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 가족을 뒤로 한 이기적인 선택

무너진 자존심 위에 새로운 출발

by 고용환

시간이 흐르자 나에 대한 오해도 점점 풀리는 듯했다. 출근만 하면 정신이 한도 없이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시간이 잘 가는 게 장점이기도 했다. 언제나 지휘관이 바뀌면 우리는 이것저것 기존 것들을 바꾸느라 정신이 없었다. 항상 그랬다. 2년마다 모든 시스템이 변했다. 돌고 도는 그런 느낌이었다. 어떤 분은 이게 중요하니 이전에 하던 거 다 없애라고 하고, 다른 분은 오셔서 예전 것을 다시 하라고 하고….


모두 저마다의 방식이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지시였다. 나라 지키는 데 안 중요한 건 없었다.


중사 진급 후 운이 좋게 인사과로 보직을 받았다. 아니, 운이 좋다기보다는 인사과 일이 너무 힘들어서 선배들이 다 도망갔다. 그래서 정규직인 내가 어쩔 수 없이 앉게 되었다. 갑자기 누군가를 보좌하는 참모가 된 나는 혼란과 신기함의 중간에 서 있었다.


맨날 뭐 만들라고 하면 군말 없이 쇠 자르고 붙이고, 나무 자르고, 드릴로 시설물을 고치고, 교육훈련 때는 훈련 담당하고, 병사들 면담하며, 밤에는 당직을 섰는데, 참모부 인사과는 전혀 다른 조직 같았다. 문제는 일이 끝도 없다는 것이었다. 간부와 병사 포함해서 총 600명에 대한 인사업무를 병사 2명과 함께 헤쳐 나가야만 했다. 휴가서부터 각종 보고서, 숙소 배정 등등, 그냥 뭐만 하면 다 인사과 일이었다.


그래도 사무실에 내 책상과 컴퓨터가 있는 게 좋았다. 파티션도 있고, 내 이름이 적힌 공간은 내게 특별했다. 마치 드라마에서 보던 회사원의 모습과 같았다.


혼나고 실수하고 깨지면서 일을 배우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원도에서 선배 한 분이 전입을 왔다. 20년 넘게 산골짜기에서 근무했다고 했다. 자녀가 3명이 있었다. 수도권이라 16평 관사뿐인 상황에서, 어떤 대안도 없이 남은 숙소를 배정했다.


“다른 숙소는 없어? 우리 식구가 다섯 명이야. 어떻게 살아?”
“죄송합니다…. 있긴 한데 그건 다 직급에 맞게 나온 거라서 배정할 수 없고, 지금은 남는 관사도 없습니다.”
“아무리 수도권이어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잖아. 나 딸만 셋인데 방 두 개는 살 수가 없는데…. 그리고 서울이라 전세도 비싸서….”
“저도 어떻게든 해드리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상급 부대에서 더 큰 관사를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혹시, 가능하겠습니까?”
“규정 몰라? 다자녀도 해당이 되지만 숙소가 없잖아. 그리고 여기 다자녀가 그분 혼자도 아니고…. 다 이렇게 살아.”
“네…. 맞습니다. 하지만 너무 부탁하고 해서….”
“실무자가 그렇게 단호하지 못하고 다 받아주면 어떻게 업무를 봐.”
“아… 네, 맞습니다…. 근데 알아보니까 다른 부대에 높은 분 사시는 관사 하나 비어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그분 전출 오면 드려야지.”
“그분이 식구가 적으면 저희 숙소랑 어떻게….”
“말 같은 소리 해야지. 바빠. 끊어.”


괜히 말만 꺼냈다가 욕만 먹었다. 결국 몇 번을 더 시도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타지에서 이사와 좁고 좁은 관사로 들어와 출근하는 선배를 보니 왠지 마음이 쓰였다.

이사를 마치고 몇 주가 지나자, 잔소리하고 한 게 미안했는지 선배가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시간 돼? 소주나 한잔할까?”
“네, 선배님. 시간 됩니다.”
“부대 앞에 뒷고기 집에서 봐.”


도착하니 형수님과 아이들이 있었다. 인사를 하고 어색하게 합석했다.


“일단 같이 밥은 먹고 우리 둘은 2차 가서 이야기하자. 항상 고생이 많다. 많이 먹어라.”


