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
작년 8월 말, 가을이 다가온다며 썼던 일기를 어쩌다 다시 읽게 되었는데 글에 행복이 막 묻어 나온다. 지난 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떠오르니 왜 이리 흐뭇한지. 올해는 유독 여름이 끈질기게 버티다 가는 것 같다. 벌써 9월 말인데 이제야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어쨌든 결국엔 내 사랑 가을이 왔다. 사계절 중 워스트는 겨울인데 겨울 직전 계절인 가을은 베스트다. 추워서 힘든 겨울이 함께 다가온다는 것을 아는데도 가을을 제일 좋아하는 것을 보면 가히 가을 덕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꽃보다 단풍이 좋다. 스타벅스 가을 한정 메뉴는 중독이 된 지경이고 가을 전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먹고 있다. 최애 꽃은 코스모스다. 퍼스널 컬러가 유행인데, 나의 퍼스널 계절은 가을이 확실하다.
긴 추석 연휴의 첫날은 그냥 푹 쉬었다. 전 날 약 열두 시간을 일한 후유증으로 12시간을 자고 12시에 겨우 일어났다. 기적의 수면법이다. 일어나자마자 대청소 각이 잡혀서 안방을 중점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끔 이렇게 번뜩 무언가에 꽂힐 때가 있다. 청소와 관련해 내 주특기는 안 보이는 서랍 구석의 먼지 한 톨까지 다 닦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예전부터 강조했던 “일한 건 표시가 나야 한다”를 실천하기 위해 가구의 위치를 바꿔가며 티가 나도록 치우는 데 힘썼다. 결과는 전후 사진을 찍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로 나름 만족스럽게 방이 깔끔해졌다. 뱃속은 꼬르륵거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치우다 보니 금세 두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청소가 끝남과 동시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집에서 가족들과 전 부친 것을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리 수산시장에 심부름을 가야 하는데 같이 갈 수 있냐 했다. 내 대답은 당연히 오케이였다. 여럿이서 몇 시간을 허리 아파가며 부친 전을 무료 나눔 해준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만나서 구리로 가는 길에 갓 부쳐 냄새가 진동하는 전을 참지 못하고 랩 옆구리를 뜯어서 먹었다. 많이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먹다 보니 너무 맛있어서 산적 2개, 고추전 5개, 동그랑땡 2개를 먹어버렸다. 그렇다, 차에서 식사를 한 것이다.
든든해진 배로 구리 수산물회센터에 도착했다. 간판에는 레트로회센터라고 쓰여있다. 이름이 굉장히 힙하다. 연휴라 그런지 닫은 점포가 꽤 많았는데도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활기찬 모습에 내 기분도 덩달아 들떴다. 조금 놀란 것 중 하나는 젊은 상인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냥 너무 평범한 청년이 말끔한 복장에 방수 앞치마만 했을 뿐이었다. 왠지 수산시장에서는 늘어난 티에 일바지를 입은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물고기를 떠주실 것 같았다. 부끄러운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역시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데 특효는 이곳저곳 많이 다니고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을 다닐 일이 별로 없는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친구에게 고마웠다.
심부름 미션을 완료한 친구와 헤어지고 나는 엄마가 일하는 카페로 갔다. 바로 라떼를 주문하고 접시 하나를 받아 전을 조금 옮겨 담았다. 고추전과 라떼, 상상해 본 적 없는 조합이다. 결과는 어떨 것 같은가. ‘대박’이라는 표현밖에 생각이 안 난다. 너무 행복하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거기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까지 완벽했다. <자유로울 것>. 이보다 자유로울 수 있을까. 책과 기분이 완전히 일치한다. 신나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니 카페 신메뉴냐는 답장이 왔다. 웃기면서도 혹 진상처럼 보일까 급 생각이 많아져 지울까 했지만 결국은 내버려 두었다.
엄마의 퇴근을 기다리고 같이 나왔다. 어느새 어두컴컴한 늦은 저녁이다. 바로 하늘을 확인했다. 오늘 둥근 보름달이 뜬다는 소리를 듣고 낮부터 기대해 왔기 때문이다. 달은 기대에 부응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한쪽이 찌그러졌던 달이 아주 꽉 차게 동그랗다. 통통한 게 귀엽기까지 하다. 참 자연이란 신기하다. 아름다운 풍경에 엄마와 잠깐 넋을 놓고 감상했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편견을 깨고 수고하여 만든 것을 나눔 받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생각이 비슷한 작가의 책을 읽고 몸을 녹이는 따뜻한 라떼를 마시고 매우 밝고 똥그란 달을 보았던 날. 이보다 마음이 풍요로울 수 있을까. 가을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불현듯 한 가지 소원이 생긴다. 올해 남은 날들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윗날만 같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