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길에 몸을 던지면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잠이 덜 깬 것도 있고, 지옥철이라서 편하게 앉지도 못하는 신세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편하게 출근이라도 하면 좋겠지만 이런 평범한 운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사치라는 것을 실감하는 데 몇 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향하는 그곳이 어디든 가는 길이 아무리 비좁고 힘들던 목적지 자체가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침에 짜증 나게 만드는 것은 보기 싫은 그 사람을 억지로 보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고통을 받고 있다.
아무리 사회적 동물이라고 스스로 포장하고 직장에 모든 사람이 ‘적’이나 ‘원수’가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해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런 ‘재수가 없는 사람’은 꼭 존재한다. 물론 ‘재수 없음’의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이라서 그것이 관계를 더 난감하게 만든다.
보통은 그렇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꼭 좋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이 있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정말 친한 사이인 경우도 있다. 그럼, 아주 미쳐 버린다. 어렵게 직장에서 마음을 잠시 둘 안식처 같은 말다운 말이 통하는 사람 하나 어렵게 발견했는데 그 사람마저 내가 싫어하는 사람 때문에 포기해야 하나?
이런 어이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이 힘든 건 참을 수 있는데 사람이 힘든 건 참을 수 없다. 일이 서툴면 혼나면서 배우면 된다. 결국은 배워진다. 시간이 약이라고 신기하게 적응하고 일은 수월해진다. 하지만 사람은 시간은 약이 아니고 독이 된다. 아무리 그 사람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혼자 자해하면서 혼을 내도 싫은 사람이 좋아지는 약은 없다.
이것이 내가 내린 정의이다. 아주 어릴 때는 ‘처세술’ 소위 비위를 잘 맞춰서 자신의 속마음을 위장해서 대인관계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그런 전술을 가진 사람들을 부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들(처세술의 달인이라고 말하는)이 불쌍하다.
결국 가만히 지켜보면 그 사람도 사람이라서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없다. 그냥 그러는 척하며 앞에서 웃는 것뿐이다.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태도인가?'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티도 못 내고 좋은 척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아깝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처세술이 좋은 사람들은 가식덩어리가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겁한 겁쟁이다. 능력 부족자이다. 살면서 언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런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필요는 없다. 물론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호의를 베풀면서 맴돌고 감정 노동을 할 필요도 없다.
당신은 고통받으며 살아갈 필요가 없다. 어차피 학교나 직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내가 원해서 내 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운명’이라는 멋스러운 말로 이런 억지 시스템이 만든 소속과 인연을 포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정해진 시스템 때문에 그런 사람들과 함께 공존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