왠지 모르게 가족들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강원도에서는 숙소가 28평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16평으로 이사를 했으니 그 많은 짐들은 어떻게 했을지, 내 일처럼 걱정이 됐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미안한 마음에 얻어먹는데,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도 없었다. 식사를 다 하고 가족들을 보내고 나서 선배와 나는 치킨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17년 차 상사의 모습은 초라해 보였다. 아니, 슬퍼 보였다. 서른여덟 살, 나보다 15살이나 많았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며 내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해 줬던 친척 형과 동갑이었다.


“야, 네 잘못도 아닌데 내가 미안하다.”
“아닙니다.”


이미 뒷고기 집에서 홀짝홀짝 마신 소주 때문에 선배는 얼큰히 취해 있었다.


“야, 너 돈 좀 있냐?”


어떤 의미의 질문인지 생각했다. 전입 와서 돈 빌려 달라고 수작을 부리나? 이건 뭐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아니, 아니. 돈 많이 모았냐고…!”
“아… 네. 저축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력 말고 미친 듯이 저축해라. 나중에 이런 꼴 안 당하려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나름 여기저기 물어는 봤는데….”
“뭐가 죄송해! 이게 있잖아. 관사가 나오니까 민간인들처럼 집이 당장 필요 없기는 한데, 이런 일 당하면 서러워. 아니, 가족이랑 새끼들한테 미안해. 나중에 전역하면 저기 시골 산골짜기라도 집 한 채 크게 지어서 내 집에서 살 거다. 봐라.”
“맞습니다. 선배님, 힘내십시오.”
“맞다. 너 알지, 그 군수과 탄약반장님.”
“네. 알고 있습니다.”
“그분 돈 많다. 예전에 같은 부대에서 잠시 봤는데…. 계급 낮아도 할 말 다 하고 멋지더라고? 나중에 소문 들어보니까…. 뭐 땅부자라나…. 뭐라나…. 암튼 돈이라도 많아야 해. 그니까 장기 됐으면 이제부터라도 저축 더 많이 해라. 나이 먹고 돈까지 없으면 이렇게 비참해진다. 여기서 전세나 구할 돈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냐…. 아휴….”


그날 선배와의 술자리는 내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잠시 일이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던, 바로 ‘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군 생활 4년 차, 스물여섯 살이 되었다. 그동안 4천만 원을 모았다. 중간에 아빠가 사고를 쳐서 몰래 500만 원 드린 것을 제외하면 계획대로 저축에 성공했다. 한 달에 83만 원씩 저축한 셈이었다. 1년에 한 번 나오는 보너스와 초과근무 수당까지도 빠짐없이 저축했다. 비참할 정도로 힘들었다. 내가 번 돈을 이렇게까지 쓰지도 못하면서 살아야 하나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비 통장에는 계획한 용돈 말고는 여윳돈이 머무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쓰고 싶은 유혹이 생길까 봐 언제나 두려웠다. 그래서 통장을 나눠서, 여윳돈이 생기면 바로 이체했다.


거지 같다는 소리도 듣고, 사고 싶은 것·먹고 싶은 것까지 참으면서 모은 돈은 내 피와 같았다. 그래서인지 만기가 되고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면 한없이 웃음이 나왔다. 이대로면 금방 1억도 모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금방 부자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퇴한 후 이처럼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몸도 힘들고 자유도 없어서 답답했지만, 그래도 꾸준한 소득은 위대했다.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였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고 적은 돈을 모은다는 것을 배웠다.


하사 때 월급은 미성년자일 때 돈벌이보다 적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직장을 자주 옮기면서 꾸준히 돈을 모았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목돈은 내게 머물 수 없었다. 통장에 흔적만 초라하게 남기고 스쳐 지나가는, 그저 검은색 잉크에 불과했다.


적금을 탄 그날 다시 노트를 펴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각오를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이 기분을 앞으로 계속 느끼기 위해서….


스스로 더 처절하게 가난하게 만들고 아껴 쓰자.

젊어서 거지같이 보이는 것보다, 늙어서 거지처럼 사는 게 더 비참하다.

아빠처럼 힘들게 사는 모습을 내 자식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말자.


