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무례함
마음은 말로 표현해야 알 수 있다.
오전 9시 충무로역 3호선 갈아타는 곳, 바쁜 사람들 물결에 떠밀려 내려가는 계단을 앞두고 뛰어가려는데
누군가 내 구두 뒤축을 밟았다. 구두가 반쯤 벗겨지며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너무 깜짝 놀랐지만 반사적으로 중심을 잡은 후 얼른 신발을 고쳐 신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무리에 휩쓸려 뛰었다. 내 심장도 쿵쾅쿵쾅 요란하게 뛰었다.
앞질러 계단을 내려가는 그 남자를 보며 '무례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내 얼굴이 벌게지는 걸까. 홍수가 난 듯 몰려든 인파가 각자 갈 길로 뿔뿔이 흩어진 후에도 그는 여전히 내 앞에서 걸어갔다. 그의 뒤통수를 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그리 어렵나?'
'이미 마음속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거야. 너무 순간이라 때를 놓친 거겠지.'
'마음은 가득한데 쑥스러워서 표현 못 한 거일 수도 있어.'
나도 참! 그의 무례함을 애써 감싸고 있지 않은가!
1분도 채 되지 않을 짧은 순간, 참 많은 생각이 들락거리는 중이었다.
뚜뚜뚜...
요란한 경적이 울리고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맞이하느라 생각이 잠시 멈췄다. 전철이 몰고 오는 바람에 붉어진 얼굴도 가라앉았다. 전철에 몸을 싣고 빈자리로 걸어가는데 '앗, 그 남자다.!'무심코 지나치던 시선에 앉아있는 그 남자가 들어왔다. 결국 같은 지하철, 같은 칸에 탔다. 그에게는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이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하철을 탈 때면 늘 설레던 내 마음은, 예민해져 타인을 경계하며 바짝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쳐가는데 그가 나를 힐끔 본다. 그렇게 느껴졌다.
'미안한 마음이 드나?'
에잇, 또다시 시작되었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실수였다고 해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끝났는데... 그랬다면 내 마음도 훈훈해져 지금 이 순간 내 앞의 낯선 사람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한참이 지난 아직까지도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자꾸 생각이 이어지는 건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다. 우리는 말을 참 아끼고 산다. 아니, 정작 해야 할 말은 아끼고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은 너무 남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불편해지고 소통이 힘들어지는 게 아닐까. 그 순간 마음 담긴 한 마디면 됐는데... 설사 내가 다쳤다 해도 모든 게 괜찮아지는 마법의 말 한마디다.
"미안합니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의 말 한마디가 갖는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 순간을 놓쳤다 하더라도... 좀 늦으면 어떤가. 진심이 전해진다면야.
나에게도 말로 표현해야 했던 '찰나'를 놓쳐 두고두고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그때! 조금 늦게라도 얘기할걸... 후회로 남는 순간들이다.
남 탓할 일 뭐 있는가. 나부터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과 행동으로 잘 표현하면 된다. 본의 아니게 그 누군가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적은 없는지, 상처 준 일은 없는지 돌아보며, 생각났다면 늦게라도 표현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