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황정은, 창비
용산참사, 세월호, 천안함, 성소주자, 장애인 인권, 미등록 이주 아동 등 생존을 위해 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운 표정과 말을 뱉고는 다시 내 현실로 돌아왔다. 엄마로, 아내로, 자식이 되어 아이의 학원 스케줄을 짜는데 머리 아파하고, 어버이날 선물과 식사 메뉴를 걱정했다.
내 그림자가 나보다 커질까 봐 끄기 바쁘고 내 이웃의 아이 돌봄의 잠깐의 부재가 더 걱정인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매일 이 글을 쓰고 오후에는 용산 참사의 현장으로 갔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현장을 봤다. 기사에 내보내는 것처럼 사실 그대로를 쓴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 개개인의 절망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한 뼘의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을 쓰기 위해 작가 안에서 백의 여과기를 돌렸을 것 같다. 무재와 은교의 대화에는 큰따옴표가 없다. 간결하고, 상대의 말을 자주 읊조린다. 그 말을 곱씹어 더 되새기게 한다. 위로조차 조심스러움이 여백 곳곳에서 느껴진다.
서로를 향해 그림자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은 사십 년 된 도심의 전자상가에서 생업을 이어간다. 가, 나, 다, 라, 마동이 복잡하게 개축된 이 상가는 철거에 관한 내용이 늘 오간다. 가동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다음 차례는 너라고 선전 포고하는 것 같다. 늘 나와 붙어서 무너져가는 사람들의 틈새를 비집고 불쑥 튀어나온 그림자는 주인을 삼키려고 한다. 그곳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산다 하지만 눈물만 있는 곳이 아니다. 각자 주어진 인생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이곳을 신문이며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슬럼이라 부른다.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구역이라고,
주인공 무재와 은교도 자신의 그림자의 존재를 알고 있다. 무재의 아버지도 무재가 어렸을 적 전자상가에서 난로를 팔았었다. 아버지는 빚을 남기고 그림자를 따라갔다. 그래서 그림자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은교가 뭔지도 모르고 따라가는 것이 그림자임을 안다. 무재는 은교에게 말한다.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예요.'라고.
나동에서 수리점을 하는 여 씨 아저씨에게도 그림자가 다녀갔다. 아저씨는 가족의 무관심 속에 그림자를 따라가려 했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세상살이가 너무 버겁고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갈 때, 그 짐을 혼자 짊어지는 것이 외로울 때 다 놓고 따라가고 싶은 심정이다.
또 유곤 씨가 열두 살 때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서 타워크레인의 추가 떨어져 압사한다. 아버지의 그림자에 전염되어 어머니는 그림자를 업고 온다. 때론 그림자는 상대가 먹히는 것을 보고 내 그림자를 깨우기도 한다. 그 슬픔과 절망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내 그림자를 불러드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뭣도 없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유난히 더 크고, 불쑥 솟아오른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할머니 동네에 타 동네 할아버지가 넘어와 그 없는 것도 가져가는 순간 할머니의 그림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 뒤로 할머니를 볼 수 없다.
은교는 정전이 되어 모든 것이 어둡다고 생각하면 이미 어두우니까 무서워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내일 철거를 앞둔 상가에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해도 사람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보고, 서로의 그림자가 괜찮은지 안부를 묻는다. 목이 메어 부르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만 노래한다. 서로 위로한다. 서로의 그림자를 챙기며 노래할 때 그림자는 내 뒤에 있다.
그림자가 엄습하려 할 때 은교와 무재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요즘 시를 읽는다. 어느 문장에서는 멈칫하고 몇 번 더 읊조리기도 한다. 결국은 끝까지 읽는다. 함께 읽을 때 서로의 따뜻한 온기는 그림자를 뒤로 가게 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이 이루어지는 곳을 함부로 말하지 말기. 당신의 그림자는 괜찮은지 무심하게 살펴보기. 그리고 가끔 그림자의 안부를 묻고 함께 손잡고 노래 부르며 그래도 섬에서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