이렇게 적고 목돈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다시 적금을 넣을까? 아니면 펀드도 좋다고들 하던데 은행에 가볼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돈을 불리고 싶었다. 더 큰돈으로 우리 가족과 내 삶을 구원해 줄 만큼 위력 있는 돈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몇 날을 생각하다가, 왜 우리 집은 이렇게 아직 가난하고 사는 게 힘든지 생각했다. 아빠가 오랜 시간 동안 백수로 지낸 것도 당연한 원인이지만, 과소비도 안 하고 남들 흔히 가는 국내 여행도 안 하고, 모든 식구가 돈만 벌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반면에 아빠가 지금 일하고 있는 아빠 동료분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다. 어느덧 주유소 3개나 더 인수했고, 돈방석에 앉았다고 엄마는 가끔 부러운 듯 말했다. 분명 같이 시작했고, 석유 냄새가 몸에 배어 아무리 닦아도 뼛속까지 남을 정도로 가난했었는데, 누구는 주유소가 4개나 되고, 자식들은 모두 명문대에 진학해 앞길이 창창하고, 집은 평창동의 궁궐 같은 곳에 살고 있었다. 분명 출발점은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이미 아저씨는 마라톤을 끝내고 국가대표가 되어 연금을 받으며 걱정 없이 남들을 코치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어릴 적 두 분의 만남이 잦을 때, 옆에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한테 빠르게 지금 하는 일을 접자고 말하는 아저씨는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그리고 아저씨는 그 확신에 따라 행동했다. 하지만 아빠는 머물렀다. 그냥 지금이 최고이고 걱정 없다는 듯 무시했다. 주유소를 인수할 때도 아저씨는 무리하면서까지 밀어붙였다고 했다. 앞으로 가구당 자동차 보유가 급격하게 늘어날 거라며, 위치 좋은 곳에 주유소를 차리면 분명 돈을 잘 벌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아저씨 말대로 현실이 됐다.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고 행동했던 대가는 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빠는 아저씨 말을 무시했다. 사실 비웃었다. 가정집 배달이 더 많이 남는다며, 앞으로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다고 자신했다. 아빠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결국 아저씨는 가만히 있어도 자동차가 찾아오는 곳에서 편하게 돈을 벌었고, 살만해지면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차를 사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싸게 팔면 알아서 홍보돼서 자동차들은 줄을 서서 기름을 넣으려고 먼 곳에서까지 왔다. 반대로 아빠는 거래처를 찾아다녔다. 가정집에 전단을 돌리며 겨울 한 철 장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여름이 되면 손가락만 빨았다. 하지만 주유소는 계절을 타지 않았다. 여름에는 놀러 가야 해서 차를 더 탔고, 겨울에는 추우니까 차를 타고 사람들은 돌아다녔다.


내가 최고라는 착각 속에서는 절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배울 수가 없다. 자신이 이룬 작은 성이 모래성인지도 모르고 남들이 뭐라고 하면 불끈하며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린다. 결국 아빠가 쌓아 올린 성은 모래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성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아니, 다 쓸려 내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결국 나중에는 아무도 그곳에 성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단 한 사람, 아빠만 그 성이 위대하고 웅장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그 친구 밑에서, 그것도 주유소 세차장에서 차를 닦으며 일하는 아빠가 비참함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착각 속으로, 과거 속으로 꼭꼭 숨어버리는 것이었다.


눈앞의 피 같은 목돈을 두고 아빠보다는 아저씨를 떠올렸다. 아빠가 구치소에 들어가서 나올 때도 아저씨는 우리를 도와줬다. 내가 먼저 끌려갔다는 소리를 듣고 나중에 나를 불러 위로의 말을 건네며 밥을 사줬다.


“요한아, 너 쿠폰 만들어서 이렇게 된 거 아니니까 죄책감 가지지 마라.”
“네….”


죄책감도 그렇지만, 모든 과정이 솔직히 무서웠다.


