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버는 돈의 유혹과 대가
소품 일을 그만두고 다시 백수가 되었다. 검정고시에 집중하면서도, 노력한 만큼 돈으로 결과가 돌아오는 일을 찾아 또 찾았다. 그런 일만 있다면 모든 걸 올인해도 된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친구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우연히 텔레마케터 일을 하는 형을 만났다. 친구 중 한 명이 연상과 사귀고 있었는데, 그 오빠가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었다. 내 사정을 들은 형은 “여긴 경력도 학력도 안 본다. 오직 노력과 끈기”라며 내가 찾던 곳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고맙게도 자리 여부를 알아보겠다고도 했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전화로 물건을 판다면 충분히 노력으로 수입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퇴가 발각되고 몇 번의 이별 위기를 넘겼지만 여자친구와의 인연은 순수한 첫사랑이라는 단단함과 순수함 때문에 지속되었다. 별볼일 없는 남자친구가 회사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기뻤는지 한없이 환하게 웃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종로 사무실 면접. 광장에 선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을 지나가며 ‘이런 데서 일한다니’ 싶어 정장을 한 벌 맞춰야 하나 싶을 만큼 설렜다. 사무실은 전망이 좋고, 파티션마다 책상과 전화기 한 대씩 깔끔히 놓여 있었다. 공사장, 전단지, 창고 정리, 영화 스태프 일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정돈된 공간이었고, 미래가 밝아 보였다.
“사정은 들었어요. 우린 미성년자라고 차별하거나 임금을 깎는 일 없어요. 철저히 개인 능력대로 벌면 됩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무엇인가 고장 기계처럼 난 듯 ‘네’만 반복했다. 절실함이 전해졌는지 팀장은 맥심 커피를 건네며 웃었고, 날 소개해 준 형은 잘될 거라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얼마 전 만났을 때 그 형은 영어 교재가 잘 팔려 인센티브로 200만 원을 받았다고, “가만히 앉아 정보만 보고 전화하면 팔린다”며 돈 벌기가 세상에서 제일 쉬운 듯 말했었다. 달콤하고 끝 맛이 살짝 쓴 맥스커피를 마시며 직원들을 바라보니, 모두가 앵무새처럼 같은 멘트를 반복하며 전화를 걸고 끊었다. 그런데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나도 취직만 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슬며시 차올랐다.
잠시 후, 깔끔한 중년 여성과 몇 마디 더 나눴고, 처음 면접 본 팀장은 “결과는 전화로 알려주겠다”며 차비라며 만 원을 쥐여줬다. 면접 보러 와서 차비까지 주는 곳—‘이게 인간다운 대접이구나’ 싶었다. 광장으로 걸어가며 다시 마주한 두 영웅의 동상. 그때 친척 형이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지? 광화문 동상 봤지?”
“네, 몇 번 봤어요.”
“장군님은 몸 쓰는 일을 했지. 그래서 평생 서서 계시잖니. 근데 대왕님은 앉아 계셔. 물론 금수저고, 업적도 다르지만, 공부해서 남긴 업적이니 의자에 앉아 계신 거지…”
어릴 땐 억지 비유 같아 웃어넘겼다. 하지만 얼마나 삶이 버거웠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합격하면 나도 앉아서 돈 버는 거구나’ 싶어, 자꾸만 시선이 세종대왕에게로 흘렀다.
다음 날, “다음 주부터 출근하세요”라는 전화가 왔다. 대기업 취직이라도 된 듯 엄마에게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건물 층수부터 창밖 풍경, 환승 없이 가는 버스까지 쏟아냈다. 엄마는 “착한 마음이라 하늘이 돕는다”며 기뻐했다. 기본급은 40만 원, 교재 하나 팔면 30만 원의 인센티브. 형은 한 달에 8개를 팔아 200만 원 넘게 받았다며, 나는 자신만만하게 설명했다. 가장 흔한 이치—쉽게 얻으면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도 잊은 채, 행복에 취했다.
자율 복장, 여유로운 출근, 야근 강요 없음. 열심히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완벽한 직장이라고 믿었다. 무엇보다 육체적으로 덜 힘들었다. 퇴근하고도 에너지가 남는 게 좋았다. 초반엔 스크립트를 외우고, 동료들 앞에서 고객 응대처럼 역할 연습을 했다. 오글거렸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며칠 교육 후, 파티션 속 내 전화기가 배정됐다. 팀장은 전화번호가 빼곡한 두꺼운 인쇄물을 건네며 말했다.
