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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썩은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

한강에서 다짐한 약속

by 고용환

반장님과 술자리를 가진 이후 나는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쪽팔림도 무시하고 이 부동산, 저 부동산 틈만 나면 찾아갔다. 능청스럽게 거짓말 실력도 함께 늘어갔다. 부동산 사장님들도 집을 보여주려면 확실한 동기가 있는 사람에게 투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건은 있지만 그냥 떠보는 사람에게 약속을 잡고 자기 시간까지 투자하는 건 당연히 낭비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묻지 않아도 소파나 의자에 먼저 앉았다. 그리고 옷도 단정하게 입었다. 집을 보러 온 사람이 누추하게 입고 다니면 그만큼 관심받기 힘들었다. 거짓말은 신혼집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곧 결혼한다고 하면서 자본금 액수를 정확히 말하면 매물 브리핑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 곳, 두 곳 발품을 팔면서 집을 볼 수 있었다.


남의 집을 본다는 것이 이처럼 고된 노동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인 줄 미처 몰랐다. 하지만 집이라는 공간은 누구에게나 안식처이고, 아무리 밖에서 화려한 척해도 사람들은 집에 가면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자기 모습을 담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런 공간을 본다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당연히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직장 근처를 시작으로 집을 보는 범위도 점점 넓혀갔다. 나중에는 그냥 집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졌다.


주로 빌라 매물을 보러 다녔다. 평생 단칸방과 빌라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아파트는 그 자체가 넘사벽이었다. 왠지 내가 모은 돈으로는 둘러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것처럼 하늘 높아 보였다.

이렇게 부동산을 돌고 돌다 보니 아주 친절한 중개사 아주머니를 만나는 기회도 얻었다. 젊은 친구가 이렇게 발품 팔아 결혼 준비한다고 기특하다고 했다. 부동산 사장님한테 듣는 칭찬도 정말 꿀맛 같았다. 몇 번을 만나 매물을 보다가 자연히 사장님과 친해지게 되었다. 사장님은 어떤 집을 원하는지 계속 물으며, 군인은 공무원이라 대출도 잘 나올 테니 은행부터 가서 상담받고 계획을 세우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반장님도, 사장님들도 내가 집 이야기를 꺼내면 동시에 은행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2008년 이후 금리는 저금리로 흘러갈 거라면서 지금 준비해 대출로 집을 사면 분명 나중에 좋을 거라고 했다. 솔직히 당장 집을 살 용기가 없어서 집만 보러 다녔는데 그런 말을 계속 들으니 과감히 집을 사도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사장님은 아파트를 사면 은행에서 대출을 더 많이 해준다고 말해주었다.

아파트는 너무 비싸서 불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사장님은 대한민국은 아파트라면서 나를 설득하기 위해 신이 나서 설명해 주었다.


이왕 살게 된다면 아파트가 좋다는 건 나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내 기억 속의 빌라는 불편함 그 자체였다. 특히나 부모님이 사는 빌라는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언덕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집이 있었고, 주변은 항상 더러웠다. 특히 여름이 되면 온 동네 쓰레기가 우리 집 앞 전봇대에 쌓였다. 나무로 된 창문은 닫아도 냄새가 집안으로 한없이 들어왔다. 집에 들어와도 쓰레기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았다.


엄지손가락보다 더 큰 바퀴벌레는 마치 우리 집이 자기 집 안방인 마냥 날아서 찢어진 방충망 사이로 완벽한 비행을 해 착지하곤 했다. 그럴 때면 비위가 약한 동생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고함과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로 도망가곤 했다. 징그러운 더듬이와 묘하게 윤기 나는 검갈색 등껍질을 보면 건들기도 싫었지만 나는 동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침입자를 휴지로 눌러 잡아야만 했다. 더 싫었던 것은 맨날 주차 때문에 싸우는 동네 사람들이었다. 주차 공간이 없어서 맨날 집 앞에서 네 땅이냐 내 땅이냐 하며 언성을 높여 목청 터지라 싸웠다.

그런데 빌라를 사겠다고 돌아다니는 나를 보며 참 가난의 학습이란 무섭다고 생각했다.


평생 살아본 게 빌라뿐이라 찾는 매물도 빌라였다. 살면서 경제적인 것에 대해 알려줄 만큼 부모님도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게 그저 삶의 전부인 부모님께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조차 에너지 낭비였다. 그저 피곤한 육체가 누울 공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부모님에게 집은 그저 그런 공간이었다.

집이라는 가장 따뜻하고 화목하며 온기와 추억으로 가득해야 할 공간은 생체 리듬과 수면을 위한 한정된 장소로 우리 가족에게 사용됐다. 거의 반년 동안 빌라만 90채 이상 봤다. 나중에는 빌라도 입지에 따라 가격이 다르고 대지 지분에 따라 미래 투자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결국 빌라도 한정된 땅 위에 지어진 건물이니 땅이라는 가치가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이치를 깨닫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먼 미래에 영화처럼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집을 지을 수 없는 한, 바다를 모두 만들 수 없는 한, 땅은 매우 한정된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발바닥이 불이 나게 돌아다닌 수업료를 내고 알게 되었다.


