 없는 그런 세계에 흠뻑 빠진 것이다.     


표현이 마치 마약처럼 됐는데, 마약보다 건강했을 뿐 그 중독성은 똑같았다. 14살이면 한창 배가 고파 군것질거리를 입에 달고 다닐 때다. 밥은 기본으로 비우고 말이다. 그 창창한 성장기에, 나는 급식실로 가지도 않았다. 이유는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책 읽는 게 점심을 먹는 것보다 좋았으니까! 급식을 먹으려면 기다리다가 반 순서에 맞춰 급식실로 가야 했는데, 만약 늦으면 급식 아주머니들께 한 소리를 들었을뿐더러 친구들에게도 미안했다. 그렇다고 점심을 먹은 후에 도서관에 오자니 밥 먹기 전 시간이 아깝고, 뒷 순서인지라 남은 시간도 얼마 되질 않았다. 또 그렇다고 책을 안 읽을 수도 없었다! 점심시간은 1시간이 넘는 귀중한 자유시간이지 않은가. 그 시간 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건 꼬르륵거리는 배보다 행복함을 채워줬다. 처음 느끼는 중독적인 장르의 재미로 얼마나 많은 급식비를 날렸는지…. 친구들은 몇 번은 함께 도서관에서 읽다 갔고, 몇 번은 잔소리했고, 몇 번은 기다려주다가 이내 포기했다. 내가 책을 읽는 데 진심이란 걸 알아본 것이다. 하기야 교실을 옮길 때도 책을 읽으며 걸어갔으니 알아보지 못하는 게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밥을 안 먹는 것도 걸으면서 책을 읽는 것도 부모님께는 비밀이었다. 건강에도 안 좋고 위험하고, 돈도 아깝고, 잔소리를 듣는 최적의 조건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름 잘 둘러대면서 그 패턴을 유지하고 있었다. 책을 읽기 위해 학교에 가서 공부하다가 책을 읽고, 때때로 점심시간 내내 도서관에만 있다가 대출해오는 그런 패턴을. 문제는 얼마 가지 않아 드러났다. 후두염에 걸려버린 것이다.  

   

감기는 걸린 적이 있었지만 후두염은 처음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쉰 목소리가 나왔다. 열도 펄펄 끓어 링거를 처음 맞았다. 찬 바람을 맞은 게 원인이었지만, 밥을 안 먹어 면역력이 약해졌단 이유도 있었다. 양심이 찔려서 아픈데 부모님을 보기가 어려웠다. 입원까지 했으니 죄책감은 배로 불었다. 다행히 다음날 깨끗이 나았지만, 그때 이후로 점심만은 먹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식한 짓이다. 책을 더 읽겠다고 밥까지 굶었으니. 누가 들으면 전쟁통에 있었던 일인 줄 알지 않았을까? 책이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손에서 책이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그 시절의 흥분되는 감각이 생생한 걸 보면, 그 중학생은 참 재밌어서 어쩔 줄을 몰랐나 보다. 지금도 그 재미를 알지만 그때를 이길 순간은 아마 앞으로는 없을 거다. 처음은 가장 강렬하고 매혹적인 법이니까. 다시 경험할 수 없다는 게 아쉽다.      


눈 반짝이며 점심 종소리도 외면하던 그 가슴 박동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말이다.

이전 06화 어떨 땐 안타깝고, 밉고, 그저 고맙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