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지막을 선택할 수 있다면

12화 #보잘것없는 사람 - 종이하고 펜 좀 줄래?

by 고용환

가끔 남편 역할이 힘들고 지치는 상황이 오면 문득 아버지가 남긴 그때 그 말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입이 무거웠다. 정말 큰일이 아니면 간섭이나 충고조차 하지 않았다. 서운하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관심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간섭을 할 만큼 본인의 삶이 본보기 되지 않아서 참견도 못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 무게감은 세상 어떤 것보다 무겁고 어깨의 감각은 자식이 나이를 먹는 만큼 무뎌졌다. 삶이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회생활은 전쟁터였다. 수많은 일이 생겨나고 내 뜻대로 되는 일보다 남의 뜻에 따라야 하는 일이 더 많았다. 실수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때로는 나의 잘못이 아닌 것에도 책임을 지며 욕을 먹어야 했다. 퇴근할 때 그 모든 짐을 짊어지고 현관문을 들어서면 가족 모두가 그 무게에 짓눌린다고 생각했기에 감정은 버리고 항상 밝은 모습으로 현관문을 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두 번째 수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증상은 더 심해져서 왼쪽 몸에 마비가 왔다. 걸을 때도 불편해 보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불평 없이 긍정적으로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 전날 어머니와 동생이 병원에 찾아왔다. 수술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일상에 대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무도 수술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조금 지나서 사람들이 단체로 몰려왔다. 주유소 직원들이었다. 그동안 몇 분이 면회를 오시긴 했지만, 이렇게 한 번에 몰려서 온 적은 없었다. 아버지한테 이번 수술도 잘 끝내고 주유소에 놀러 오라면서 흰 봉투 두 개를 건네주셨다. 두툼한 봉투 위로 ‘고 부장님 힘내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며칠 후 병실에 수술실 침대가 들어왔다. 그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아버지는 담담하게 침대로 옮겨갔다. 힘들게 숨을 쉬고 있는 모습이 지쳐 보이고 안쓰러웠다. 침대가 병실을 빠져나갈 때쯤 아버지는 급하게 손짓을 했다.

“종이하고 펜 좀 줘.”

아무 생각 없이 노트와 펜을 침대에 옆에 놓아 드렸다. 이동하는 동안 간호사에게 수술은 얼마나 걸리는지 그리고 종이하고 펜을 사용할 시간이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니 수술을 바로 하는 게 아니고 오래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수술을 마친 후에도 응급실에서 12시간 동안 대기해야 한다고 말해 줬다. 아버지를 수술실로 들여 보내고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유서를 쓰려는 것은 아닐까?’

표현은 안 해도 아버지 또한 이번 수술이 불안했을 것이다. 불길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에 내가 내 삶의 끝을 알고 있다면 마지막 순간에 글을 남길까? 그런데 반대로 끝을 알 수 있는 삶도 축복처럼 여겨졌다. 적어도 남겨지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글이라도 남기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삶의 마지막을 선택해야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첫 번째는 행복하게 자신의 원하는 모든 삶을 살고 있다가 갑자기 사고로 세상과 이별하는 삶.

두 번째는 뭐 하나 남는 것 없는 엉망인 삶이지만 암으로 마지막 순간을 알 수 있다면 어떤 삶의 마지막이 좋을까?”


본문의 내용은 신간 에세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google.co.kr



http://www.yes24.com/Product/Goods/99272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