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자기 본능에 충실하다. 온전히 자기 방식으로 삶을 산다. 1층에 사는 우리가 집에서 나가서 창가에 앉아있는 루미에게 우리가 호들갑을 떨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 적이 있다. 집안 창가에 앉아서 무심히 날 쳐다보는 고양이 사진에 친구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하루에도 다섯 번씩 이산가족상봉하는 우리 강아지랑 너무 정반대네 ㅋㅋㅋ'
고양이는 먹고 싶을 때 먹고, 그만 먹고 싶을 때 그만 먹는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자는 장소도 자기가 정한다. 사람이 좋을 땐 발밑에서 발라당 드러누우면서 애교를 부리고, 과하다 싶으면 일어나서 가버린다. 장난감을 보면 세상 높이 점프를 하고, 주인이 들어오면 꼬리를 세우고 나와서 반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쳐다도 안 본다. 우리 고양이는 아가 때 훈련을 시켜 간식을 줄 때 앉아서 손을 내준다. 하지만 그마저도 간식이 없으면 절대 안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맞을 때 해주는 것뿐이다. 그런 고양이가 난 요즘 좀 부럽다.
친한 친구가 가족과 몇 년간 외국에 나가 살게 되었다. 여름에 한국에 잠시 나온 동안 친구를 자주 만났다. 특별히 우린 호텔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아이들 없이 친구와 둘만의 여행은 결혼하고 처음이었다. 내 차를 타고 가기로 해서 친구 집 앞에 도착했는데 눈에 띄는 파란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딱 붙는 조금 두꺼운 니트 소재의 짧은 원피스였다.
“이렇게 예쁘게 입고 올 거면 귀띔이라도 해주지!! 나도 예쁘게 입고 왔을 텐데!!!”
“나도 이런 옷을 한 번도 안 입어봤는데 외국에 살다 보니 이건 정말 얌전한 옷이더라. 거기 가서 입을 생각으로 한번 사봤어.”
중학교 때부터 절친인 친구의 옷차림은 내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베이지색을 많이 입었고 특별히 옷을 화려하거나 튀게 입지 않는 편이었다. 언제나 배려심이 많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녀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하는 좋은 친구다. 대기업을 다니다 상담을 공부하고 싶다며 때려치우고는 오랜 공부 끝에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 상담을 하는 선생님들이 자신의 상담을 먼저 많이 하는 것은 친구를 통해 알았다. 그녀는 점점 자아가 단단해졌고, 자신의 내면에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 숨겨져 있는 것을 느꼈다. 마라톤을 하면서 평생 운동과 거리가 멀던 그녀는 마음과 몸이 모두 단단해졌다. 오늘 나는 그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너무 멋지고, 너무나 기뻤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던 중 친구가 그런 얘길 했다.
“나 펄스널 컬러 진단을 받아볼까 해. 요즘 많이들 하더라?”
“그걸 뭘 진단을 받아? 내가 봐줄게!”
나는 펄스널 컬러를 어떻게 진단하는지는 잘 모른다. 디테일하게 윈터 쿨톤, 써머 쿨톤 같은 용어로 구분하는 방법도 모른다. 하지만 티브이에서 얼굴에 천을 대면서 잘 어울리는 컬러를 찾아주던 모습을 기억한다. 나름 석사논문이 컬러에 대한 것이 아니었던가. 가서 대보면 되지 뭐!
우린 가까운 아울렛으로 출발했다. 어딜 들어갈까 하는데 폴로 매장이 있었다. 그래 컬러 하면 폴로지. 친구는 피부톤이 약간 노란 편이다. 그런 사람은 차가운 톤의 컬러가 잘 어울린다. 하나씩 옷을 대봤더니 역시나 따뜻한 색보단 차가운 톤이 잘 어울린다.
“이것 봐, 따뜻한 핑크 입으니까 더 노래 보이지? 근데 왜 이렇게 차가운 핑크가 없지?”
“차가운 핑크가 어떤 거야?”
“살구색 쪽 말고 연보라에 가까운 차가운 핑크. 핫핑크는 너무 강하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키즈 코너에서 차가운 핑크색 옷을 찾았다.
“연하면서도 차가운 핑크 대니까 얼굴이 확 산다!”
“넌 블루는 대부분 다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이거 살래?”
면 재질의 짧고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하늘색 재킷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이거 너무 예쁘다. 나 이런 스타일 엄청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괜찮은데?”
“그렇지? 정말 날씬하면서도 볼륨 있어 보여! 진짜 예뻐!!”
“근데 이거 입을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 이건 패스”
“너 그거 알아? 은근히 형광색이 잘 어울린다?”
“우와 완전 신기해!!!”
“다른 가게도 가보자”
한참을 구경하다가 드디어 찾았다.
“이거 어때? 바로 이런 핑크가 너한테 잘 어울려! 민소매 니트지만 차갑고 연한 핑크색”
“너무 마음에 들어. 나 이런 옷 입을 생각 한 번도 못 해봤어. 너도 옷 좀 골라봐.”
친구 옷은 척척 골라줬는데 내 옷은 고르기 어려웠다. 몇 번을 얼굴에 대보고 입어보기도 했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한테 어떤 스타일이 잘 어울리는지 도통 모르겠다. 옛날엔 내 스타일의 옷을 잘도 골랐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어떤 사람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생겨났다. 엄마, 딸, 부인, 직업 등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애 엄마가 이렇게 입으면 되겠어?”
“선생님은 선생님답게 입어야지.”
살이 찌면서부터는 몸을 가리는데 급급했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그때 난 검은색, 남색, 회색 옷만 입었다. 펑퍼짐 하게 몸을 가리는 옷만 사 입었다. 도무지 밝은 색은 입기가 어려웠다.
아주 조금씩 내 마음을 회복해 가며 난 조금씩 밝아졌다. 결정적으로는 루미를 키우면서부터 내 마음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키운다고 했더니 이제 검은색 옷은 못 입을 거라고 했다. 털이 많이 빠지고 루미는 베이지색 밝은 털을 가졌으니.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밝은 색 옷 입지 뭐. 잘됐다.’
내 몸을 가리던 검은색을 벗어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난 원래 컬러를 좋아하고 밝은 사람이었는데 너무 오랜 시간 검은색으로 나를 감추고 가렸다. 그날부터 난 노란색, 주황색, 형광 연두, 베이지, 흰색 옷을 사기 시작했다. 밝은 옷을 입으니 마음도 한결 밝아졌다. 마음이 밝아져 밝은 옷을 입을 수도 있지만 먼저 밝은 옷을 입다 보면 밝아지기도 하는 것 같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닐까. 여전히 내 스타일을 잘 모르겠지만 그냥 이것저것 입어보기로 했다. 어떤 건 잘 어울리고 어떤 건 잘 안 어울릴 테지.
중요한 건,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어떤 옷을 입던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는데 나 혼자 눈치를 보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늘 생각하며 주눅 들어 살았다. 나도 루미처럼 먹고 싶을 때 먹고, 입고 싶은 거 입고, 놀고 싶을 때 놀기로 다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남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과도한 노력은 줄이기로 마음먹는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나임을 잊지 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