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공식
26살, 검게 탄 피부와 누추한 옷차림으로 토요일 주말 근처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원에 들어가면 느껴지는 싸한 느낌은 아니지만, 왠지 모를 부동산만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책상 뒤에서 흰머리를 한 사장님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망설이며 어색하게 서서 고개를 숙이고 땅만 바라봤다. 그때 사장님이 나를 보며 말을 건넸다.
“뭐? 필요하셔?”
“아…. 저….”
수십 명 앞에서 통제하고 큰 목소리로 매일 말하던 군인의 용맹함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뭐 필요하냐고….”
사장님의 목소리 톤이 순간 달라졌다. ‘그냥 나갈까?’ 고민하는 동안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왕 왔으니 그냥 말이나 던지자.’ 용기를 내서 겨우 한 문장을 만들어 입 밖으로 꺼냈다.
“집을 사고 싶어… 서요….”
“집??? 젊은데? 전세??? 뭐 결혼해요?”
“아….”
“앉아봐.”
사장님 말이 갑자기 짧아졌다. 군대에서도 나이를 떠나 계급 높은 어린 사람들에게 듣던 반말이라 괜찮았지만, 왠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뭘 사려고?”
“집이요. 혹시 제가 지금 4천만 원이 있는데….”
“아…. 그래요?”
목돈이 있다고 말하니 사장님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러다 한마디를 던졌다.
“그 돈으로 여기 빌라 투룸 정도는 대출받으면 가능할 텐데…. 어떤 일 해요?”
“아, 저 군인이에요.”
“아…. 군인? 장교??”
“부사관이요.”
“어. 그럼 대출 좀 받아서 사면되겠네요. 결혼해요? 아니 근데 군인은 집 나오잖아?”
“결혼은 아닌데 그냥 사고 싶어서요….”
“집은 그냥 막사는 게 아니지….”
‘그냥’이라는 말에 사장님은 김 빠진 콜라를 마신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나중에 와요. 뭐 나중에 더 알아보고 오시던지….”
“아…. 네….”
왠지 쫓겨난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면서 ‘내가 뭘 잘못했지? 왜 집을 안 보여주지? 돈도 있는데…. 내가 옷을 거지같이 입고 가서 그런가? 결혼해야만 집을 보여주나?’ 별의별 생각을 다 했지만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부동산은 집 보여주는 곳 아닌가? 이건 내 착각인 것만 같았다.
처음 들어간 부동산에서 이런 대접을 받으니 갑자기 용기가 떨어졌다. 뉴스에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리와 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동산 사장님에게 한방 심하게 맞고 나서 나는 돈을 주고 경제신문을 구독하기로 마음먹었다. 벙어리가 된 건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고 무식해서 그런 것만 같았다. 결국 무엇이든 자신감은 얼마나 알고 있는지, 경험치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인사과로 보직을 받고 한동안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힘들었다. 업무가 완전히 달랐다. 컴퓨터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고, 중요한 전파사항을 전달하고, 결과를 종합해서 상급 부대에 보고하며, 현황을 유지하고 관리해야 했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업무의 연속이었다. 처음 보고서를 들고 대대장실에 보고하러 갔을 때, 인자해 보이던 대대장은 파란색 플러스펜으로 보고서에 줄을 그어가며 끝도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 하사, 너 맞춤법이 이게 뭐냐?”
툭 던진 그 말은 내 심장에 그대로 박혀버렸다. 안 그래도 학력 콤플렉스가 있던 내게 그 말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처참히 무너뜨렸다.
“죄송합니다….”
