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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군대라는 또 다른 지옥

도망과 선택의 갈림

by 고용환


친구들이 학교에서 교복을 입고 학생으로 보낸 시간 동안, 나는 더러움과 두려움 그리고 내 목숨을 걸고 일했다. 친구들은 20살이 된다는 설렘과 찬란한 인생을 꿈꾸며 수능 성적이 안 나온 것에 사치스럽게 한탄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대학생 또는 재수생, 그 두 가지 선택을 두고 머리털 빠지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북에 사는 평범한 친구 놈 중 그 누구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선택을 강요받은 놈은 없었다.


검정고시로 학교를 졸업했고, 이제는 미성년자 딱지도 사라졌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내 인생이라는 출발점은 언제나 남들보다 뒤처진 것만 같았다. 나만 빼고,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곳에서 지친 내색도 없이 웃으면서 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늦었지만 내 발로 나온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20살이 되어버렸다.


20살이 되니 이런저런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여자친구도 대학에 붙어서 자유를 얻은 듯 행복해하고 있었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는 것조차 짜증이 났다. 그래서 틈만 나면 시비를 걸었다. 사실은 모든 게 부러웠다.


내게 20살이 되고 눈앞에 놓인 건 군대뿐이었다. 남자라면 다 가야 하는 군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국방의 의무라는 사명감 뒤에 나의 초라함을 감추고 싶었다. 아니, 남들은 힘들다고 하는데 왠지 그곳에서 2년 숨어 있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 이유에서 동네 형들이 휴가를 나오면 이것저것 군대에 관해서 물어봤다. 스스로 입대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빠는 내게 와서 군대 가기 전까지 같이 일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놀고 있는 백수 아빠가 놀고 있는 백수 아들에게 일하자고 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아빠는 불법이지만 최근에 유행하는 휘발유 첨가제 판매를 하자고 했다. 업계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물량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한 통 팔면 6천 원이 남고, 하루에 20통 정도는 무조건 팔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아빠를 따라서 경기도 일대에 장사할 자리를 찾아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자퇴를 안 하고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아빠랑 같이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색해서 견디지 못했을 테지만, 그동안 내가 보고 경험한 것들 때문에 조금이나마 아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자식 앞에서 표현도 못 하고 뒤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감히 이해되었다. 시장조사를 하니 첨가제 판매는 이미 이곳저곳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특히 차들이 많이 다니는 큰 도로 근처에는 더 이상 장사할 곳을 찾기 힘들었다. 위험물이기에 건물주들은 그런 장사를 하겠다고 하면 꺼렸다.


우리는 한 달이 넘게 돌고 돌다가 도로변은 아니지만, 간판을 세우고 안쪽으로 유인하면 판매를 할 수 있는 비닐하우스와 넓은 공터가 있는 곳을 어렵게 구했다. 비닐하우스가 쭉 들어선 곳에 계약하고 내가 번 돈까지 보태서 첨가제를 샀다. 그리고 간판 가게에 가서 홍보용 간판들을 주문했다. 추진력이 별로 없던 아빠와 달리, 그간 경험과 젊음으로 무장한 나는 빠르게 일을 진행했다.


장사는 처음이지만 한 통을 팔면 6천 원, 하루에 10통만 팔아도 6만 원, 한 달이면 180만 원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근질거렸다. 하루라도 빨리 오픈하고 싶었다. 열심히 오픈 준비를 하면서 비닐하우스 중에 일부에 사람이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겉은 비닐하우스인데 그 안에는 컨테이너가 있었다. 세상에 사람들이 비닐하우스에서도 사는구나. 신기하면서 현실이 슬펐다.


단칸방 반지하와 비닐하우스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같은 처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에 위험물을 가득 둔다는 게 너무도 마음에 걸렸다.


“아빠, 이거 저 사람들이 신고하면 우리 소방법에 걸려서 장사 접어야 하는 거죠? 맞죠?”
“저 사람들은 신고 못 해. 저렇게 사는 것도 불법이거든….”


아빠의 대답은 너무도 단호했다. 불법으로 살고 있어서 신고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우리도 불법인데 저 사람들도 불법이니 같은 처지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게 말하는 아빠가 불쌍해 보였다. 그리고 하우스에서 사는 그 사람들도 불쌍했다.


기분이 묘하게 들뜬 오픈 첫날, 나는 길가로 나가서 다가오는 차들을 바라보며 작은 간판 흔들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어려운 것은 없었다. 차가 들어오면 20리터 첨가제 뚜껑을 열고 호스를 연결해서 주유구에 기름을 넣어주면 되었다. 다음으로 돈을 받고 공손하게 인사하고 다시 손님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꼬박 몇 시간을 서 있어도 차들은 무심하게 나를 지나갔다. 이미 단골이 모두 있을 터였다. 그리고 불법 첨가제를 넣으면 차가 망가진다고 꺼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저녁쯤 돼서 운 좋게 차 한 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창문을 내리고 나를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첨가제 맞습니다.”
“두 통 넣어주세요.”


