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호자입니다

by 권성선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남편이 수술을 받았던 날,
나는 조용히 한 장의 서류에 이름을 적고 있었다.
그때, 마음 한 켠이 조용히 일렁였다.

오늘은 그날의 기억을 글로 조심스레 불러내려 한다.


“보호자분 되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서류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습관처럼 가방에서 펜을 꺼내고, 이름을 쓰고, 사인을 했다.
매끄러운 필체로 썼지만, 서명란 아래에 조용히 고이는 무게는 매번 같았다.

‘보호자.’

병원 서류마다 당연하듯 붙어 있는 그 이름 앞에서
나는 늘 마음이 잠시 멈췄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어떤 가족의, 어떤 사람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아이의 예방접종, 학교 서류, 아이의 수술 동의서,
시어머니의 건강검진, 남편의 수술 동의서까지.
늘 내 이름이었다. 항상 나였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젠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오늘, 남편의 이름 위에 보호자로 내 이름을 적는 순간
무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스르륵 일렁였다.

접수를 마치고 나와, 나는 병원 대기실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형광등 불빛은 차갑고 일정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나는 가만히 손을 바라봤다.
그 손은 수없이 많은 서류에 사인을 해왔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에게, 남편의 회사 서류에, 은행 대출서류에.

‘보호자’라는 말 앞에서 나는 언제나
차분하고 또박또박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가끔은 그 서명이 나를 점점 잊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의 아내로, 누구의 엄마로, 누구의 며느리로 살아가고 있었고
‘나’라는 이름은 보호자란 단어 뒤에 숨어버렸다.

오늘은 이상하게 그게 낯설었다.

남편이 수술복을 입고 입원실에 누워 있을 때,
나는 그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람의 보호자인가.
아니면, 이 사람에게서 보호받고 싶었던 사람인가.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다.
당신은 괜찮냐고, 당신은 오늘 어떤 마음이냐고.

나는 가족 중에 무너지면 안 되는 사람이었고,
서명을 하는 사람은 곧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말은

그 사람 대신 아프지 않기 위해 버티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의 보호자가 되기 위해
너무 많은 감정을 감추었다.

병원 복도에서 울 수 없었고, 아이 앞에서 흔들릴 수 없었고,
남편이 아플 때는 내 슬픔조차 접어두어야 했다.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았다.
괜찮다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천 번쯤 되뇌며 살았다.

그리고 그 모든 걸 꾹 눌러 담은 채
또 한 장의 서류에 사인했다.

내 이름은 여전히 누군가의 보호자였지만,
나는 문득, 누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 질문 하나를 하얀 병원 벽에 조용히 걸어두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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