난도질당한 보고서 3장을 들고 뒷걸음으로 문까지 가서 “충성, 돌아가 보겠습니다.”라고 외치고 문을 나오자마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냥 서러웠다. 사실 중학교 입학 전까지 나는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 일하느라 바쁜 부모님은 내게 관심을 가질 시간도 없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글을 읽겠지?라고 생각하셨지만,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글이 읽히지는 않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책을 읽으라고 지목할까 봐 언제나 두려웠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쪽팔렸다. 알림장도 매일 다 받아쓰지 못한 채 하교했다. 글을 못 읽으니 칠판의 모음과 자음을 하나씩 보며 적었다. 언제나 반절도 적지 못했는데 칠판의 흰색 글자는 사라지고 짙은 파란색 배경만 남아 있었다.
5학년 때 선생님 호출로 엄마는 내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른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나는 책을 읽으라고 지목당해 자존심이 상해 교실에서 울어버렸다. 덩치는 산만한 놈이 질질 짜고 있으니 친구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당연했다. 결국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절박한 마음에 엄마랑 아빠 밑에서 일하는 형들을 쫓아다니며 속성으로 한글을 배웠다.
겨우 한글을 배우고 중학교에 간 나는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신기해 매일 책을 보고, 매일같이 시험 기간인 듯 공부했다. 하지만 수학과 영어가 발목을 잡아 언제나 평균은 70점 근처를 맴돌았다.
그런 내게 “맞춤법이 이게 뭐냐”는 말은 치명적인 한 방이었다. 그 후 나는 상급 부대 보고서는 모두 출력해 따라 만들었다. 결재받으러 들어갈 때면 주변 사람들에게 읽어봐 달라고 부탁하고, 전자사전도 검색해 가면서 오탈자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라도 한 가닥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니 “보고서 좋아졌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내게 쉬운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집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안타까운 것은 내가 몸담고 있던 일터의 사람들은 재테크에 큰 관심이 없었다. 자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물어볼 텐데, 대부분은 관사에 살고 있었다. 사석에서 집을 사고 싶다는 말을 꺼내면 ‘병신’이라면서 대놓고 말하는 선배도 있었다.
아침마다 오는 신문을 들고 일찍 출근해 그냥 읽었다. 분명 한글인데도 이해가 잘 안 되고 졸음이 몰려왔다. 그래도 매일같이 제목이라도 읽고, 모르는 단어는 노트에 적어 두었다가 주말에 몰아서 찾아보곤 했다. 다음에 부동산에 가면 멍청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 말이라도 똑바로 하려면 이런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누군가 인사과 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왔다. 탄약반장님이었다. 소문이 무성한 원사. 항상 빳빳하게 칼줄이 잡힌 얼룩무늬 전투복과 단정한 머리를 한 대선배였다. 무엇보다 회의 시간에 할 말 다 해서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말수가 적고 무서워서 다가가기 힘든, 29년 차 군인이었다.
“고 중사, 나 휴가 가야 해. 청원 휴가.”
“네, 공문 만들겠습니다.”
“사유가…?”
“어. 누가 좀 아파.”
결재받기 위해 공문을 만들고 있는데, 내가 낙서해 둔 경제신문을 반장님이 만지작거렸다. 낙서한 흔적과 신문이 마음에 걸려서 공문 작성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일 안 하고 딴짓한다고 꼭 한 소리 들을 것 같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반장님이 입을 열었다.
“요한아.”
“넵!”
“이거 뭐냐? 경제신문?”
“아…. 제가 구독해서 읽고 있는데….”
“구독해서 읽고 있다고? 너 돈 주고?”
이다음에 나올 말은 뻔했다. ‘미친놈’, ‘일이나 해’, ‘신문 볼 여유 있냐?’ 같은 소리를 기다리며 손가락에 힘을 줘 키보드를 꾹꾹 눌렀다. 그런데 반응이 의외였다.
“기특하네…. 하하.”
“잘 못 들었습니다.”
분명히 들었는데 습관처럼 튀어나왔다. 직업병은 어쩔 수 없었다.
“잘하고 있다고…. 나 휴가 다녀오면 밥 한 끼 하자.”