신이 났다. 기뻤다. 행복했다. 잠깐의 노동으로 1만 2천 원을 벌었다. 떠나는 차를 보고 나는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동안 수많은 일을 해왔지만 이렇게 자발적으로 90도 인사하는 내 모습이 놀라웠다. 역시 내 장사를 하니 사람이 달라지는구나! 남 밑이 아닌 내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사람을 한순간에 변하게 하는구나 싶었다.


차가 떠나고 나는 아빠에게 신난 목소리로 전화했다.
“아빠, 나 두 통이나 팔았어.”
“수고했네. 일 점 보고 들어갈 테니 먼저 정리하고 들어가.”


집에 가서 엄마한테 그날 일을 어린아이처럼 빠짐없이 말했다. 흡족해하는 엄마를 보니 군대 가는 것을 조금 미뤄도 될 것만 같았다. 다음날도 하우스로 출근했다. 평화로웠다. 눈치 볼 것도 없고, 내게 뭐라 하는 사람도, 억지로 일을 시키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위험하지도 않았다. 돈을 벌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안정감, 그리고 내 것이라는 소유욕을 배웠다. 그렇게 가게 문을 열고 한 달이 지났다.


하루 평균 4통의 첨가제를 팔았다. 하루에 3만 원을 벌었지만, 월세랑 출퇴근비, 식비를 제외하면 하루에 2만 원 번 셈이었다. 꼬박 12시간씩 월화수목금금금 일을 해서 번 돈이 고작 60만 원이었다. 몸과 마음은 편해도 돈벌이가 영 별로였다. 아빠는 투자금도 얼마 안 들어갔으니 군대 가기 전까지 경험이나 하라고 했는데,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결국 며칠 후 일을 마치고 아직도 리니지에 빠져 있는 복 받은 예비 대학생 친구들이 있는 게임방으로 가서 첨가제 쿠폰을 만들었다.


‘10통을 넣으면 1통 무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이렇게 파격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판매처는 없었다. 이렇게 홍보만 하면 한 번 온 사람들을 내 단골로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단골은 바로 매출이 되고, 그것은 바로 돈으로 남겨지는 것이었다. 게임방 프린터로 이것저것 쿠폰을 출력하고 집에 도착해서 하나씩 가위로 오리고 복제 방지를 위해 내 도장을 찍었다. 누가 봐도 싸구려 티가 나는 쿠폰이었지만 그냥 기분이 좋았다.


다음 날부터 첨가제를 넣으러 오는 손님들에게 홍보하며 나눠줬다. 반응은 정말 다양했다.
“이게 뭐예요?”
“이거 10개 도장 받으면 한 통 무료로 드려요.”
“그래요? 하하, 무슨 주유소 같네요. 수고하세요.”


자리가 좋지 않고 늦게 장사를 시작했으니 매출을 늘리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했다. 내 살을 깎아도 남의 고객을 빼앗아 오는 것, 바로 자본주의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가방끈이 짧고 검정고시로 겨우 졸업했지만 대신 경험을 통해 실전을 배운 게 도움이 되었다.


쿠폰을 진행하고 나름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하루에 20통까지 파는 날도 있었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내 전략이 먹힌 것이었다. 아빠는 이런 거 하는 게 절대 도움 안 될 거라고 내게 말했지만, 판매량으로 증명하니 그 후에는 별소리가 없었다.


장사를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나고 매출을 정리했다. 하루 평균 9통, 저번 달보다 3배나 늘어 있었다. 이대로만 된다면 금세 부자가 될 것만 같았다. 돈 버는 게 처음으로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동안 두려움은 모두 사라지고 희망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집에 가면 아빠도 엄마도 왠지 모르게 더 웃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우리도 화목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사 시작한 지 세 달째가 돼서는 기름값이 많이 인상되면서 첨가제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혼자서 판매가 버거울 정도로 차가 많이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차가 들어올 때마다 돈으로 보였다. 20리터 첨가제도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대학생이 된 친구들 따위는 전혀 부럽지 않았다. 매출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쿠폰도 명함 파는 곳에 가서 두껍고 모양새 나게 다시 만들었다. 입구에 간판도 하나 더 주문해서 2개를 세웠다.


‘투자해야지 더 돈을 벌지!’


