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캉스는 처음입니다만
느닷없이 호텔숙박권을 상으로 받았다. 2인용이었다. 서울의 D대학 앞에 있는 이름도 익숙한 호텔이었는데, 2명이라니.. 우리 가족 다 가자고 인원수를 늘리다간 호텔비로 배보다 배꼽이 커질 것 같아 남편이 아이들을 보고 나 혼자 1명을 섭외해 다녀오기로 했다.
생전 처음 가는 호캉스... 누구랑 가지?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한 사람이 있다. 20대 초반부터 열심히 붙어 다니면서 나의 개성 있는 성격을 받아주고 동고동락을 함께했던 그녀. 나보다 한 살 많지만 학교를 같이 다녀서 내가 한사코 친구라고 우기면, 꼭 결정적인 순간에 본인이 언니라며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어 하는 요즘 트렌드를 거스르는 꼰대. 나보다 일찍 결혼했음에도 올해 첫 아이를 임신한 대단한 여자. '행운이 엄마'를 모시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아는 여자 중 가장 운전을 잘한다. 20대 초반부터 아버지의 기사로 활약했으며, 남동생 남자 친구 남편 등 주변의 남성들을 제치고 운전대를 잡은 지 최소 25년은 되었을 거다.
“그런데, 최근에 차를 팔아서, 호캉스날 스타렉스 끌고 가도 돼? “
“풋. 되고말고. 큰 차면 더 좋아. 짐도 많은데…. “
그리하여, 첫눈치고는 심하게 많이 내렸다 싶은 날, 제설작업이 안 되어 눈이 쌓이고 얼어있는 골목을 뚫고 그녀는 나를 데리러 왔다. 짐을 줄인다고 노력했는데도 작은 캐리어 1, 재택을 위한 노트북이 든 백팩, 촬영도구가 든 빅백까지 낑낑대며 들고 가면서 비로소 호텔에 간다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임신 19주 정도 된 그녀는 배가 꽤 나온 채 운전대에 앉아 있었다.
"행운아, 안녕!"
"오냐. 반갑다."
"오느라 안 힘들었어?"
"실은 의사 선생님이 노산이라 웬만하면 누워있으라고 해서, 오늘 오랜만에 운전대 잡은 거긴 해."
"그랬구나. 얼른 도착해서 좀 쉬자."
한 시간 반을 신나게 달리니 목적지가 보였다. 주차를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주차타워에서 빈자리를 찾아 주차하고 우리 짐을 챙겨 호텔건물로 올라가는 셔틀을 잠시 타면 되었다. '발레파킹' 이런 걸 상상했었는데 역시 우리 스타일은 매우 서민적이 고만! 그녀는 호텔 건물 쪽으로 가면서 내가 오후에 일할 동안 시간이 되면 면세점이라도 구경 가보리라 호언했지만, 결과는 어땠을지?
프런트에서 신분증을 보이고, 룸키를 받았다. 적당히 밖이 보이는 통창이 있는 아늑한 방이었다. 화장실과 샤워실, 따로 있는 반신욕조와 널찍한 세면대가 매우 맘에 들었다.
재택근무 할 준비를 마치고 라운지가 열리는 오후 3시까지 기다리는데 배고픔이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구운 계란이라도 비상식량으로 챙겨 올 것을...'
방에 준비돼 있는 생수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렇다고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마구 꺼내 먹었다가는 나중에 다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검색으로 알고 갔기에 그건 의식하지 않으려 참을성을 발휘해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그녀는 다행히 행운이가 아직은 먹을 걸 달라하지 않는다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3시가 되자마자 노트북을 챙겨 라운지로 이동했다. 창밖엔 눈발이 날리는 흐릿한 도시의 전경이 다가왔다. 오기 전에 짊어지고 간 걱정들이 눈발과 함께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라운지 특식은 오후의 당 춘전을 위한 고급진 것들이었다. 건강을 위해 탄수화물을 제한한 지 6개월이 되었음에도 호텔+통창+오후의 탄수화물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달다고 연신 불평을 토해내면서도 나온 간식들을 야무지게 다 먹고서 방으로 돌아왔다.