“이제 연습한 대로 하면 돼요, 요한 씨. 힘내요!”
떨리는 손으로 첫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최근에 영어 공부—”
“누구세요? 전 안 해요.”
두 문장도 못 끝내고 ‘뚝’. 민망해 수화기를 바로 내려놓지도 못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다른 번호. 또 ‘뚝’. ‘가장 쉽다’던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때 파티션 너머에서 누군가 교재 판매에 성공했다며 환호가 터졌다. ‘나도 곧 할 수 있다’ 다짐했지만, 차갑게 끊기는 목소리들이 자신감을 갉아먹었다. 점심 자리에서 동료들은 “처음엔 다 그래. 노하우 생기면 한순간에 쏟아져”라며 위로했다. 그렇게 한 달, 겨우 기본급만 받고 실적은 없었다.
돈 벌려고 자퇴까지 했는데, ‘돈 버는 게 이렇게 어렵구나’ 깨달을수록 집에서 늘어져 있는 아빠가 밉기보다,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이해하게 됐다. 여자친구는 엄마 몰래 학교 끝나고 교복을 입고 회사에 찾아와 나를 응원했다. 우리는 소박한 미래를 그리며 데이트했다.
조금씩 익숙해지자, 끊기기 전에 억지로라도 대화를 이어 가게 됐다. 그러다 우연히 정말 영어공부를 시작하려던 사람과 연결됐다.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하고, 사은품까지 알려 주자 처음으로 “구매하겠다”는 답을 들었다.
“신용카드 번호만 불러주세요. 구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은품은 CD플레이어와 영어 원서예요.”
사무실이 박수로 들썩였다. ‘처음이 어렵지, 이제부터야’라는 응원을 들으며, 처음으로 이 공간의 사람들이 동료로 느껴졌다. 과거엔 무거운 짐을 들고 창고를 정리하면서 말 한마디 섞을 상대도 없었다. 침묵 속 노동뿐이었다.
여긴 달랐다. 천국 같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판매가 이어졌다. 한 달 동안 추가로 3세트를 더 팔아 인센티브만 120만 원이 찍혔다. 성인이 아니라 술자리에 대놓고 끼진 못했지만, 형과 누나들은 점심을 사 주며 “다음 달 인센 생각하면 취한다”고 웃었다. 모두 각자 몇 천만 원을 꿈꾸진 않아도, 돈 쓸 생각에 행복해 보였다. ‘역시 돈이 최고인가. 사람을 이렇게 웃게 만들다니.’ 학교를 그만두고 사회인이 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틈만 나면 모여 “수당 포함하면 얼마냐”를 계산했다.
“요한, 이번에 얼마나 받아?” 형이 물었다.
“190만 원 정도요.”
“이야… 좋지? 돈 받으면 뭘 할 거야?”
“어머니 드려야죠. 빚이 있어서요.”
“착하네, 착해.”
“형은요?”
“여친이랑 여행 좀. 갖고 싶다던 거 사주고… 차도 한 대 보려고.”
“차요? 있으면 편하겠네요.”
“넌 운전면허도 아직 없지? 가끔 보면 신기하긴 해, 너도…”
사무실은 항상 들뜬 공기로 가득했다. 사고 싶은 리스트를 줄줄 읊는 소리. 일용직으로 번 돈도, 전화로 번 돈도, 결국 숫자는 같다. 돈에는 ‘고생’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는다. 어떻게 벌었는지보다 ‘얼마’를 벌었는지가 더 중요해지는 게, 이상하면서도 차갑게 느껴졌다.
퇴근해 조용히 책상에 앉아 나도 리스트를 적어봤다. 형편이 좋아지면 뭘 살까. 옷, 신발, 화장품, 가방, 휴대전화, 자동차, 여행…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집.
어린 시절의 기억 탓도 있고, 지금 사는 집도 전세에서 월세로 바뀌었다. 작년 겨울, 수십 년 만의 한파로 바깥 보일러 배관이 터져 물이 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오래된 빌라라 얼어서 터졌다 했다. 손재주 좋은 아빠도 속수무책. 우리는 이불로 감싸며 대비했지만 소용없었다. 주인집은 사용자 책임이라며 차갑게 잘랐다. 사비로 보일러를 고치고 며칠을 떨었다. 집에 있는데도 밖에 있는 것 같았다. 방 안에서 입김이 섰고, 동생은 신기해했지만 부모님 얼굴엔 근심이 얼어붙었다.