2009년이 되고 놀라울 만한 물건이 이 세상에 등장했다. 바로 스마트폰이었다. 군인에게 마치 자유를 허락해 준 것만 같은 마법과도 같은 스마트폰 덕분에 신문 읽기도, 임장도 더 수월해졌다. 특성상 인터넷은 퇴근 후에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손 안의 작은 스마트폰으로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너무 비싸서 사기를 머뭇거렸지만, 시대에 뒤처지기 싫어 과감히 구매했다.


군대는 비상이 났다. 카메라에 인터넷도 되는 물건이 내부로 들어오자 이런저런 대책을 세우고 통제하려고 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폐쇄적인 조직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덕분에 경제 용어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네이버에 검색해 가며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을 수 있었다.


2008년 이후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늘어나면서 직업군인의 인기도 함께 높아졌다. 지원율이 높아졌다는 소문과 함께 매달 하사들이 부대로 전입을 왔다. 이렇게 간부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인권’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통제된 생활을 하는 어린 직업군인들은 돈이 있어도 자동차를 마음대로 사지 못했다. 나이가 어려도 결혼하면 승인을 해줬지만, 보통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내 돈으로 차를 사서 타는 것을 막는 것은 인권침해라는 인식이 퍼져갔다. 세상이 변하니 조직도 변했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미혼 간부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차를 사기 시작했다. 새 차를 뽑은 사람들은 매일같이 차를 닦고 또 닦았다. 가끔 얻어 타면 부럽기도 했다. 아니, 너무 편했다. 어디든 원하면 잠시 다녀올 수 있는 그 편안함과, 한 평도 안 되는 완벽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공간은 떨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사람들은 차를 살 때 새 차를 선호했다. 2천만 원이 넘는 차를 할부로 결제하고 휴가 복귀할 때 떡하니 몰고 왔다. 후배들에게 모아둔 돈이 있냐고 물으면 거의 없었다.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인사과 업무 중 하나가 차량 현황 유지였기에 누구보다 빠삭하게 누가 어떤 차를 몰고 다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몇 개월을 버티다가 결국 업무상, 그리고 좀 더 편하게 부모님 댁에 다녀오기 위해, 더 많은 곳으로 빠르게 임장 하기 위해 차를 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힘들게 모은 4천만 원으로 차를 산다는 건 미친 듯이 아까웠다.


사는 순간부터 가치가 떨어져서 나중에는 똥값이 되는 자동차에 처절하게 모은 종잣돈을 쓰는 건 내게 자살행위처럼 느껴졌다.


아빠도 15년이 넘은 차를 아직도 몰고 다니는데 잘만 굴러갔다. 물론 손재주가 있어서 정비를 잘한 것도 있지만, 겉보기엔 조금 초라해도 달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무리 비싼 차도 바퀴는 둥글고 똑같은 도로를 달리는데, 굳이 비싼 차를 살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중고차로 눈을 돌렸다.


주변 선배들은 “중고차 잘못 사면 수리비가 새 차값 나온다”며 궁상떨지 말고 새 차를 사라고 잔소리했다. 하지만 나는 차를 사는 데 300만 원 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결국 연식과 상태를 따져서 내가 가진 예산 안에서 좋은 차를 찾기 위해 몸이 고생하는 길을 택했다. 바로 ‘자동이 아닌 수동차’를 사는 것이었다.

한참 전에 인기가 있었던 구형 아반떼 스틱을 샀다. 2000년식 아반떼 수동을 타고 출근하니 선배들이 혀를 차며 놀렸다.


“야, 무슨 구석기시대냐? 누가 요즘 스틱을 몰아?”

“아, 제가 딴 건 몰라도 운전은 좀 합니다. 하하.”


택배 일을 하며 지겹게 스틱 운전을 했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남들이 한 팔과 한 발로 운전하는 편리함을 택할 때, 나는 양손과 양발을 써야 했지만 그 대가로 기름값도 아끼고, 싸게 차를 살 수 있었다. 운전하면서 그 정도 노동은 대수롭지 않았다. 절약과 합리적인 소비를 위해서라면 몸이 조금 불편해도 괜찮았다.

내게 차는 그저 이동 수단일 뿐이었다. 만약 옛날처럼 말을 타고 다녔다면 아마도 좋은 말, 건강한 말, 품종 좋은 말을 비싼 돈 주고 샀을 것이다. 말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돈을 아낀다고 늙고 병든 말을 사면 얼마 달리지도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동차는 쇳덩어리 기계였다. 관리만 잘하면 오래 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무리 비싼 새 차를 사더라도 아스팔트를 한 번 구르면 그 순간부터 가치가 떨어지는 게 싫었다.


가치를 잃는 것들과 손절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재테크이자 투자였다. 마치 옆에 있기만 해도 짜증 나고 불편하기만 한 사람들과 과감히 손절하는 것처럼, 돈에 대해서도 그렇게 냉정해졌다.

