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용환 Dec 26. 2023

어쩌다 보니 원어민 앞에서 영어로 수업을

떨지 않고 원어민 앞에서 영어회화를 하는 비결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회는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났다. 신기하기도 했고, 기회라는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또 다른 도전을 항상 의미했다. 군대에서 국외군사교육(미국)에 선발되어 미국현지에서 교육을 몇 개 받았다. 흔하게 얻는 기회가 아니었기에 나는 긴장도 되었고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그 당시 아버지가 병세가 심해져 더 이상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치료가 없었다. 그래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몇 개월이지만 교육을 떠나면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았고, 부정하고 싶어도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렇다고 남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미국교육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도 자신을 간호하는 것 때문에 그런 기회를 아들이 날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와 이른 작별인사를 하고 미국을 떠났다. 그리고 조지아에서 한참 교육이 되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 전화가 한 통 왔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현실로 다가온 이별은 나를 내면부터 무너트리기 충분했다. 아마 그때 받은 충격과 공허함 그리고 그리움 때문에 첫 번째 에세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썼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서울로 와서 장례만 치르고 다시 먼 타지로 가서 교육 마쳐야만 했다. 서툴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었다.

교육을 마치고 귀국해서 새로운 곳으로 부대를 발령받았다. 교육받은 것을 활용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선택권이 없는 인사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또 다른 기회를 만났다.


바로 주한 미군부대에 1년간 장기파견되어 미군들에게 몇 과목을 가르치는 기회였다. 결코 쉽지 않은 기회였다. 부담도 되었다. 하지만 주변에도 도와줬고, 면접을 직접 보러 온 미군 지휘관이 나를 직접 뽑았다. 사실 나는 들러리였다. 보내고 싶은 다른 인원이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뒤집힌 것이다. 그것 때문에 파견기간 동안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마치고 싶었다.


처음 두 달 동안 수업을 참관하고 미군교육을 추가로 받으면서 적응기간을 가졌다. 사실 그때만 해도 내가 과목을 맡아서 한다는 것에 대해서 뭔가 다른 조치가 내려질 거라고 뒷걸음질 쳤다. 왜냐하면 그랬던 적도 없고 왠지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원어민도 자신의 경험과 경력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것이 힘든데 한국에서 태어서 발악하며 배운 영어로 원어민들 앞에서 영어로 수업을 한다는 것은 역시나 자신 없었다.


하지만 내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잘할 수 있다고 과목을 바로 진행해 보라고 관리자 내게 말을 했다.  군이라는 조직이 명령을 기반으로 모든 것이 이뤄지기에 그것은 해야만 하는 임무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참관 수업을 하면서 아주 세부적인 설명이 나온 영어로 된 과목 교재가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날 이후 매일 혼자 숙소에 남아서 교재를 큰 소리로 읽고 수업 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적어가면서 연습을 했다.

당시 딸이 태어난 시기였다. 퇴근해서 보고 싶음이 간절했지만 그 마음조차 뒤로 해야만 했다.


강의를 망친다고 내게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고, 첫 수업에서 내가 부족하면 없던 일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잘리거나 뭔가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것은 사실 없었다. 그럼에도 자존심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망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물러나고 싶었던 것이 그 당시 내 심정이었던 거 같다.


그렇게 한 달간 연습강의를 혼자 준비하고 바로 첫 수업 날이 다가왔다. 두 달 동안 교실에서 매일 보던 익숙한 모습인데 앞에 서서 수업을 진행하려고 하니 왠지 모르게 떨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18명의 미군들의 눈은 모두 나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강의록을 바탕으로 설명을 하면서도 계속 그들의 눈치를 봤다.


'혹시 이들이 내 말을 알아듣고 있는 건가?'

'내가 하는 말이 과연 이해가 될까?'

'저 뒤에서 내 수업을 참관하는 관리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집어삼키듯 몰려왔다.

중간중간 알아 들었냐고 물어도 보고 내가 설명한 부분을 설명해 보라고 요구도 했다.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다행히 내 의도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20분 정도 흐르고 나는 이들이 내 말을 알아듣고는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강의자료가 화면에 있고 부연설명과 수업을 이끄는 역할을 하면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그런 개방적인 수업이었기에 조금 더 수월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한국처럼 주입식 교육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더 가능했다. 질문을 하나 던지면 미군병사들은 서로 의견을 말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중가에 중재를 하고 다음으로 이끌고 가는 게 오히려 더 힘들었다. 보통 한국은 질문하면 대답하는 학생이 좀 이상한 취급을 받는 분위기가 아직도 존재하는데 이곳은 다른 세상임은 분명했다.