순간 누가 내 머리를 때린 것처럼 멍해졌다. 항상 칼같이 퇴근하고 자기 일만 딱 하는 분이었는데, 밥을 먹자고 하니 영광스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거절할 수도 없고, 그러면서 기대되는 오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 한마디에 나는 집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반려동물처럼, 반장님의 휴가 복귀만 애타게 기다렸다.
“고 중사, 오늘 시간 되냐?”
반장님은 휴가 복귀 날 정말 내게 먼저 문자를 보내 주셨다.
“네! 어디로 가면 됩니까?”
거지 같은 옷을 입고 나가기 그래서 숙소를 뒤지고 뒤져서 나름 사람다운 옷을 걸쳐 입고, 찍어 준 주소로 향했다. 관사에 안 살고 일산에 사는 건 알고 있었는데, 장소는 일산이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호수공원 주택가 사이에 있는 낡은 막창집이었다.
“충성!”
“야야…. 밖에서 쪽팔리게 먼 길 왔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허름해 보여도 최고의 맛집이라고 하시며 먹어보라고 했다. 4층 연립주택 1층 상가에 있는 식당은 사람들로 붐볐다. 얼마나 단골인지,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반장님께 친근하게 반말을 했다. 막창 맛은 기가 막혔다. ‘맛집이구나’ 싶었다. 그날 반장님은 나한테 그냥 소주 한 잔 사주고 싶었다고 했다. 억지로 인사과 끌려와 맨날 야근하고 대신 욕까지 먹으며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고 하면서….
소주가 들어갈수록 묵직했던 반장님의 입에서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군복을 벗고 밖에서 보니 정말 평범한 아저씨였다.
“돈은 많이 모았냐?”
“아…. 나름 모았습니다. 한 4천만 원 조금 넘게 모았습니다.”
“너 몇 년 차지?”
“5년 차입니다.”
“4년 좀 넘었네. 많이 모았네. 잘했다.”
잘했다는 한마디에 몸이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 주는 이 기분은 마치 마약과도 같았다. 중독된다. 그리고 또 듣고 싶어진다. 마치 인정받고 싶어서 태어난 것처럼….
“그 돈으로 뭐 하려고?”
“아…. 그게….”
순간 망설였다. 집을 산다고 하면 미친놈 소리를 들을까 봐 무서웠다. 그래도 술기운에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집을 사려고 합니다.”
잠시 적막이 흐르더니, 반장님은 소주를 잔에 따르고 홀짝 마셨다. 그리고 갑자기 빛나는 눈빛으로 나를 몇 초간 바라보셨다.
“집? 왜?”
“아, 그게….”
나는 줄줄이 살아온 인생을 20분에 걸쳐 속사포처럼 압축해 말씀드렸다. 말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끊지 않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끝까지 들어주셨다.
“이 자식도 인생극장 9부작이었구먼. 하긴, 생긴 게 오냐오냐 자란 애 같진 않았어.”
“아닙니다. 다들 힘들게 시작하신 분들이 많아서, 될 수 있으면 이런 이야기 안 하려고 했습니다.”
“뭐 그렇지. 우리가….”
끝말이 씁쓸했다. 미친 척하고 부동산 갔던 이야기도 했다. 반장님은 내 말을 듣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으셨다. 순간 쪽팔렸지만 그래도 웃으시니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잘했네. 하하. 근데 요한아, 집은 네 돈으로 사는 게 아니야. 은행 돈으로 사는 거지.”
“네?”
“대출 상담은 받아봤냐? 아니 그전에, 어떤 집을 사고 싶은데?”
“그냥 나중에 결혼해서 쫓겨나지 않고 집주인한테 구박 안 받을 조그만 집이면 됩니다. 물론 집이 서울에 있으면 더 좋고요.”
“왜 꼭 서울인데?”
“제가 생긴 건 이래도 고향이 서울이라,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친척 형이 해준 말인데… 서울은 특별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친척 형? 특별한 사람? 왜?”
“서울특별시….라고….”
또 한 번, 반장님은 크게 웃으셨다.
