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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첫 월급, 정규직의 무게

세차장에서의 아버지 뒷모습

by 고용환

나는 2005년 육군 하사로 임관했다. 월급 89만 원과 병 생활 보상으로 기여금까지 받으니 첫 달에 800만 원이라는 목돈이 통장으로 들어왔다. 태어나서 통장에 담긴 가장 큰 잔액이었다. 통장 정리를 하고 잔액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냥 행복했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 돈으로 조금이라도 빚을 갚으라고, 이제 걱정하지 말라고, 꼬박꼬박 월급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엄마는 고맙다는 말만 하고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하지만 전액을 이체했다. 그러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적어도 나란 사람이 엄마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고 싶었다. 이체된 돈을 보고 엄마는 내게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했다. 처음으로 온전히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운이 좋게 병사 때 복무하던 지역으로 원복 했다. 덕분에 집이랑 멀지 않은 곳에 머물 수 있었다. 언제든 원하면 버스 한 번에 집에 다녀올 수 있었다. 하사 월급은 초라할 만큼 적었다. 매달 89만 원, 110만 원, 89만 원, 이런 식으로 불규칙적으로 돈이 들어왔다. 야근하면 초과근무 수당을 받을 수 있었는데 시간당 천 원에 불과했다. 최저 시급보다 한참 밑이었다. 다만 좋은 점은 일하면서 돈 쓸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부대 배치를 받고 초반에 업무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접어 두었던 노트를 펼쳤다.

노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갖고 싶은 것, 부모님·동생과 행복하게 평생 함께 살 수 있는 3층짜리 우리 집’


주변에서는 경기가 어려우니 직업군인 선택은 잘한 거라고, 밖이 어려우니 절대 나오지 말고 계속 군대에 있으라고 했다. 특별히 어렵게 합격해서 하사가 된 것이 아니기에 큰 감흥은 없었지만, 목에 걸린 공무원증은 왠지 모를 소속감과 안도감을 주었다. 단지 다른 공무원과 달리 4년 계약직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찜찜했다. 보통 공무원은 철밥통이라고, 한 번 되면 정년까지 보장된다고 하지만, 처음이 쉬워서인지 부사관은 최초에 4년 단기 복무하고 그중 일부 인원만 장기복무자로 선발해 정년보장과 연금을 지급해 줬다. 생활하면서 주변 선배들이 장기가 안 돼서 남고 싶어도 억지로 밖으로 쫓겨나는 것을 보고, 장기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 안심할 수 없다고 마음을 졸였다. 더 불안한 것은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꼭 장기복무자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해마다 장기 공석은 나랏돈 사정과 정책에 따라서 수시로 달라지는 듯했다. 마치 열심히만 하면 무조건 된다기보다는 운이 따라줘야 하는 것만 같았다. 어떤 선배는 칭찬이란 칭찬은 모두 듣고 잘한다고 소문이 무성했지만, 맨날 놀고먹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선배한테 밀려 억울하게 나가기도 했다. 놀고먹는 것처럼 행동했던 선배가 결혼해서 처자식이 있다는 이유와 윗사람들 비위를 기가 막히게 잘 맞춘 것 때문에 추천을 잘 받았다는 뜬소문만 돌았다. 하지만 결국 남아 있는 사람이 승자였다.


