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밥을 먹고 나면 아버지 옆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아버지는 무언가 불안한지 주변 지인들과 통화를 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어느 날, 어떤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버지는 괜찮으니 병원에 오라는 말을 계속했다.
“어떻게 가! 아들 있다면서.”
듣고 싶지 않았지만 작은 소리로 들렸다.
“아빠 친구 오라고 해도 되지?”
“… 오라고 하세요.”
몇 시간이 지나고 한 여성분이 병실로 들어왔다. 단발머리에 나이는 50대 중반의 그냥 평범한 아줌마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손을 꼭 잡으시더니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의 애인이었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친구라고 소개했다. 아줌마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저 “안녕하세요.”를 반복할 뿐이었다.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나가라고 해야 하는 건지…. 하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자리를 피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의 관계가 어떤 관계이고 어떤 사이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많은 배신감이 들지는 않았다. 만약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금실이 좋은 커플이었다면, 화가 나고 끝도 없는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모님은 그냥 사는 그런 사이처럼 보였다.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든 세월에 지쳐서 사랑의 감정이 우정보다도 못한 감정으로 변질되었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능력도 없고 다정하지도 않은 아버지와 사는 어머니만 불쌍해 보였다. 자식 때문에 산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한참 병실 밖을 서성이다 혹시나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가 이 모습을 보면 충격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한 척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건너로 들려오는 낮지도 높지도 않은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 무슨 일 있어?”
그냥 전화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어디냐고 물어봤다. 어머니는 방금 일 끝나고 집에 왔다면서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을 돌볼 시간도 없이 두 아들과 아버지의 뒤에서 묵묵하게 세월을 견디고 있는 안쓰러운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병원으로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한참이 지나고 병실로 다시 돌아갔다. 창가 구석 침대로 걸어가는 길에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고맙다고 하였다.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분을 의지하고 있는 거 같았다. 죽음 앞에서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이 뻔뻔해진 모습에 당장에라도 연을 끊고 싶었다. 사람이란 이렇게 이기적인 동물이구나…. 주변보다는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아끼는 뻔뻔한 존재가 맞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병실 앞 벤치에 앉아 있는데 아줌마가 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둘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아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
“안녕히 가세요.”
아줌마는 내 앞에 하얀색 봉투를 내밀었다. 당장 돈을 꺼내서 얼굴에 집어 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고함을 치면서 한 번만 더 나타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저 그 봉투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줌마는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맛있는 거 사 드리라고 말하며 손에 봉투를 쥐여주려고 했다. 봉투를 거절하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했다.
“얼른 돌아가세요, 그리고 장례식장에서는 절대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아줌마는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조용히 뒤를 돌아 복도로 걸어갔다. 뒷모습은 슬퍼 보였다. 하지만 다시는 그분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분의 얼굴을 당장 지우개로 지우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