“너 일벌레인 줄 알았는데…. 이놈도 웃긴 소리 할 줄 아네.”
시간이 훌쩍 흘러 가게는 마감 분위기였다. 그런데 우리 테이블에만 메뉴에도 없는 서비스가 나왔다. 단골이라서 주는 건가 했는데, 홀 안쪽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다정한 눈빛으로 반장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오늘 많이 웃네. 반가워요. 바빠서 이제야 제대로 인사드리네요. 이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했죠?”
“네. 처음 뵙겠습니다.”
“어, 내 가족이야.”
순간, 술이 싹 깼다. 반장님은 이 가게가 있는 주택 4층에 산다고 했다. 그리고 이 건물 전체가 자기 소유라고 했다. 30년 전,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고 월급 몇 만 원을 아끼고 또 아껴 일산 땅을 샀다고 했다. 1기 신도시 개발이 되면서 큰 보상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시작해 지금은 이 건물과 땅, 강남의 집까지 갖게 되었다고 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생 이야기를 듣자 반장님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군대에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회의 시간에 천하무적처럼 보이던 대대장에게도 꼬박꼬박 할 말 하던 배짱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돈이 많은데 왜 군 생활을 계속하는지 궁금했다. 결국 술기운에 물어보았다.
“반장님, 죄송하지만…. 그럼 군 생활 안 하셔도 충분히 되잖아요.”
“어?? 맞아. 솔직히 아내 장사도 잘되고…. 근데 너 아냐? 1년에 연금이 십만 원 정도 늘잖아.”
“네…. 20년 지나면 그 정도 늘어난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고작 십만 원을 이야기하는 게 앞뒤가 안 맞아 보였다. 그런데 의문이 풀릴 정도로 쉽게 설명해 주셨다.
“너 은행에 돈 넣고 매달 100만 원씩 받으려면 얼마 넣어야 하는지 계산해 봤냐?”
“어…. 그 금리….”
유식한 척해보려 했지만 금세 들통났다.
“쉽게 말해, 5억 넣고 연 3% 이자로 계산하면 1,500만 원이야. 매달 125만 원씩 받는 셈이지.”
그렇게 들으니 실감이 났다.
“그럼 죽을 때까지 나오는 연금은 정말 대단한 거네요.”
“그렇지. 1년 복무할 때마다 4천만 원씩 은행에 평생 저축되는 거라 생각하면 돼. 요즘처럼 저금리 시대엔 오히려 더 이익이지.”
정말 명쾌한 설명이었다. 지금까지 월급이나 연금을 그렇게 계산해 본 적이 없었다. 반장님 말을 들으니 내가 받는 월급도 엄청나게 느껴졌다. 결국 노동으로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것 자체가 온몸으로 투자하는 것과 같았다.
군대 사람들끼리 모이면 훈련, 뒷말, 진급, 보직 같은 내부 이야기만 가득했다. 사회와는 전혀 관계없는 세계였다. 그런데 반장님과 이야기하면서 처음으로, ‘밖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사는구나’라는 걸 느꼈다.
반장님은 실컷 이야기하다가 혀가 꼬이더니 결국 4층으로 끌려가셨다. 형수님은 택시비라며 돈을 쥐여주며 따뜻하게 배웅해 주셨다.
두 분 모두 여유가 있어 보였다. 부대 앞 관사에 사는 보통 군인들과는 달랐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면서, 반장님과 나눈 이야기를 곱씹었다.
결국 부자가 되려면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오르는 한정된 것을 소유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그 한정된 것 중 하나가 땅, 그 위에 지어지는 집이었다. 저금리 시대에는 싸게 돈을 빌려 그런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게 곧 부자의 공식이었다.
돈 주고도 못 배울 것을, 맛있는 곱창과 함께 배웠으니 이보다 고마울 수 없었다.
‘나도 반장님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내 돈도 그런 곳에 과감히 던져보자.’
그날 밤, 마음속에 강한 의지가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