무조건 장기가 된다는 확신이 없다면 만약을 위해 저축이라도 많이 하고, 도움 되는 공부를 더 하기로 결심했다. 급여는 작지만 매달 10일이 되면 어김없이 통장에 절대 깰 수 없는 약속처럼 돈이 들어왔다. 처음으로 느끼는 완벽한 고정 수입이었다. 적어도 4년 동안은 매달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훈련은 고되고, 당직 근무도 많아서 밤새고 잠도 못 자고 다음 날 일할 때도 많았다. 간부가 돼도 여전히 군기 잡는 선배들 때문에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병사 때랑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단지 돈을 더 받는다는 것 하나가 다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나는 월급의 평균을 잡고 저축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평균 110만 원, 한 달에 최소 60만 원을 저축하면 1년에 720만 원을 모을 수 있었다. 4년이면 2,800만 원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추가로 퇴직금 600만 원 정도가 있었다. 25살에 정규직이 안 돼서 전역한다 해도 최소 3천만 원은 모을 수 있었다. 그 돈이면 밖에 나가서도 버티면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집에 매달 돈을 드릴까 고민도 했지만, 이기적으로 목돈을 위해 4년은 안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도와주겠다고 번 몇 푼 안 되는 돈을 드려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집에 최소 10만 원만 드리고 매달 60만 원씩 저축하기로 했다. 사는 게 힘들 것 같았지만 어쩌면 가능해 보였다. 돈을 쓰고 싶어도 훈련, 근무, 야근 때문에 밖에 나갈 일도 딱히 없었고, PX에서 사는 물건은 저렴해서 돈을 더 아낄 수 있었다. 110만 원을 받고 70만 원을 제외하면 40만 원이 남았다. 그 돈에서 통신비와 숙소 관리비, 식비를 내면 20만 원 정도가 용돈으로 남았다. 20만 원을 아끼고 아껴서 검정고시 학력을 지우기 위해 나에게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학력이 그다지 필요 없었지만, 부사관 지원을 할 때 최종학력에 ‘검정고시’라고 적으니 주임원사가 나를 쏘아보며 말했었다.


“너 뭐 사고 쳤냐?”
“아닙니다.”


가난해서, 빚이 많아서, 엄마가 쓰러진 게 화가 나서 돈을 벌려고 자퇴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런 속사정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가난해서 자퇴했다고 말해도 믿어 줄 것 같지 않은 눈빛이었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학력을 갈아치우고 싶었다. 과거를 지우개로 지울 수는 없지만, 위에 새로운 걸로 덮을 수는 있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었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적금통장으로 빠져나가도록 했다. 행여나 통장에 돈이 보이면 쓸까 봐 두려웠다. 남은 돈으로 어떻게든 버티려고 하다 보니 이만저만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다른 선후배들은 가끔 밖에 나가면 옷도 사고, 데이트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느라 휴가 때 돈을 썼다. 그것도 모자라서 신용카드까지 발급받았다. 안정된 직장이라서 그런지 신용카드 발급은 쉬웠다. 원하면 발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살아온 길을 떠올리며 신용카드 대신에 체크카드를 발급받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없으면 안 쓴다.’


가끔 부대 사람들 경조사라도 생기면 내 자금 사정은 완전 비상 모드로 전환되었다. 맨날 얼굴 보는 사이에 안 갈 수는 없어서 5만 원을 내면, 월급이 나오기 몇 주일 전부터 손가락만 빨며 버텨야만 했다. 다행인 것은 군복이 있어서 옷을 살 필요도 없고, 출퇴근하느라 차비도 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110만 원은 아니고, 내가 받는 돈은 적어도 140만 원 정도의 값어치를 하는 것만 같았다.


부대에서 간부로 인정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퇴하고 경험한 3년이라는 사회생활은 큰 도움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경험한 잡다한 것들을 활용할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돈을 아낀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저축하느라 쓸 돈이 없어서 부대에 오래 붙어 있는 것 때문에 열심히 하는 군인으로 알려졌다.


대학은 학점은행제로 다녔다. 도무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유통관리사, 워드프로세서 1급, 컴퓨터활용능력 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일부 모자란 학점을 인터넷으로 들으면 1년 만에 전문학사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우선 가장 쉬운 워드 필기 문제집을 사서, 세 명이 한방을 쓰는 기숙사에서 퇴근 후 공부했다. 선배들이 잠을 자면 조용히 바닥에 누워 손전등을 켜고 문제를 풀었다. 숙소비가 저렴했지만 좁았다.