“난 그게 기특하더라. 그건 주유소에서나 하는 건데 너는 어떻게든 손님을 늘리고 싶었던 거잖아. 그렇게 살면 된다. 무리해서라도 위협적으로 도전하면서 살면 돼. 뭐라도 해야 뭐라도 얻는다.”
“네, 감사합니다. 아빠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큰일은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마라. 넌 이제 뭐 하려고 하니?”
“군대나 가려고요.”
“어차피 갈 거면 빨리 다녀오는 것도 좋지. 군대에서 배울 게 많을 거야. 아저씨도 많이 배웠지. 이게 완전히 밑바닥을 떠나서 비참한 신분으로 사는 경험을 하게 되거든. 전역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도 생기고….”
“감사합니다.”


그때 국밥을 먹으며 아저씨가 해준 칭찬이 좋았다. 무모한 내 행동도 도전이라고 말해주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4년 동안 군대에서 배운 것이 너무도 많았다. 군대는 내가 한때 미쳐서 했던 게임 속 세계랑 비슷했다.

사회와 다른 세계.

그들만의 언어와 생각이 존재하는 곳.
나 같은 낙오자도 열심히 하면 인정을 받는 곳.
조금만 하면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곳.


누구도 자퇴생이었냐고 묻지도 않았다. 오로지 계급장이 나를 표현하는 전부였다. 그리고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매달 10일이 되면 꼬박꼬박 월급은 통장으로 들어왔다. 가끔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부사관을 무시하는 말투로 이야기하곤 했다. 자기 군 생활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에 선임하사가 놀고먹었다면서 편하고 병사들만 부려 먹는 그런 존재쯤으로 치부해 버렸다. 내가 몸담은 직업을 그렇게 말하면 언제나 감정이 상했다.


눈에 힘을 주고 반박하려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거의 모든 남자들이 거쳐 가는 곳이었고, 자신만의 군 생활을 담고 사는 우리나라에서 군인은 신비로운 직업이 아니었다. 전역을 몇십 년 전에 했건, 모두 자기 군 생활이 가장 위대했고 힘들었다고 했다.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따위는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단지 아쉬운 건 군대에서 놀고먹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살고 싶은 곳에 살지도 못하고, 자기 자신보다 나라 지키는 것을 언제나 1순위로 생각해야 하고,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통제된 생활을 해야 하고, 좁고 좁은 대한민국이지만 여행도 맘대로 가지 못하는…. 그러면서 월급은 200만 원도 못 받는, 명예로우며 자랑스럽기도 하다가 가끔은 버거운 직업이었다.


34년이라는 세월 동안 군인으로 살았는데 초라하게 전역하며 마지막 자리에서 부인과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늙은 나이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대선배들을 보며 생각했다.


‘무엇이 저렇게 서글플까?’


열심히 하면 올라갈 수 있는 그런 탑을 쌓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는 나이와 상관없이 반복된 직책을 하며, 오직 노후와 가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감수하고 희생하는 그런 존재처럼 보였다. 그래서 서글퍼 보였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서글퍼질까 생각하면 우울해지곤 했다.


서울 도심지에서 근무한다는 것 때문에 다른 동기들로부터 많은 부러움을 받았다. 마치 만화 속 한 장면처럼, 훈련 때가 되면 도심 한복판의 좁은 골목길에서 수많은 군용 차량이 쏟아져 나왔다. 훈련장으로 갈 때면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곤 했다. 트럭 뒤에 앉아 찬바람을 맞으며 혹한기 겨울 훈련을 떠나는 그날도 수십 대의 군용 차량이 좁은 골목길에서 끝도 없이 나왔고, 사람들은 우리를 쳐다봤다. 우리는 훈련받은 대로 차량 밖으로 총구를 겨누고 적과 싸우러 가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이동했다. 한참을 가던 중에 갑자기 무전기로 차량을 갓길에 정차시키라는 호출이 들렸다. 그리고 모든 간부는 신속히 집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지금 큰일 났는데…. 민원이 들어왔대….”
“민원 말입니까?”
“어, 버스를 타고 출근하던 사람이 자기한테 총을 겨눴다면서 사과받아야 한다고…. 그래서 총구를 겨눈 군인을 찾아야 해.”


하사라서 어리둥절하던 시절이라 오고 가는 말이 잘 이해가 안 되었다. 당연히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해서 총구를 밖으로 내놓고 이동한 것이고, 군용 트럭이 크다 보니 버스랑 눈높이가 맞은 것뿐인데…. 이게 기분이 나빴다는 건지.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힘들었다.


