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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사람 Jan 01. 2024

천백고지를 오르며

새해다짐

저 멀리 머리가 하얀 한라산이 보인다. 설산, 두 음절이 머릿속에 꽂히고 잠시 생각에 빠진다. 여행 계획을 급 바꾼다. 원래 동백꽃을 보러 가려했으나 목적지를 천백고지로 변경한다. 눈 덮인 한라산을 어떻게 참나. 그렇게 갑자기 험한 산길을 오른다. 렌터카를 경차로 빌렸으면 무서울 뻔했다. 경사가 정말 가파르다.


눈 덮인 한라산과 점점 가까워진다. 여기와는 다른 세계가 저기에 있을 것만 같다. 구불구불 올라갈수록 눈의 흔적들이 크레셴도처럼 많아진다. 꼭 다른 계절에서 겨울의 한복판으로 조금씩 가는 기분이다. 귀가 먹먹해져 침을 꼴딱 삼킨다. 얼마쯤 온 걸까. 영실코스가 보인다. 더 올라간다. 2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이고 계속해서 올라간다. 길 한쪽에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주차장 자리가 없어서 주변 길가에 차를 댄 것이다. 우리도 차 사이 빈자리를 발견하고 주차에 성공한다. 주차장은 찾아오는 관광객 수에 턱 없이 부족한 듯한 크기였다. 주차장 한쪽에 높은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의 끝에는 편의점이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공인 것처럼.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 그리고 편의점으로 가는 계단을 오를수록 냄새가 선명해진다. 아름다운 라면 향기가 코를 강하게 찌른다. 안 먹곤 못 배길 거라 약 올리는 것 같아서 못 이기는 척 넘어가기로 한다. 편의점 안은 매우 좁고 복잡했지만 다행히 앉을자리가 났다. 컵라면 하나를 끓였다. 추운 데서 먹는 따끈한 면음식은 언제나 옳다. 벽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편의점’이라는 문구가 있다. 높은 곳에서 먹어서 맛있는 건가. 이대로 다시 산을 내려가도 좋을 것 같다. 몸에 모든 욕심을 없게 만드는 아무튼 기가 막히게 맛있는 라면이다. 맛있어서인지 정신없어서인지 금세 먹어치웠다.


편의점을 나오니 한라산 절경이 시원하게 보인다. 산 꼭대기랑 같은 높이에 서 있는 것 같다. 이곳이 명당이로구나. 허기를 채우고 본 한라산 절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얼른 한라산을 가까이 보기 위해 움직인다. 휴게소 건너편을 지나 안내소 옆에 난 길로 들어가니 갑자기 겨울왕국이 펼쳐진다. 다른 세계가 있을 것 같다던 무턱 댄 상상이 실제가 되었다. 몇 분 만에 하얀 세상으로 들어왔더니 현실감이 떨어진다. 비현실적으로 신비로운 자연이다. 괜히 하얀 입김을 불어 본다. 나뭇가지에는 상고대가 끼어 있고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를 뺀 모든 주변 바닥에 숫눈이 쌓여 있다. 희다 못해 투명하고 빛이 난다. 덩달아 마음이 하얘지면서 눈에 보이는 것의 중요함을 느낀다. 특히나 어떤 색을 많이 보느냐가 정신 상태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가공된 색이 없는 순수한 영역에 오니 정신까지 맑아지는 이 기분. 행복하다.


코스를 다 도는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온전히 자연에 집중했다. 애쓰지 않아도, 동행자가 있어도, 사진을 깨알같이 찍는 중에도 쉽게 나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출퇴근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나름 나에게 쉼을 주려고 의식적으로 혼자 카페를 가기도 하고 늘어져 핸드폰만 볼 때도 많은데 이런 편안함은 왜 오랜만인 걸까. 공간이 주는 효과는 놀랍도록 대단하고 보이는 게 정말 중요하구나를 함께 느낀다.


제주는 겨울에도 채도가 높은 것 같다. 천백고지에서 흰색을 원 없이 봤다면 다른 곳에서 붉은 동백꽃과 주홍 귤, 노란 유채꽃까지 정말 다양한 색상을 눈에 담았다. 여행이라는 마취제에 취해서 행복한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많은 산뜻한 색들을 눈에 담고 있어서 긍정적인 마음이 들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자연에서 피난처를 찾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무작정 여행을 떠나거나 몸을 사리기는 힘들 것이다. 도심에서 갑자기 자연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럴 때 깨끗하거나 선명한 색을 보게 된다면 조금 괜찮아지지 않을까. 보이는 것을 더 신경 써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또 어떤 일들이 나를 할퀴고 지나갈까. 난 정말 쫄보다. 오지도 않은 일들을 벌써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행복했던 지난달 제주 여행을 복기하니 어느 정도 마음이 가다듬어진다. 앞으로 마음만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기 어려우면 눈이 도와주면 될 것이다. 겨울 천백고지의 환한 기억이 새로운 한 해를 등불처럼 밝혀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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