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사랑
사춘기 딸과의 전쟁 후 남은 건 부디 상처뿐만이 아니길 바라며.
단언컨대 나는 평화주의자다.
딸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나도 선을 넘었고,
그 바람에 남편도 선을 넘었다.
밑도 끝도 없는 짜증을
번번이 받아줄 수도, 더 이상 참을 수도 없었다.
부모라면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쳐야 한다.
늦은 밤.
딸의 도발인지, 나의 도발인지 구분이 모호할 만큼
일방적인 난투극이 끝난 후,
우리 마음은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딸이 아빠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내게로 와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지만
딸은 이미 알고 있다.
엄마는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렇게 나의 맘을 요동치게 만들고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끝나고 마는,
이런 전쟁은 애초부터 시작되지 말았어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상황이 그리 쉽게
괜찮아지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단번에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이유다.
끙끙거리며 긴 밤을 지새웠다.
아침에 힘겹게 눈을 뜨니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밥을 꼭 먹는 딸을 위해 계란 프라이를 했다.
평소 같으면 나가는 시간이 좀 지나 짜증을 냈을 텐데
말없이 앉아서 먹는 모습이 고마웠다.
어젯밤의 전쟁에
제대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짧게나마 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크는 과정에서 때로는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순간들이
있어. 엄마, 아빠도 겪었기에 잘 알고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부모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있는 거야."
딸도 으레 지나쳐온 사소한? 짜증일 뿐이었는데,
일이 커져 적잖이 당황했을 터였다.
이번 사태로 누누이 참고 견뎌 온 엄마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음을 잘 깨달았기를 바랐다.
"야단맞은 너도 많이 속상하겠지만, 엄마, 아빠도 그만큼 마음이 아파. 앞으로는 서로 마음 아플 말과 행동은 하지 말자."
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도 시야가 흐릿해졌다.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안도감을 엿보았다.
나 또한 이 평안함이 지속되길 바랐다.
꼭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해주며 등굣길을 배웅해 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엄마인 내가, 어른인 내가,
더 꾹 참았어야 했다는 후회도 마구 밀려들었다.
사춘기 아이일 뿐인데, 내가 너무 고루하게 굴었던 걸까.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하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마구 일렁였다.
평화주의자인 나는 반복되는 사춘기 딸과의 전쟁에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른인 내가 좀 더 너그럽고,
지혜로운 사람이면 정말 좋겠다 싶은 순간들이 있다.
인생에서 사춘기 자녀와의 갈등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우쳐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뒤죽박죽인 마음으로 책장 앞에 섰다.
지금 딱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은 뭐가 있을까?
아, 찾았다.
장영희 님의 에세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분명 이 책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꺼내어, 책장을 넘긴다.
아, 벌써 위로가 된다.
그리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다.
책을 읽으며 비로소 깨닫는다.
내게 너무 힘들고 지친 하루도
그저 평범한 일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떤 이에게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참 소중하고 기적 같은 순간임을...
잠시 여유를 가져본다.
잠잠히 내 마음에 넉넉함을 채워본다.
순간순간이 기적이고 감사다.
딸이 너무나 보고 싶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꼭 끌어안고 말해주리라.
"미안해. 엄마가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서 사과를 못 받아줬어. 엄마도 미안해. 네가 왜 짜증이 났는지
알면서도 모른 체해서. 엄마가 힘들어서 마음에 여유가 없었어. 앞으로는 네 마음을 더 잘 살피도록 노력할게. 사랑한다. 엄마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