노트에 ‘집’이라고 적고, 한참을 어떤 집일지 그렸다. 3층짜리 단독주택. 1층 부모님, 2층 동생네, 3층 우리. 화살표로 적어 넣었다. 열여덟의 나는 ‘어떻게든 내 집을 사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리 밖에서 지쳐도 집에 오면 포근하고, 주인집 눈치 보지 않는 울타리를 갖겠다고.
두 달 조금 넘게 다닌 어느 날 더 일찍 출근하려 버스에 올랐다. 아침 공기마저 달았다. 평소처럼 도착해 계단을 오르는데, 누나 한 분이 쪼그려 앉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혹시 들은 거 있어? 사무실이 텅 비었어.”
“네? 무슨 말씀이에요?”
사무실 문을 열자, 전화기·컴퓨터· TV, 돈 되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싸구려 책상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멍해졌다.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의 다 왔다”는 형에게 “사무실이 비였다”라고 말하자, 수화기 너머로 한숨만 들렸다.
잠시 뒤, 대부분의 직원이 모였다. 직급 높은 사람들만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손이 불나도록 전화를 돌렸지만 누구도 받지 않았다. “돈 먹고 날랐다”, “사기다”라는 고성이 터졌다. 며칠 전만 해도 사고 싶은 리스트를 말하며 행복하던 사람들이었다. 하루에 수백 번 낯선 번호로 전화를 걸고 욕을 먹어가며 목이 쉬도록 말해 겨우 벌던 사람들이었다. 막내인 나는 계단 구석에 주저앉았다. 어제 노트에 ‘집’을 적어 넣던 내 손이 한심했다.
몇 시간 분노와 좌절, 혹시나 하는 기대가 피를 말릴 즈음 하나둘 자리를 떴다. “고용노동부로 가자”, “경찰서에 가자”는 말이 오갔다. 형과 누나들은 경찰서를 들르겠다 했고, 나는 일이 있다며 집으로 간다고 했다. 텅 빈 사무실을 보는 순간, 영영 돈을 못 받으리란 것을 직감했다.
‘세상에 쉬운 건 없구나. 쉽게 얻은 건 언젠가 대가를 치르는구나. 이게 인생이구나.’
재수 없는 인생, 운도 없는 인생. 능력도 없고, 사기나 당하는 인생. 부정적인 단어들이 버스 엔진 소리와 섞여 머릿속을 맴돌았다. 답답해 중간에 내려 한강으로 향했다. 평일 점심의 한강은 고요했다. 강 옆으로 비싼 아파트들이 줄지어 섰다. 벤치에 앉아 다리와 아파트를 보니 친척 형이 떠올랐다. 형은 군 제대 후 바쁘게 살다 사기를 당하고 일이 꼬여, 그해 여름 내내 잠만 잤다.
“형, 어떻게 그렇게 잠을 많이 자요? 계속 졸려?”
“너 가끔 이대로 계속 자고 싶은 마음 모르냐… 아니, 눈뜨고 싶지 않은 거.”
그 말의 뜻을 이제는 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가 있다는 것. 사는 게 버거울 때의 무게. 돈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고용노동부까지 찾았지만, 우리는 돈을 받지 못했다. “근로계약서 작성했나요?”라는 질문에, 내가 얼마나 하찮은 직원이었는지 깨달았다. 계약서가 필요하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계약서조차 만들 필요 없는 먹잇감—그들 눈엔 미성년 자퇴생인 내가 반격할 수 없는 가장 쉬운 먹잇감이었다.
그 일 이후 한동안 일자리를 찾지 않았다. 아니, 찾을 용기가 사라졌다. 배신감보다 사회가 무서웠다. 또 당할까 봐. 여자친구 엄마가 우리를 그렇게 잔인하게 떼어 놓으려던 이유도, ‘나 같은 존재’라는 냉혹한 평가도 받아들여졌다. 엄마는 내게 조언도 위로도 건네지 못했다. 아마 나보다 더 크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저 사라지고 싶었다.
몇 날을 빈둥거리다 친구들을 보러 PC방에 갔다. 교복 입은 애들이 줄지어 앉아 칼질과 활질을 하는 작은 캐릭터에 몰입해 있었다. ‘복에 겨운 놈들’이라 중얼거리는데, 한놈이 입이 귀에 걸린 채 들어왔다.
