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빛은 늦게 도착한다.
집으로 돌아와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노트를 펼쳤다.
눈에 들어오는, 수백 번 적어 둔 두 글자를 바라봤다.
‘내 집’
아직도 월세를 내며 집주인 눈치를 보며 사는 부모님, 그리고 지금은 집에 없지만 형이 가끔 집에 가면 방이 없다고 눈치 주던 동생이 떠올랐다. 동생은 스무 살이 되던 해 바로 군대에 입대했다. 아니, 내가 강제로 군대에 넣었다. 다섯 살 차이 나는 동생은 부모님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거의 방치였다. 내가 챙기려고 했지만 자퇴하고 일하느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결국 동생은 공고를 갔다. 아빠는 동생이 공고를 간다고 해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릴 수도 없었다. 인문계에 갈 수 있는 성적이 아니었으니까.
큰 문제없이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아무 의미 없이 게임만 하는 꼴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묻지도 않고 특기병을 지원했다. 스무 살이 되는 해 2월 영장이 나왔고, 정신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영장이 나온 것도 동생에게 말하지 못해 입대를 열흘 앞두고서야 겨우 말해줬다. 그렇게 동생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훈련소의 큰 문을 통과했다.
바쁘다며 아빠는 동생 입대하는 날 함께 가지 않았다. 엄마를 모시고 서울에서 논산으로 내려가는데 시간 계산을 잘못해 밥도 못 먹이고 들여보냈다. 그날 서울로 올라오면서 뭐가 그렇게 미안하고 서러웠는지, 나는 계속 울며 운전대를 잡았다. 맨날 출근하던 군대로 동생이 입대한 것뿐인데 밥도 못 먹이고, 준비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동생은 내가 고생하는 걸 보며 아빠보다 내 말을 더 잘 들었다. 아니, 내게 더 많이 의지했다. 그렇게 스물두 살에 빠른 전역을 했고, 나는 동생에게 간호조무사 문제집을 건넸다.
“이게 뭐야?”
“이거, 간호조무사 책.”
“뭐 어쩌라고?”
“형이 학원비 줄 테니까 한 번 다녀봐. 남자 의료 인력이 나중에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 시험도 어렵지 않다던데….”
무심한 표정을 지었지만 동생은 말없이 학원을 알아보고 다니기 시작했다.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자격증을 취득했다. 다행히 병원에 바로 취직해서 적은 돈이지만 월급을 받으며 스물두 살부터 직장인이 되었다. 사실 간호조무사를 권한 진짜 이유는 동생도 부사관을 했으면 해서였다. 안전하고 튼튼한 ‘우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의무병과로 지원시키려 했다. 그런데 군 생활이 5년 차에 접어들면서 그 우물에 답답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차마 동생에게 직업군인을 해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노트를 끄적이다 술기운에 동생이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다.
“뭐 해?”
“일.”
“주말에?”
“어. 바빠. 왜, 형?”
“아니야. 별일 없지?”
“어. 나중에 전화할게.”
스물두 살 나이에 남들은 대학 다니며 포근한 부모 품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비바람을 피하는데, 이놈도 나처럼 우산 하나 없이 밖에 나가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었다. 온몸이 젖어 춥고, 체온이 점점 떨어져 부들부들 떨릴 텐데 힘들다는 내색도 없었다. 그래서 가슴이 더 아팠다. 동생을 생각하면 누군가 송곳으로 내 가슴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동생이 일을 시작한 뒤로 나는 틈만 나면 문자를 보냈다.
“월급의 50% 이상은 무조건 저축해. 그 돈은 처음부터 없던 돈이라고 생각해.”
이런 꼰대 같은 말을 늘어놓으니 동생은 가끔 짜증 난다는 듯 짧게 답장했다.
“ㅇㅇ”
성의 없는 답변에도 묵묵히 일하는 동생이 장했다. 이렇게 동생까지 일하면서 우리 네 식구는 모두 직장인이 되었다. 내 친구들은 아직도 엄마에게 용돈을 받으며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 나와 동생은 부모라는 보호막에서 벗어나 오히려 부모님께 보호막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사는 건 정말 만만치 않았다. 특히 제대로 사는 건 더 어려웠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물, 산소, 빛, 음식, 옷, 그리고 돈. 모두에게 똑같지만 처음부터 배당량이 다른 이 불편한 현실이 늘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열일곱 살부터 일만 하다 보니 ‘하고 싶은 걸 접는 데’ 선수처럼 익숙해졌다. 그래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니 저축도 하고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돈을 많이 버는 능력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빨리 벌어 시간을 앞당기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결국 남들이 돈을 소비할 때, 나는 단돈 90만 원이라도 받으며 매달 저축했다.