재택업무가 조금 한가한 여유시간에 SNS에 올릴 사진을 집중 촬영했다. 호텔의 최대 장점은 조명발이 끝내준다는 것. 어디를 배경으로 삼아도 깔끔하고 분위기 있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촬영하려면 일단 청소하고 정리하느라 진이 빠지는데, 그런 수고가 사라지니 온전히 촬영에만 집중할 수 있어 확실히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것저것 촬영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편안하게 누워서 핸드폰을 보거나 남편과 통화를 했다. 우리 사이에는 서로에게 구애받지 않는 편안함이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재택업무가 끝나고 저녁뷔페를 먹으러 라운지로 향했다. 일이 끝나니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한없이 들떴다. 저녁뷔페의 최대 장점은 주류를 무한대로 마실 수 있음. 나는 평상시에 술을 마시지 않고 가끔 와인만 한잔씩 하는 편이라 기분을 내보기로 했다. 임산부인 그녀는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사진만 연신 찍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그녀의 지난 20년 이야기보따리가 시작되었다. 웬만한 건 다 안다고 여겼는데, 그녀의 삶에 깊게 드리운 외로움과 분노에 대한 깊은 사연들은 그제야 기지개를 켰다. 와인 두 잔을 마시고 10분 후 영업이 끝난다는 안내를 받을 때까지 앉아있다가 라운지를 벗어나니 잠시 산책을 하고 싶어졌다. 창문으로 봤던 새로 설치된 트리를 보러 나갔다. 위에서 볼 땐 분명히 길이 보였는데, 로비로 내려오니 토통 길을 찾을 수 없고 겨울밤의 추위까지 한몫해서 산책은 5분 만에 끝났다.
내일 아침을 위해 피트니스 센터 위치까지 파악하고 방으로 돌아와 난 샤워와 반신욕을 했다. 오래간만에 많은 염분섭취와 반신욕의 효과로 생수를 한병 다 마시고서 개운한 몸으로 침대에 들어갔다. 다시 시작된 그녀의 이야기. 듣다가 깜박 졸음이 올 때쯤엔 한밤 중을 지나 떠나야 하는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4시간 자고 일어나 피트니스 센터에 갔다가 조식을 먹겠다고 한 계획은 알람을 끄고 또 잠이 드는 것으로 깨끗이 정리되었다. 그래도 오전 내에 각자의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7:30에 세수도 포기하고 모자를 눌러쓴 채 조식을 먹으러 향했다. 블라인드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차분한 분위기와 이른 시간의 한산함은 곧 떠나야 하는 아쉬운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조식은 30분 정도면 충분하겠지 했던 생각은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계란요리와 따끈한 죽에 반해서 1시간 반을 앉아있게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제야 과거에서 현재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계신 60대 정도의 여성분들이 보였다.
"행운이 태어나서 많이 키워놓고 우리도 저 정도 나이돼서 또 호캉스 오면 좋겠다."
그녀의 말이 이번 호캉스가 좋았다는 의미로 들려 뿌듯했다.
"그래, 그때 돼서 또 오자."
조식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서는 부산하게 짐을 싸서 차로 이동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딱 한 시간 걸렸다.
"즐거웠다. 운전하느라 애썼고 함께 해줘서 고마워."
"헤어지려니 아쉽다."
"그러게, 좀아까 만나서 줄발한 것 같은데...."
그렇게 우리의 호캉스는 정확히 24시간 만에 끝났다. 집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내 머릿속에 남은 건 그녀의 20년. 그 뒤에 몰려오는 아쉬움. 가족들을 만나서 포옹하고 점심을 먹고 졸음이 몰려와 침대로 들어갔다. 한 시간 반 가량을 떡실신했다가 일어나니 신랑이 한마디 한다.
"자기 코 엄청 골던데...?!"
한겨울밤의 꿈처럼 자고 일어나 보니 꿈이었던 것 같은 친구와의 호캉스. 가기 전에는 바쁜 스케줄과 이런저런 걱정으로 또 하나의 해결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졌는데, 잘 먹고 잘 쉬고 더 건강해져서 돌아왔다.
"친구야, 건강하게 순산하자. 너와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게 되어 기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