자신감이 붙으면서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모든 순간을 떠올리면서 그냥 공부할 때 원어민 선생님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틀려도 괜찮다고 이렇게 내가 아는 것을 알려주자는 마음으로 수업을 끝까지 진행했다.

물론 수업을 듣는 미군들도 내가 미군도 아니고 특별한 포지션 때문에 이렇게 수업하게 된 배경을 모두 알았기에 나에게 매너 없게 굴거나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우려했던 패닉상황을 오지 않았던 거 같다.


그렇게 오랜 시간 준비했던 영어로 진행한 나의 첫 수업은 끝이 났다.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가는데 그때가 돼서야 다리에 힘이 조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보통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에 긴장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내게도 큰 부담이자 긴장이었다.


내가 자리로 돌아가자 수업을 참관하던 관리자 미군이 나에게 사무실로 오라고 웃으면 말을 건넸다. 뭔가 크게 잘못했나 싶어서 그에 뒤에 바짝 붙어서 숨을 죽이고 사무실로 갔다. 그가 한국군 측에 내가 엉망이라고 보고하면 그동안 내 노력은 모두 없던 일이 되기에 약간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과 반대로 그는 내게 잘했다고 엄지 척을 보내며, 다른 과목도 늘려서 기수에 3과목씩 고정으로 맡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잘했다는 말에 나도 안도를 했지만 추가로 2개를 더 해달라는 말에 표정관리가 안 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론은 나는 남은 기간 동안 3과목을 맡아서 수업을 계속 진행했다. 같은 과목을 반복해서 하다 보니 나중에는 농담도 던지면서 여유 있는 수업을 하게 되었다.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자신감도 늘었고, 나중에는 뭔가 몰라서 허우적거리는 미군들은 남아서 도와주기도 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 자신은 내가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에 그렇게 최선의 시간을 남겨두고 싶었다.


남들 모두 하고 싶어서 열심히 하니까 나도 해봐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시작한 영어공부가 내 인생에 많은 변화를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을 바탕으로 직업적으로 돈을 더 벌거나 내가 멋진 이직을 한 것은 아직 아니다. 그리고 원어민 뺨치는 실력의 소유자도 절대 아니다. 그저 내 생각을 영어로 말하는 그런 수준이 정확한 내 위치인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경험들이 성처럼 쌓이면 자신을 믿는 믿음도 같이 성장한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조금은 더 당당하게 '난 할 수 있어'라고 말하게 되는 것 같다. 배우는 속도가 남들보다 느리고 과정이 순탄하지 못해도 언젠가 꼭 이뤄낸다는 자기 확신은 인생의 연료와도 같다.


교환교관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서 고생한 꼴이 되어 복귀를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기억한다. 벌써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지만 용기를 내서 물러서지 않았던 그 시간을 내게 영원한 선물로 남겨두고 싶다.


  만약(if)이라는 단어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떠올리지 않고 산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내게 수많은 '만약'이 과거 속에 살고 있다. '만약'은 과거 속에 남겨진 선택일 것이고, 어쩌면 후회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이 없는 선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그리고  언젠가는 후회로 남은 '만약'으로 시작하는 문장조차 그리워지는 날이 올 것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실수를 하고 선택하지 못한 것과 잘못된 선택에 대한 반성을 한다.


어쩌면 영어로 완벽하게 단 한 번도 수업을 못하고 실수투성이라서 지금까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단 한 가지 정확히 배운 것이 있다면 쫄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엉성하게 영어로 말해도 원어민 입장에서는 다 알아듣는다. 우리도 그렇다. 외국인이 엉성한 발음으로 한국말을 해도 우리가 빈 공간을 알아서 해석하고 알아듣는다. 그게 언어다. 단지 우리나라 정서 때문에 완벽하게 구사하려고 그 완벽을 기다리며 숨어있기에 회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운 것 같다. 내가 원어민처럼 발음하고 원어민처럼 실수 없이 수업을 하려고 달려들었다면 나는 절대로 이 글을 지금 쓰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지금까지 이건 아니라고 자책하고 망설이고, 더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 앞에 서지 못하고 시간을 더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나는 조금은 둔하고, 미련하고, 쪽팔림을 나름 잘 견디는 그런 약간 부족한 사람이라서 지금까지 잘 견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견디고 있다.





[함께 보면 좋은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mymotherstory

https://brunch.co.kr/brunchbook/richpopsstory


이전 10화 삼각김밥만 먹고 헝그리 정신으로 공부했던 그때 그 시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