물론 공부한 놈들이 나중에 한 방에 역전하면 가슴에 지진이 난 것처럼 무너지겠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돈은 내게 생명수나 산소처럼 여겨졌다. 이 점을 동생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출발선이 애초부터 보이지도 않는 뒤쪽에 자리 잡은 우리 같은 인생이 그나마 완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천천히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계속 달려 끝내 완주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단지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좋은 코치도 좋은 운동화도 영양가 높은 음식도 기대할 수 없어서 절대 다치면 안 되고, 여유를 부리며 쉬어도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가끔 만나면 그걸 꼭 가르쳤다.
그날 술자리에서 박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멍청아, 왜 은행에 저당 잡혀서 은행 좋은 일만 하려고 하냐? 결혼하면 나라에서 집도 주고 하는데, 월급 일부를 매달 은행 부자 만드는 데 쓰냐고! 네가 안 도와줘도 걔들은 이미 부자야. 사기꾼들이지.”
선배는 은행을 사기꾼이라고 했다. 가만히 앉아 남에게 돈을 빌려주고, 얻은 이자와 남들이 저축한 돈을 또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며 이자를 받는, 아주 영리하고 영악한 깡패 같다고 했다. 선배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영화 속 칼 든 사채업자나 은행이나, 하는 일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이제 두려움과 고민을 뒤로하고 무엇이든 행동으로 옮겨야만 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대로 휘둘리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될 게 뻔했다.
다음 날 출근해서 반장이 있는 사무실로 찾아갔다.
“오~ 고 중사. 웬일이야?”
반장님과 식사 이후로 관계가 많이 편해졌다. 반장님은 자신이 나를 불러 식사한 것과 자신이 사는 집, 그리고 그날 이야기해 준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반장님, 혹시 시간 있으십니까?”
“어, 말해.”
반장은 부자였지만 절대 훈수를 두거나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가끔 부대에서 돈 이야기가 나와도 그냥 맥심만 홀짝일 뿐이었다. 그런 반장이어서 더 신뢰가 갔고, 정말 고수 같았다. 겉만 화려하게 치장하고 속은 텅 비어 맑은 소리만 나는 종 같은 사람들보다 훨씬 믿음이 갔다.
“저… 아파트를 대출 끼고 사려고 하는데 고민입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네가 사고 싶으면 사는 거지.”
“근데 주변에서 미친놈이라고 해서요. 제가 좀 유별나서 진짜 미친놈인지 확인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인마, 그런 건 남한테 물어보는 게 아니야. 특히 뼈 빠지게 모은 돈으로 뭘 결정할 때는 남의 말 들으면 안 돼. 본인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나중에 후회도 없고, 잘못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거야.”
할 말을 잃었다. 훈수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선택’을 말하는 반장의 말투와 억양에는 수많은 경험과 고뇌가 묻어 있었다. 선택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선택의 대가는 무서울 만큼 잔인했다. 아빠 친구의 과감한 선택, 아빠의 선택…. 잘되거나 안 되거나, 겉으로는 오십 대 오십 같지만 사실 안 될 때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더 묻지 않고 짧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장님.”
“싱거운 놈. 다음 달에 전역 지원서 낼 거다. 서류나 잘 처리해줘.”
“네? 아직…?”
“아직 몇 년 남았다고? 교류 걸려서 딴 데로 끌려갈 거야. 여기까지만 하려고 한다.”
“알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오며 생각했다. 군인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특히 나이 들고 가족이 있는 분들은 부대 이동에 매우 민감했다. 남들이 말하는 전방이 싫어서가 아니라, 본인 때문에 전학을 가야 하는 자식과 가족이 마음에 걸려 어떻게든 생활권에 머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못난 부모 만나 시골 산골짜기에서 학교 다니고, 맨날 전학 다니느라 제대로 된 친구도 못 만드는 자식들을 떠올리며 모두 미안해했다.
