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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Jan 03. 2024

버림받았지만 절대 포기하기 싫었다.

조금 부족해도 계속 공부합니다.

교환교관이라는 추억에 남는 경험을 담고 다시 복귀한 나는 업무를 파악하며 새로운 적응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태어나고 얼굴도 자주 못 본 딸아이에게 미안해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으나 업무량은 적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을 정신없이 보내다 어느 날 책상 옆에 버킷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거의 10년째 하고 싶은 것들이 있으면 적어두고 하나씩 여건이 될 때마다 이뤄나갔다. 리스트는 계속 늘어가다가 결혼한 후 더 이상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쓰는 것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글로 쓴 내 소망들은 시간이 지나면 운인지 몰라도 거의 다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막연했지만 유학부터, 영어공부, 해외여행, 해외연수 등 내가 이뤄놓은 것들이 많았다. 오랜만에 하나 읽어 내려가다 보니 언제 작성한 지 기억이 흐릿하지만 대학원 석사 졸업(논문)이라는 리스트가 보였다. 


너무 정신없이 달려온 것도 있고 내 주제에 석사과정에 간다는 것이 막연하게 느껴져서 생각을 멀리했는데 그날따라 무엇에 홀린 것처럼 퇴근 후 대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고 싶은 학과 위주로 행복한 상상을 하며 알아보았지만 지방이라서 통학 가능거리에 내가 가고 싶은 학과가 있는 대학원은 없었다.

기분이 살짝 상했지만 나는 몇 주가 지나서 대안으로 군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면접과 서류 전형을 통해 입학을 했다. 그러면서 결심한 것이 논문이 무엇인지 한 번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원하는 주제로 논문을 써서 석사를 졸업하겠다고 다짐했다. 


특수 대학원이라서 직장인들에게 많은 배려가 있었다. 수업도 최소한으로 했고, 과제나 시험에 대한 부담도 거의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학교를 다니고 학위를 받으면 이거 공부했다고 주변에 말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반감도 들었다. 그래서 더욱 논문에 관심이 갔다. 대부분 학점으로 졸업하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논문을 쓰겠다고 손을 들고 지도교수님을 정하고 한 학기 빨리 졸업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경험부족이고 정규과정을 통해 학업을 한 경험이 없기에 어떻게 교수님과 관계를 맺고 논문을 써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결국 몇 번 찾아뵈었지만 이상한 말만 듣고 주제도 정하지 못한 내 논문을 겉돌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는 그냥 학점으로 석사를 졸업하고 스트레스받지 말자는 유혹이 가득했다. 하지만 오기가 발동했다. 지도를 해준다는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분했고,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결국 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지도교수 변경 신청을 낸 것이다. 좁고 좁은 지방 대학 특수대학원에서 이제 막 박사학위를 받고 기세등등하게 조교수로 임용된 교수님을 찼다. 그리고 다른 교수님께 교수님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때까지는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냥 멍청하게 좋은 상상만 했다. 


새로 지도를 해주신다는 교수님은 무척 열정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은 것을 지도받은 것이 맞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당시 너무 절박하고 간절했기에 논문에 '논'짜도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돌진만 했다. 그런 내게 교수님은 통계부터 부족한 부분은 충분히 보강하라고 조언해 줬고, 나는 모든 것을 다 따르며 추가로 강의도 듣고, 읽으라는 논문을 읽으며 논문 주제를 정하기 위해 계획서를 계속 작성해서 교수님께 들이밀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렇게 연구계획서를 최종적으로 제출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학교 조교님은 교수님 서명을 받고 제출해 달라고 내게 요청을 했다. 같이 논문을 쓰는 선생님도 없으니 나는 뭐가 뭔지 모른 채 무작정 작성해서 교수님께 연락을 드리고 계획서를 보여드렸다. 부족해도 그동안 시키는 것 열심히 공부했으니 무엇인가 희망에 찬 조언이 올 것이라고 벅찬 기대를 했다. 하지만 답변은 처참했다.


"논문 지도 못 해 드릴 거 같습니다. 제가 학과장님께 말씀드릴게요."


갑자기 앞도 뒤도 없이 이 시기에 그런 말을 하니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맞춤법은 잘 아냐?, 문맥이 이게 뭐냐? 등 살짝은 기분 상한 피드백을 다 삼키며 지금까지 왔는데 지도를 포기하겠다고 말하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니 화가 나서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봤는데 충분히 설득이 되는 답변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첫 번째 지도교수님을 뻥 차고, 두 번째 지도 교수님께 더 세게 뻥 차였다.


이렇게 사람을 대놓고 무시해도 되나 싶었지만, 넓은 세상에서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초라한 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한글도 모르고 중학교를 입학한 놈이 자퇴까지 하고 검정고시 딱지달고 직업군인이 돼서 사이버로 학사학위를 받고 어설프게 영어 좀 하는 그냥 그런 그런 사람. 

그런 내가 논문을 쓴다고 나대는 것이 어쩌면 우습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충격은 조금 오래갔다. 결국 나는 학과장님과 통화를 했고, 학점으로 졸업하는 것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오기가 생겨서 단호하게 답변드렸다.


"저는 논문을 쓰고 졸업하려고 이 학교를 입학했고, 꼭 그렇게 할 겁니다. 도와주십시오."


학과장님이 지도를 해주시나 기대를 살짝 하면서 매달렸지만 돌아온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 그 첫 번째 0 교수님께 다시 지도받으시죠. 제가 잘 말해볼게요. 저는 요즘 너무 바빠서 지도를 못 해 드립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논문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아쉬운 건 학생이었다. 어떤 보복과 대응이 올지 걱정되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쓴맛을 삼키며 알겠다고 하였다. 며칠이 지나고 먼저 0 교수님께 연락이 왔다.


"지도 못 받게 되었다면서요. 어떻게 아직도 논문 쓰실 거예요?"


전화통화였지만 목소리에는 나를 약 올리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나는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와서 다시 첫 페이지를 써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유쾌한 과정은 아니었다. 3차까지 심사는 이어졌고 나는 오히려 지도교수님보다 다른 교수님들에게 위로와 조언을 더 받았다. 심사 전까지 몇 번이나 뒤집어졌고, 일하면서 새벽까지 논문을 쓰고 또 쓰면서 이를 악물고 그 일을 반복했다. 2심이 끝나고 지도교수님은 이런 식으로 하면 절대 통과 못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렇게 겨우겨우 나는 4심을 거쳐 논문에 도장을 받았다. 


사실 지금 박사과정을 하면서 교수님과 유대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늦게 깨달았다. 그저 정해진 것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안다.

식사도 많이 하고, 자주 찾아뵈면서 이야기도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그런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하지만 석사 때는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오히려 하면 안 되는 줄만 알았다. 그렇기에 교수님들 입장에서 서운함도 있었을 것이다. 친밀함도 없이 개념도 없이 논문을 다 만들어와서 들이밀고 심사를 봐달라고 하는 학생이 바로 나였던 거 같다. 


사실 박사과정을 하기 전까지 석사 논문 통과 후 마지막 학기에 뭐가 되었든 졸업했음에도 그냥 미웠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때의 모든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박사 때 논문 경험이 없이 입학한 선생님들보다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었고, 오히려 다른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답변을 줄 수 있어서 참 좋다. 아마 석사 논문을 포기하거나, 화가 난다고 자퇴라도 했더라면 지금의 느끼는 만족감은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고 고통스럽고, 종종 비참하기까지 했지만 지난 시간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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