다시 경험하는 단칸방이었다. 한 방에서 세 명이 잠을 잤다. 막내라서 침대는 없었다. 선배들은 이층 침대에서 자고, 바닥이 내 자리였다. 하지만 익숙하고 불편하지 않았다. 오랜 경험이 떠오르며 단칸방 전문가가 된 기분이었다. 좁은 집에서 잘 사는 방법은 엄마에게 배웠다. 항상 정리하고 깨끗하게 방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야 공간이 생기고 무엇인가 할 수가 있다. 나는 배운 데로 열심히 청소하고 정리했다. 선배들은 생긴 거답지 않게 깔끔하다고 칭찬하며 청결해진 숙소를 좋아했다.


주말에는 집중해서 공부하기 위해 문제집을 들고 부대로 올라갔다. 내 책상 따위는 없었다. 당연히 업무를 보는 사무실도 없었다. 부사관은 주임원사가 되어야 3평 남짓한 사무실 하나가 겨우 주어지는 듯했다. 앞으로 군 생활을 20년 넘게 해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었다. 군대라는 직장에서도 역시 공간이 주는 무게감은 컸다. 마치 사회처럼 신분에 따라서 크기가 정해지는 것만 같았다.


군 생활 4년 조금 넘게 하면 장교는 대위로 진급하고 중대장이 되었다. 중대장실은 회의를 할 수 있는 테이블과 개인 책상과 의자, 책장과 옷장이 있는 완벽하게 독립된 사무실이었다. 병사 때는 몰랐는데 부사관이 되고 나니 뭔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따라잡을 수 없는 신분의 격차, 장교는 정확히 출발점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지원 자격이 고졸이 부사관과 최소 학사학위가 지원할 수 있는 장교는 같은 직업 군인이지만 절대로 같지 않았다.




초등학생도 한 번에 붙는다는 워드 필기를 7번 만에 겨우 합격했다. 주말마다 시험 보러 가는 나를 보고 선배들은 아니꼬운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부대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한 선배가 상처가 되는 말을 툭 던지기도 했다.


“고 하사, 너 자격증 접수할 돈 있으면 옷이나 사 입어. 간부가 품위 떨어지게 거지같이 맨날 똑같은 옷이냐.”

순간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너 그리고 뭐 대단한 줄 착각하지 마. 그냥 시키는 거 하고 장기나 되면 돼. 자격증은 무슨….”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선배는 결국 장기에 떨어졌다. 전역을 8개월 남겨둔 말년이었다.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밖에서 일할 때 맨날 화난 표정으로 지시하던 그런 선배였다.


쉽지 않은 밑바닥 하사 생활하면서 1년 정도 하면서 정확히 배운 것이 두 개 있었다.


'절대로 자존심 내세우지 말 것',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할 것'


2년이 지나고 진급 심사에 들어갔다. 드디어 계급장을 바꿀 시기가 다가왔다. 간부 중에 가장 낮은 계급이라 어깨에 힘이 절로 빠져 있었다. 그래도 중사는 좀 더 멋있고 당당해 보였다. 무엇보다 선배들이 중사 때부터 월급이 갑자기 엄청나게 올라간다고 했다. 내심 궁금해서 물어보니 170만 원 정도 받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부터 줄곧 진급만 기다렸다. 한 달에 최소 100만 원은 저축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목돈을 더 빨리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중사 진급을 앞두고 장기 발표도 같이 있었다. 1차와 2차 두 번 기회가 있었는, 1차는 거의 되지 않아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장기 발표날, 여기저기 파견과 휴가로 떠난 다른 간부를 대신해 당직을 서고 녹초가 돼 잠이 들었다. 겨우 눈을 붙였는데 인사과에서 전화가 왔다.


“고 하사, 장기 축하해!”
“네? 잘 못 들었습니다.”
“너 장기 됐다고, 이야 1차에 됐네.”
“잘 못 들었습니다….”


병사 때부터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군대 용어 중 하나가 ‘잘 못 들었습니다’였다. 아니, 사실 들었는데 이해가 안 되거나 믿기지 않을 때 습관처럼 나오는 말이었다. 이번에도 분명 들었지만, 믿어지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인사담당관님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전화기가 불이 나듯 울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축하한다고 연락이 왔다. 이렇게 4년짜리 국방부 계약직에서 정규직이 되었다.