누가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그렇게 했다. 역시나 효과는 더 좋았다. 가끔 재수하는 친구들을 불러서 아르바이트로 쓸 정도로 정말 돈이 자동차 바퀴처럼 굴러서 들어왔다. 그런 행복에 취해 한 가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바로 불법이라는 것…. 법적으로 팔면 안 되는 위험물을 몰래 팔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사업자 등록도 하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고 이 땅에서 이렇게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월수입이 500만 원을 넘어가고, 그저 행복에 취해 해롱해롱하고 있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가게 문을 열고 첨가제를 밖으로 꺼내서 준비하는데 경찰차와 소방차가 요란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나는 얼음이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발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기 이리 와 보세요!”
“이거 불법인 거 아시죠? 주인이세요?”
“지금 당장 같이 서로 가시죠.”
“네? 어디로요?”
“경찰서.”
“잠시만요, 잠시만요. 아빠한테 전화 좀….”


나는 그렇게 경찰서로 질질 끌려갔다. 도착해서 경찰관은 어디서 물건을 받아서 파냐고 나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모른다고 대답했다. 사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몰랐다. 거짓말을 할 만큼 대답하지도 못했다. 결국 아빠가 가져다줬다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화살은 아빠를 향해 정조준되었다. 그리고 호출당해서 서로 끌려왔다. 고개는 이미 90도보다 더 숙인 상태, 죄인의 모습을 하고 굽신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아빠가 내 옆에 앉았다.


어릴 때 집주인한테 당했던 것처럼 아빠는 세월이 지나도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빠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경찰관은 내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다시 돌아간 하우스는 처참했다. 보관 중인 첨가제는 모두 압수당했다. 그리고 아빠는 구치소로 끌려갔다.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알고 보니 아빠는 바지사장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불법 첨가제 판매에 바지사장을 하고 있었으니, 신고가 들어온 우리뿐 아니라 여러 곳에 대한 물건 공급 책임은 모두 아빠 몫이었다. 결국 집에서 놀고 있던 아빠를 주변 지인들이 이용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용당한 거였다.


장사가 좀 된다고 200통 넘게 들여 두었는데 모두 압수당해 손실은 엄청났다. 그동안 번 돈을 다 날린 셈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 내가 만든 쿠폰 때문에 주변 업체들이 매우 화가 났고 그래서 우리를 신고했다고 했다. 어디 감히 어린놈이 겁도 없이 나대는 것을 가만히 두는 어른들은 없었다. 결국 처참하게 벌을 받고 말았다. 역시 불법은 불법이었다. 누군가 치면 아파도 맞아야 했다. 저항도, 아프다는 소리도 절대 내면 안 됐다.


설상가상 아빠가 구치소에서 나오고 우리는 벌금까지 물게 되었다. 일을 알선했던 사람들은 모두 아빠를 외면했다. 안 그래도 빚도 많은데 벌금 때문에 엄마의 한숨은 늘어만 갔다. 결국 엄마가 나서서 돈을 빌리러 다녔다. 친구들, 친척들, 직장 동료들에게까지 모두 아쉬운 소리를 했다. 전화기 건너로 거절당할 때마다 오히려 엄마는 미안하다고, 괜찮다고 끝도 없이 말했다. 엄마는 맨날 남들에게 사과하고 미안해한다고 해야만 했다.


모든 일이 나 때문에 벌어진 것은 죄책감이 나를 억눌렀다. 도망가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사라지고 싶었다. 나란 존재는 주변에 짐이 되는 것만 같았다. 도움이 되려고 했는데 매번 걱정만 안겨드렸다.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나는 숨죽여서 잠만 잤다. 예전에 친척 형이 낮이고 밤이고 잠만 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잠들면 잠시나마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눈 뜨면 고통스러웠다. 오지 않은 잠을 초대하기 위해 억지로 깡소주를 먹고 다시 잠을 잤다. 그리고 이 엉망이 되어버린 현실을 피해서 피난 가듯 입대했다.


군 생활은 쉽지 않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고참들은 재수 없게 왕처럼 행동했다. 그곳은 정말 또 다른 세계였다. 그동안 죄책감이나 고통 따위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등병이라는 계급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밑바닥만 같았다. 그래도 참을 만했다. 축구도 못 하고, 아부도 잘 못 떠는 나를 미워하는 고참 때문에 괴롭힘을 심하게 당했지만, 눈물이 나거나 군대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도 지옥이 맞지만 밖은 희망조차 차단 당한 잔혼한 지옥이었다. 같은 지옥이라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것을 하면 되는 군대가 훨씬 나았다.