“오늘 대박. 돈 벌었다.”
“무슨 돈?”
“게임에서 버는 돈이 진짜 돈이야. 오늘 좀 정리했지.”
정신이 혼미했다. 게임 속 돈이 현실의 돈이라니. 그날 이후 나는 삶을 게임 속 캐릭터에게 넘겨줬다. 작은 모니터 속에서 돈을 좇았다. 검정고시고 뭐고, 눈 뜨고 감을 때까지—아니 잠까지 줄여가며 게임만 했다. 리니지는 미친 듯 인기가 있었고, 친구들 말은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게임 속 돈을 사고팔았다. 나는 초등학생 동생까지 끌어들여 밤낮없이 캐릭터를 돌렸다. 사냥하고, 장사하고, 현실의 나는 사라지고 캐릭터가 진짜 내가 되었다.
몇 달이 그렇게 흘렀다. 돈 때문이라기엔 이미 중독이었다.
말없는 아빠가 어느 날 술에 취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들, 자퇴해도 아빠 꼴이 그래서 아무 말 안 했는데… 나중에 뭐 되려고 이렇게 중독이 돼서… 제발 정신 좀 차려.”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돈 버는 중이에요. 게임이 아니라 돈 번다니까요!”
아빠는 한숨만 내쉬고 나갔다. 결국 캐릭터와 장비를 팔면 400만 원이 넘는 수준까지 갔다. 한 달 100만 원꼴. 사기 맞아 한 푼도 못 받은 것보단 낫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게임 속 사람들과 밤새 같이 있다 보니 현실에서도 만나게 됐다. 자퇴생이라도 시간은 자유로웠다. 밤새도록 게임을 했다. 그 속에선 사람대접받는 기분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캐릭터는 힘을 합쳐 쓰러뜨렸다. 현실에서 못 하는 걸 게임에서는 다 했다. 그 대리만족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소모되는 줄 몰랐다. 결국 부산까지 내려가 게임을 했다. 게임방 사장님의 초대였다. 눈 뜨고 감을 때까지 게임. 부모님은 거의 나를 포기한 듯 연락도 없었다. 쪽방에서 자고 모니터 앞에서 식사를 때우며 폐인처럼 버텼다. 중요한 공성전이 있는 날이면 길드원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성을 지키느냐 빼앗기느냐—그게 곧 권력이었다. 지키지 못하면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모든 신경을 마우스와 키보드에 꽂았다. 그때, 유리창이 깨지며 검은 양복의 사람들이 무더기로 들이닥쳤다. 맞거나 폭행당하진 않았지만 목적은 달성됐다. 우리가 게임을 못 하게 만드는 것. 그날 성을 빼앗겼다. 소문만 듣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멍해졌다. 사장과 형, 누나들은 담담했지만, 나에겐 또 다른 실망이었다. 며칠 뒤, 짐을 싸 서울로 올라왔다. 한동안 접속도 하지 않은 채, 방구석에서 깡소주를 들이켰다. 자퇴할 땐 분명 목적이 있었는데, 달력을 보니 1년 넘는 시간이 의미 없이 흘렀다.
엄마는 여전히 주야장천 식당 일을 했고, 아빠는 돈도 없으면서 아이템이 있다고 허황된 말만 했다. 동생은 말수가 줄었다.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텔레비전 속 부자들까지 미웠다. 우리 가족은 목표를 가지는 것조차 사치인 듯, 지하 더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같은 시간, 아버지의 동료는 대출받아 경기도 외곽 큰 주유소를 인계받아 사장이 됐다. 어릴 땐 기름때 묻은 옷을 입고 같이 놀던 그 집 아이들은 고액 과외를 받으며 SKY를 향해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는 가끔 그 친구 이야기를 하며 “나도 운이 좋았으면…” 하고 신세 한탄을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아버지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운이 아니라는 걸.
그분은 예전부터 검소했고, 판단이 빨랐고, 용기 있게 움직였다. 돈이 있어도 검소했고, 추진력이 있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식들은 그 행동을 거울삼아 더 넓은 세상을 준비했다. 우리가 남 밑에서 돈 몇 푼 벌겠다며 아등바등하는 동안, 그들은 이미 예비 부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조용히—하지만 확실하게—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