하지만 기쁜 티를 마음껏 낼 수는 없었다. 아니, 기쁘다고 표현하면 안 됐다. 밤이 되고 부대에서 악명 높게 무서운 선배가 나를 불렀다.


“너 장기 1차에 됐다면서?”
“네, 그렇습니다.”
“좋냐?”
“아닙니다.”
“그러면 왜 장기 넣었냐? 좋지도 않은데… 미쳤냐?”


이건 어떤 대답을 해도 벗어나지 못하고 욕만 먹을 분위기였다. 계속 말장난 같은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한참 뒤에 다른 선배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만해. 뭐 고 하사가 무슨 죄가 있냐?”
“아니 이놈이 장기 안 넣었으면 선배가 됐을 거 아닙니까….”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었다. 아니,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공석은 한정되어 있어서 1차에 장기가 된 나 때문에 2차 장기가 안 된 거라고. 그래서 1차에 지원한 나는 이기적인 놈이라고.


사실 의도하고 지원한 건 아니었다. 같이 일하는 선배가 넣으라고, 괜찮다고 해서 넣었다. 그리고 당연히 안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는 정규직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 때문에 안 되었다고 하는 그 선배도 참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다. 항상 솔선수범하고, 용접하라고 하면 용접하고 쇠 자르고 나무 자르고 도색도 하면서 부대를 관리했다. 훈련 때는 항상 선두에서 우리를 이끌었다. 그랬기 때문에 미안하고 마음이 더 불편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전문대학교를 졸업한 것과 자격증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회와 비교하면 별것도 아닌 것들이 이곳에서는 먹힌 것이었다. 단지 검정고시 학력이 싫어서 했던 것뿐인데, 사람들은 나를 약은 놈, 기회주의자라고 낙인찍어버렸다.


여러 가지 오해를 뒤로한 채 주말에 외출 준비를 했다. 나 때문에 친구 밑에서 일하는 아빠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고, 정규직이 된 걸 직접 가서 말하고 싶었다. 살면서 아빠랑 단둘이 소주 한 잔도 못 했는데, 오늘은 용기 내서 한잔하자고 말하기로 다짐했다.


가는 길에 친구를 잠시 만나고, 일 마칠 시간쯤 해서 주유소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주유소로 걸어가는데, 셀프 세차장 앞에서 이리 뛰고 저리 닦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안 본 사이에 흰머리도 많이 늘어 보였다. 주유소가 가까워질수록 아빠는 더 선명하게 보였다. 손님들이 차 문을 빼꼼 열고 뭐라고 하면 아빠는 굽신거리며 응대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췄다.


한때 꿈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남자였는데, 지금은 그냥 일하는 직원이었다. 자기 일할 때 언제나 사람들을 먼저 챙긴다고 비싼 갈비를 사주며 양옆에 나와 동생을 앉혀놓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모습은 너무도 초라했다. 아니, 불쌍했다. 엄마도 불쌍한데 아빠도 불쌍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17살부터 사회로 나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돈 버는 흉내만 내다가, 결국 두렵고 무서워서 군대에 말뚝을 박아버린 후 남자가 이 땅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독한지 일찍 배워버렸다. 힘들다고 말하고 싶어도 처자식 걱정할까 봐 표현도 못 하고, 나쁜 길로 빠져 허우적대는 걸 알면서도 자기 처지가 볼품없어 잔소리조차 못 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주유를 마친 차들은 세차장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 줄을 섰고, 아빠는 한숨 돌릴 틈도 없이 혼자 물을 뿌리고 유리를 닦으며 세차장에 차를 주차하게 시키고 기계처럼 움직였다. 한참을 멀리서 바라보며 울다가 다가서지 못하고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 아들 정규직 됐어. 요즘 장기 돼서 정규직 되기 힘든데 1차에 한 번에 된 거예요. 밥 잘 챙겨 드시고 건강 챙기세요. 다음에 집에 가면 같이 밥 먹어요.’


핸드폰을 열어볼 시간도 없는 아빠를 뒤로하고, 멈추지 않는 눈물을 숨기며 버스에 올라탔다. 그날이 아빠와 소주 한 잔을 먹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렇게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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