남들 누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포기해야 하는 삶—그건 본인 하나로 족하다고 외치는 듯했다.
반장 말대로 집을 살지 말지는 누구에게 묻고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의견을 묻는다는 건 확신이 없다는 증거였다. 확신은 남이 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 내는 게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은행에 갔다. 평소 업무 처리할 때 이용하던 창구가 아닌 ‘대출 상담’ 창구의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
‘띵동!’
파티션이 있는 상담창구 안쪽, 폭신한 의자에 앉자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제가 아파트를 사려고 하는데, 대출이 얼마나 나올지 알고 싶어서요.”
“어디요? 주소 아세요?”
“주소요? 잠시만요.”
나는 황급히 부동산 사장님 명함을 뒤져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저 그때 그 신혼… 군인….”
“아~ 총각. 네.”
“그때 그 도로변 아파트 주소 좀 알려주세요.”
“그거 네이버에 검색하면 되는데…. 알려줄게.”
순간, 뻔한 걸 물어 초보 티 낸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주소를 적어 직원에게 건넸다. 그는 컴퓨터에 타자를 몇 번 치고, 마우스를 클릭하고, 마지막으로 계산기를 두드린 뒤 입을 열었다.
“이건 주택담보대출 60%로 가능하고요. KB 시세 보니까 일단 최대 8천5백만 원까지 가능할 것 같아요. 급여통장은 여기시죠?”
“급여통장 여기 맞아요.”
상담을 받으면서 마냥 신기했다. 은행은 이자를 매달 갚을 능력이 있는지를 직장과 원천징수영수증으로 판단하고, 내가 어디로 잠적하지 않을 사람인지 신용을 가늠했다. 그 점에서 나는 거의 만점짜리 고객이었다. 국가라는 곳에서 정해진 한도만큼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고 선호도가 높은 아파트를 빌라보다 더 높게 평가해 대출 한도도 높다는 걸 알게 됐다.
은행도 만약을 대비해야 하니, 내가 잘못되면 내 집을 경매에 넘겨 원금을 회수하는 걸 제1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장사였다.
상담을 마치고, 휴가 중이었지만 부대로 복귀했다. 미친 듯 바쁜 인사과 일이 적응될 법도 했지만,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군대도 많이 변해 있었다. 이제는 ‘까라면 까’ 식으로 병사들을 지휘할 수도 없고, 언론 노출이 늘면서 모두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군 생활이 힘들다며 현역 복무 부적합으로 나가겠다는 병사들도 늘어났다. 검토해야 할 서류가 너무 많아 휴가 중에도 업무를 봐야 했다.
책상에 앉아 하나씩 문서를 살폈다. 징계 서류, 휴가 서류, 예산, 공문서…. 서류 더미에 둘러싸여 한숨을 푹 쉬는데 박 선배가 들어왔다.
“뭐, 나라는 너 혼자 지키냐! 휴가인데 뭐 하냐, 티 내기는.”
“일이 좀 있습니다. 뭐 있으십니까?”
아직 감정이 안 풀려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쌀쌀맞게 대꾸했다.
“정말 너는 생긴 거랑 다르게 속도 좁아. 내일 밥 먹으러 와. 조카들이 너 보고 싶단다.”
박 선배는 결혼을 일찍 했다. 스물셋에 결혼해 바로 첫아이를 낳았다. 군인정신이 투철하다 못해, 군인이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못 했을 사람. 병사들이 아프면 새벽이건 휴일이건 집에 있는 거, 없는 거 다 가져와 먹이고, 말은 차갑지만 가슴은 태양보다 따뜻한 선배이자 두 아이의 아빠였다. 지난번 내게 심하게 말한 걸 미안해해서 오라고 하는 게 뻔했다.
“네~ 전화드리겠습니다.”
“고참이 말하는데 눈길도 안 주고. 어디 책상 하나 받았다고 상전이냐. 간다. 욕 봐라.”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새벽 3시가 됐다. 하지만 익숙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보고를 위해 늘 야근이었다. 모든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병사들을 무사히 전역시키느냐에 맞춰져 있는 듯해 씁쓸했다. 뭐 하나 잘못하면 군복 벗고 위병소 밖으로 쫓겨나 철밥통 대신 깡통 차는 게 요즘 현실이었다.
