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미국 보병학교 교육이 시작되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영어에 대한 울렁증 때문이 아니었다. 영어는 완벽하지는 못해도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교육생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불안하고 위축되게 만들었다. 특히, 미국 보병학교에 외국군의 비율은 매우 낮았다. 한국군 부사관은 2명이 전부였다. 인종 차별 비슷한 것을 받았던 순간도 몇 번 있었다.
교육 첫날은 준비물과 반편성을 진행했다. 앞으로 7주 동안 정신없는 교육을 받을 예정이었다. 나는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고 싶었다. 다음날이 되자 본 수업이 시작되었고 바로 체력 테스트가 있었다. 체력을 매우 강조하는 미군은 오리엔테이션 다음날 바로 체력 테스트를 하고 미달하는 교육생은 바로 원복시킨다. 아주 잔인하지만 전쟁 경험이 많은 나라답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테스트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몸을 풀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였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한국은 저녁 시간이었다. 평소 같으면 테스트를 마치고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은 뭔가 불안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어머니가 울면서 말했다.
“…… 아버지 돌아가셨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순간 주저앉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미국 땅에서 들었다. 어머니에게 바로 전화하겠다고 하고 체력 검정 대열에서 이탈했다. 미군 교관에게 가서 내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바로 외국군 행정을 담당하는 오피스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곳에 미군 상사가 나를 보자마자 위로했다. 그리고 만약에 장례를 위해서 한국으로 귀국하면 이번 교육 과정은 자동으로 취소된다고 말해 주었다. 한국 측에 환불도 안 된다고 설명해 줬다.
부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니 담당하는 장교분은 상당히 곤란해 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교육비 환불이 안 되는 것 때문인 것 같았다. 장남이고 장례를 위해서 바로 한국으로 귀국할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바로 답변을 주지 않았다. 다시 연락을 줄 테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몇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한국에서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상황이 조금 곤란하다면서 동생을 바꿔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벌써 6시간 정도 흐른 후였다. 주변 친척들이 내가 오는 데 시간이 걸리니 나 없이 장례를 하는 게 맞다고 어머니와 동생에게 계속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에게 일단 아버지를 영안실에 모시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장례를 진행하자고 말했다. 아버지에게는 죄송하지만 둘 다 동의를 했다. 아버지는 차가운 영안실 냉동고로 들어가게 되었다. 8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는 실무자에게 새벽이지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실무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도 어느 장교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교육생은 귀국하지 않고 교육 이수했습니다. 그냥 교육받으면 안 되나요? 동생분도 한국에 계신다면서요.”
순간 이성을 잃어버릴 만큼 흥분하였다. 속에서 하면 안 되는 말들이 미친 듯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절제하며 내가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그러자 바로 연락을 주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몇십 분 후에 전화가 왔다.
“가셔도 좋아요. 단, 비행기는 본인 자비로 해결해야 합니다. 휴가는 규정에 명시된 기간만큼만 한국에 체류할 수 있으니 출국 전에 다시 연락 주세요.”
한 개의 과정이 취소되었지만, 내가 선발된 교육은 2개의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코스였다. 그래서 한 개가 취소되더라도 다음 교육을 위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알겠다고 감사하다고 말을 전하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집으로 향했다. 항상 내가 외국으로 떠나면 무언가 큰일이 발생하는 것 같았다. 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나를 한없이 무겁게 했다. 생각해 보니 정신이 없어서 아버지 임종에 대해서도 묻지 못했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속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무슨 말을 남기셨는지 알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께 임종에 대해 물어보자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