중대장은 갑자기 전화를 받고 굽신거리며 ‘네, 네’를 반복했다. ‘죄송합니다’와 함께…. 한 소리 듣고 있는 게 뻔했다. 전화를 끊고 빨개진 얼굴로 우리 앞에 와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범인을 찾아서 빨리 사과시켜야 해.”
“범인을 어떻게 찾습니까? 그냥 다 총을 밖으로 뒀는데….” 소대장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걸 모르냐. 근데 훈련해야 할 거 아니야.”


한숨을 쉬며 이리저리 고민하던 중대장은 나를 쳐다봤다.


“요한아, 아니, 고 하사.”
“네, 중대장님.”
“미안한데 그냥 고 하사가 했다고 해주면 안 돼?”


부탁인지 명령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부탁처럼 들리기도 했다. 사과만 하면 되는데, 당시 중대에 하사는 나뿐이고 병사들에게 하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될 것 같고, 장교는 좀 그렇고…. 그런 느낌이었다. 망설였다. 아니, 그 민원인에게 화가 났다.


“아니다. 됐다.”
“아닙니다. 제가 했다고 하겠습니다.”
“어? 진짜? 고마워. 훈련 마치고 내가 삼겹살 사줄게.”


나를 데리러 온다고 나를 두고 트럭들은 훈련장으로 떠났다. 곧 다른 차량이 픽업 왔고, 나는 중년의 남성분을 만나 죄송하다고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그분은 내가 자기를 보고 총을 겨누고 쳐다보면서 방아쇠를 당겼다고 했다. 소설 같은 그 말에 한숨만 나왔지만, 그냥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이런 일은 반복되었다. 군용 트럭을 몰고 시내로 나가면 걸리적거린다고 기사 분들은 성질을 내면서 우리를 앞질렀다. 그리고 병사들과 아침에 뜀걸음을 하면 동네가 시끄럽다고 민원이 들어왔다. 이후에 군가도 못 부르고, 묵언수행을 하듯 조용히 달리기만 했다. 나라를 지키는데 사람들은 우리를, 아니 군인을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총을 들고 있지만 가장 약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반면 같은 제복을 입은 경찰관을 보면 움찔하거나, 과속딱지라도 받을까 봐 사람들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결국 피해를 줄 힘이 있어야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군인이 좋았다. 아니 부사관이 좋았다. 특히 내 선배나 또래들은 모두 힘들게 살다가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동지를 만난 것처럼. 그것도 그럴 것이, 2003년도의 병사 생활에는 부조리가 엄청났다. 축구를 못한다고 괴롭힘 당하고, 목욕하다가 얻어맞기도 했다. 훈련 때는 햄버거 10개를 먹으라고 고문을 당하고 그랬다. 하지만 군대에 더 남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나처럼 군대보다 밖이 더 지옥 같다고 느낀 이들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마지막 희망을 찾아 선택을 한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자유와 젊음을 나라에 바쳐서라도, 미래에 자기 가족들에게는 고된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군인도 공무원이기 때문에 ‘신분’이 주는 안정감은 마치 우물은 우물인데 절대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느껴졌다. 우물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만 안 하면, 어둡고 조금은 습해도 평생 물이 마르지 않는 그런 안전한 우물이었다. 목돈을 두고 며칠 밤을 고민하다가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우리 빌라 보증금 얼마예요?”
“이게 전세였거든…. 5천만 원. 근데 보증금을 못 올려줘서 지금은 5천에 월 20만 원이야.”
“그래요? 알았어요.”


쉰 살이 넘도록 겨우 5천만 원 보증금이 전 재산인 게 부모님이었다. 아니, 아빠 빚도 있으니 보증금으로 그걸 갚으면 평생 열심히 산 우리 부모님은 가진 건 하나도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 돈을 모두 집에 줄까? 고민하고 고민했지만,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아무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부대 근처 부동산으로 향했다. 나도 모르게 움직인 발걸음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물건을 파는 곳으로 가서 확인하면 된다. 라면이 필요하면 슈퍼에 가듯이. 노트에 적어둔, 내가 가장 갖고 싶은 ‘집’이라는 것을 갖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부동산으로 향했다.



9.png



keyword
월, 수, 일 연재
이전 09화8. 첫 월급, 정규직의 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