다음 날 퇴근할 즈음 박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너 장어 좋아하잖아. 그렇지? 입은 고급이라니까. 근데 바다에서 사는 놈도 잘 먹나?”
“됐습니다. 뭐 돈도 없으면서 장어예요. 그냥 형수님이 해주는 찌개에, 소주 한 잔이면 돼요.”
“아, 눈치 없네. 너 핑계 삼아 내가 먹은 거 먹으려는 거지.”
“정말 답도 없네. 강이건 바다건, 장어면 다 좋아합니다.”
“시간 맞춰. 장어 기다리게 하지말고.”
저녁 6시가 넘어 만났다. 선배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부대 앞 관사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는 군복을 입고 출퇴근하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계속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왜 그럽니까?”
“아, 오늘 갑자기 훈련장에 똥 치우러 가라고 해서, 가서 난리 좀 치고 왔다.”
“맞네. 계획표에서 봤는데….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이거 똥 치우러 군인 된 거 아닌데, 그냥 뭐든 가져다 붙이면 다 우리 일이니…. 아휴….”
오랜만에 듣는 깊은 한숨이었다. 내가 1차 장기복무로 정규직이 될 때 선배는 마지막 심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애는 둘이고, 할 줄 아는 건 나라에 충성하는 것뿐인 남자였다. 그렇다고 특별한 재주도 없었다. 우물 밖으로 나가면 막막한 선배는 발표 날이 다가올수록 한숨을 쉬곤 했다.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야, 아무 말도 하지 마. 넌 애도 없고 결혼도 안 했잖아. 네가 내 마음을 알아? 내가 볼 때 네가 유력한데.”
“에이, 제가 뭘. 전 이번에 1차인데….”
“너 대회에서 1등도 했잖아. 솔직히 ‘고 하사’ 하면 ‘우와’ 하면서 다 알잖아….”
운이 좋았다. 얼떨결에 나간 토너먼트에서 꼭대기에 올랐고, 팀에 일원으로 하사 계급장을 달고 4성 장군 표창도 받았다. 보통 받을 수 없는 건데 행운이 내게 웃어줬다. 내색은 안 해도 선배는 나조차 경쟁 상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다행히 내가 1차에 될 때 선배도 장기가 됐다. 그날 술 한잔하며 입이 귀에 걸린 채 실실 웃던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배는 병사 시절 그렇게 고생하고 더러운 꼴 다 봤는데 부사관을 지원한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말했다.
“야, 너도 알 거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 직업 적으라면 참 막막했거든. 사실대로 ‘노가다’이라고 써야 하나, 아니면 ‘건축업’이라고 거짓말할까…. 이런 고민 엄청 했다. 그래서 그거 때문에 부사관 지원했어. 나중에 내 자식들은 나처럼 고민하지 말라고. 이렇게 적으면 되잖아.”
‘군인’
그게 선배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군대에 남아 ‘영원히’ 버티는 이유였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하는 일은 꼭 나의 명함과 같았다. 이상하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그 더럽고 치사했던 기분은 잊히지 않았다.
번호키를 누르고 16평 관사의 현관문을 열었다. 첫째가 좁은 거실 끝에서 마치 결승선을 통과하는 육상선수처럼 한 걸음에 달려와 “아빠!”를 외쳤다. 문득 선배가 부러워졌다. 한 살 차이지만 열 살은 더 많은 어른처럼 느껴졌다.
“오지 마! 오지 마!” 선배가 언성을 높였다. 표정과 말투가 진심이었다.
“아빠 더러워. 오지 마!”
그 말을 듣고 형수가 한걸음에 다가와 첫째를 데리고 식탁으로 갔다. 사랑하는 딸이 달려오는데, 똥을 치우고 와서 더럽다고 오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 아빠의 심정이 이해되면서도, 서운해하는 딸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그냥 오게 하지. 왜 그래?”
“야, 더러운 건 나 하나면 충분해. 재들 샤워 다 시켜놨는데, 절대로 안 돼. 내 딸들한테 냄새나는 건.”
단호했다. ‘더러운 건 나 혼자면 족하다’는 말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장의 책임감과 딸을 사랑하는 마음, 지켜야하는 것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남자의 삶, 모두가 너무 당연히 요구하지만 그 당연함 뒤에는 눈물과 비굴함이 숨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