군대에서 시간은 정말 잘 갔다. 주변 동기들은 틈만 나면 전역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댔다. 달력에 날짜를 지워가면서 밖에 나갈 날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일병이 되면서 성실하게 일하는 나를 좋아하는 후임도, 선임도 늘어났다. 괜찮았다. 가끔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훈련이 많아서 씻지도 못하고, 자면서 밤새 걸어도, 산속에서 잠을 자도 괜찮았다.

부대는 서울에 있었다. 남들은 부럽다고 했지만 위치만 좋았다. 서울이지만 훈련은 징그럽게 많았다. 맨날 김포로 가서 훈련했다.


단지 아쉬운 한 가지는 가까운 곳에 있는데 여자친구는 면회나 편지조차 보내지 않았다. 대학에 가면서 나란 존재의 가치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돈만 벌며 미래도 없어 보이고, 하는 일마다 재수 없게 안 풀리는 나보다 더 멋지고 똑똑한 남자들은 널려 있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헤어졌다. 그렇게 첫사랑은 현실이 아닌 추억 속으로 영원히 잠들어 버렸다. 눈을 감아도 그려지는 그 모든 순간을 지울 수 없었다.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냥 과거 속에 예쁜 추억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토록 사랑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상병이 되고 나는 큰 결심을 했다. 직업군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돈을 얼마 버는지, 무슨 혜택이 있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가는 게 두려웠다. 또다시 그런 무시무시한 경험을 하는 게 끔찍했다.


부사관으로 지원해서 4년 더 군 생활하면서 돈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당시에 인기가 별로였던 부사관을 지원한다고 하니 부대 간부들이 일부는 친근하게 다가와 줬다. 하지만 어떤 간부들은 왜 지원하냐고 말리기도 했다.


단지 꼬박꼬박 월급이 나온다는 것과 결혼하면 관사도 제공해 준다는 것, 그리고 부사관이 되면 병 생활 기간에 대한 보상 대가로 700만 원을 준다는 것만 중요했다. 21살 나이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적어도 군대는 시키는 것만 성실히 열심히 하면 잘한다고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지원서를 작성한 후 부모님 동의를 받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면회를 와달라고 부탁했다. 면회실에서 엄마는 살이 쪽 빠진 아들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나는 말을 꺼냈다.


“저 부사관 지원하려고요.”
“뭐? 하사관? 하사? 야, 네가 그런 걸 왜 하냐!”


어이없었다. 아빠는 귀까지 빨개져 가면서 반기를 들었다. 엄마도 아닌 아빠가 그렇게 말하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설득하려고 입을 열었다. 물러날 수 없었다.


“요즘은 괜찮아요. 그렇게 나쁘지도 않고 집도 준대요. 그리고….”
“됐다. 전역해서 공부하고 대학도 가고….”
“무슨 대학에 가요. 등록금은? 그리고….”


엄마는 둘 대화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면회실은 점점 나와 아빠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결국 그날 서명을 받지 못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아빠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빠, 그만 놀고 일다운 일 하면 나도 이거 지원 안 할게!”


자식 놈이, 그것도 장남이 부모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소리만 남기고 씩씩거리며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왔다. 부대 간부에게 면담하고 상황을 설명하니 부모님 동의가 없으면 절대로 지원을 못 한다고 했다. 다 큰 성인이 무슨 부모 동의 따위가 필요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손을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며칠이 지나서 행정반에서 나를 호출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너 아빠 일 시작했다.”
“무슨 일해? 어디서? 또 바지사장이나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 아빠 동료분 알지? 거기 주유소에 들어가셨어.”


그동안 놀고 있는 게 안타까워, 언제든 와서 일하라고 하던 아저씨였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거절했던 아빠였다. 그런데 내가 부사관 한다고 하니 바로 친구 밑으로 들어갔다.

아빠가 젊을 때, 당시 하사관이라고 불렸던 말뚝 박는 군인들에 대한 나쁜 기억이 있었다. 쭉쭉 성장하는 우리나라만큼 밖에도 일자리가 넘쳤고, 하물며 공장에서 일해도 군인보다 돈을 더 많이 받았다고 했다. 정말 할 것도 없고 꼴통들이나 하는 그런 일쯤으로 아빠는 지금까지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자식이 그런 꼴로 사는 게 보기 싫어서 막기 위해 자존심을 버렸다.


지금은 나아졌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아빠는 듣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몇 달을 계속 졸라서 서명을 받아냈다. 단 4년만 해보고 결정하라면서, 그곳에 영원히 있지 말라는 아빠의 조건이었다.

서류를 접수하고 부사관이 되기 위해 시험을 봤다. 정말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어이없는 문제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SKY는 한글로 무엇인가요?”
“자기 이름을 한문으로 쓰세요.”


병사로 지내다가 부사관 지원하겠다고 하는 우리가 모여서 푼 시험 문제였다. 이거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역시나 전원 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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