주변 선후배들과 친구들은 겉모습에 신경을 많이 썼다. 보이는 것에 미칠 듯이 민감했다. 좋은 시계, 비싼 차, 브랜드 옷을 걸치며 마치 초라한 현실을 감추려는 듯 자신을 포장했다. 그렇게 겉을 꾸미면 정말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했다. 하지만 나는 자퇴하고 세상에 치이며 살아오면서 껍데기 같은 포장은 이미 포기했다. 아무리 치장해도 내면이 썩으면 결국 다가설수록 냄새가 나기 마련이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무리 숨겨도 결국 드러나게 돼 있었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초라해 보여도 썩은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
없어 보여도 왠지 무시하기 힘든 사람.
척하지 않아도 진짜를 가진 사람이 되자.


그렇게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걸며 중고차를 몰고 주말에 밖으로 나왔다. 신분상 휴가를 내지 않으면 갈 수 있는 지역이 한정되어 있었지만, 이동 수단이 생기니 시간은 절약됐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나도 모르게 한강으로 향했다. 그냥 가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달렸다.


올림픽대로를 내 차로 달리니 마음이 뻥 뚫리는 듯 시원했다. 그러다 택배 트럭이 빙글빙글 돌았던 지점을 지나쳤다. 벌써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죽을 뻔했던 기억, 희망도 없이 미친 듯이 일만 하던 19살의 초라한 내 모습이 떠올랐다.


군대라는 안전한 우물 속으로 숨긴 듯했지만, 이런 기억이 떠오를 때면 두려웠다. 다시는 우물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전문대도 졸업했고, 학사 졸업을 위해 사이버대학교도 다니고 있었다. 매달 160만 원씩 꼬박꼬박 통장에 찍히는 지금의 삶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주변에서 군 생활이 답답하고 짜증 난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면 나도 모르게 충고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했다. 잔잔한 물이 고여 있는 우물은 답답해도 죽지 않는다. 우물 밖을 나가면 그 순간부터 스스로 물을 찾아다녀야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쉽게 여겼다. 준비 없이 밖으로 나갔다가 우물을 못 찾으면 바로 죽음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항상 입을 다물었다. 그런 불평불만에 가장 좋은 처방은 ‘직접 경험’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말해도 들리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대신 가끔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손가락질받는 서러움을 경험하더라도,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우리는 그런 욕조차 감사히 들어야 한다는 선배의 말을 되새겼다.

양화대교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랜만에 한강을 따라 달렸다. 길을 따라 천천히 뛰었다. 양옆으로 아파트 단지가 펼쳐졌다. 미친 듯이 비싼 아파트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격. 언제나 궁금했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했다.


한강만 보이면 이렇게 비싸도 되는 걸까? 저 사람들은 한강을 보기 위해 발코니에서 잠을 자나? 한강을 보면 돈이 생기나? 이런저런 잡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떠올랐다.

주유소를 하는 아빠의 친구, 아니 지금은 아빠의 사장님. 그분의 딸이 결혼해서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어릴 때 계곡도 가고, 바다도 같이 갔었는데…. 물론 지금은 얼굴도 기억 안 나지만, 부모 덕분에 그 친구는 이미 인생의 결승선을 여유롭게 통과한 듯했다.


아직도 나는 정신없이 달리고 있고, 끝이 보이지도 않는데….


점점 속도를 올려 달렸다. 정신없이 달리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런 기분이 좋았다. 잊고 싶을 때, 힘들 때마다 달렸다. 누가 대신 달려줄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달리기처럼 처절한 혼자만의 경주였다. 조금 늦게 출발해도, 속도가 느려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 있다면 언젠가 결승선에 도착하리라 믿었다. 멈추지 않기 위해 달렸다.


한강을 한참을 달리니 숨이 차올랐다. 벤치에 몸을 기대고 잔잔하고 속을 알 수 없는 강을 바라보니 아빠 얼굴이 떠올랐다. 전화번호부에서 아빠를 찾아 눌렀다.


“어, 왜? 아빠 바빠….”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바쁘다고 하셨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예전에 훔쳐봤던 아빠의 일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에요. 그냥 걸었어요. 바빠요? 나중에 통화해요.”
“그래, 끊자. 바쁘다.”


아빠는 여전히 서운한 듯했다. 정규직 됐다고 문자 보낸 날도 답장이 없었다. 사실 아빠와는 친하다고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잠시 첨가제 장사를 함께하던 시절 말고는, 머리 크고 나서 함께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백수로 지냈을 때도 아빠는 항상 바빠 보였다.


아빠가 한가하면 차도 샀으니 잠시 얼굴이나 보려 했는데, 아들 다음으로 미루고 다시 차에 올랐다. 너무 편했다. 이런 편안함에 중독되면 안 되는데 걱정됐다.


살 때 세금, 찻값, 보험, 기름값까지—자동차는 정말 무시무시한 돈 먹는 기계였다. 만약 새 차를 샀다면 매달 이자까지 내야 했을 것이다. 젊어서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타면, 그것만큼 가난해지는 지름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강을 벗어나 조용히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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