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묘지 옆의 아파트
“오랜만이죠, 요한 씨.”
“네, 형수님.”
오랫동안 봐도 언제나 편했다. 마치 친척 집에 온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장어 좀 샀어요. 요한 씨 장어 정말 잘 먹잖아. 이 사람이 꼭 먹여야 한다고, 요즘 일 많이 한다고 해서….”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이상하게 떨렸다.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누군가가 나를 챙겨주는 느낌’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었다.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느끼는 이 친밀감과 진심이 담긴 걱정은 언제나 달콤했다. 부대에선 상명하복, 절대 충성만을 강요 받지만 50미터 앞 관사에는 따뜻했다.
“감사합니다, 형수님, 선배님.”
이 커플은 보면 볼수록 천생연분이었다. 형수는 남편이 기죽을까 봐 항상 외출복에 신경을 쓰고, 좋은 옷과 신발을 사줬다.
“밖에서 보이는 게 전부야.”
그녀는 늘 그렇게 말하며, 남편의 셔츠 깃을 반듯하게 펴주곤 했다. 그런 그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선배의 눈빛은 언제나 따뜻했다. 가끔 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삶은 단단해 보였다.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는 완벽한 존재처럼 보였다.
최근에는 중고차를 팔고 새 차를 뽑았다. 아마 모르긴 해도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자녀 둘 키우고 나면 남는 게 없을 텐데도, 뭔가 차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던 거 같다고 추측했다. 자존심은 그의 심장이었다.
“그래서 대출받아서 아파트 산다고?”
“응, 그러려고.”
선배라는 호칭과 존칭이 어색한 사이였다. 부대나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의식하지만 너무 친해서인지 반말이 더 편했다. ‘형’ 대신 ‘선배’라고 부르는, 편하면서도 뭔가 미묘한 경계가 있는 그런 사이였다. ‘형’이라고 몇 번 불러보려다가 정색하는 선배의 얼굴을 본 뒤, 그 호칭은 접었다.
“야… 정말 걱정된다. 너 똑똑한 놈이 왜 그러냐. 집값 떨어진다니까. 너 일본 알지? 우리나라도 곧 그 꼴 난다고.”
“뭐, 그래도 괜찮아. 내가 갖고 싶은 게 그냥 ‘집’이라서 그래. 선배가 차 좋아하고 빈폴 옷 좋아하는 것처럼….”
“야, 술 먹었다고 은근히 한 방 먹인다? 그건 품위 유지잖아. 너도 좀 거지같이 입고 다니지 말고, 제발 뭐 좀 걸치고 다녀라. 그 참모부 담당관이 말이야… 봐라, 지금도 무릎 다 튀어나와서. 정말 못 말린다.”
그날따라 소주가 꿀처럼 달았다. 목구멍을 타고 깔끔하게 넘어갔다. 술잔을 비우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결국 ‘지키는 사람’이고, 나는 ‘넘어서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족을 위해 현실에 머물렀고, 나는 나 자신을 위해 현실을 밀어내려 했다.
같은 세상 안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살아가는 두 남자의 삶이 이렇게 교차하고 있었다.
“캬! 술맛 좋다. 장어도 기가 막히네.”
“응, 이거 맛나네. 통통하고….”
“그거 알지? 수산물 시장 가서 사 온 거야.”
“형수님, 감사합니다.”
“뭘요, 많이 먹어요.”
잠시 부대 이야기를 하다가 선배가 다시 집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대출 이자는 얼마인데?”
“뭐… 한 30만 원 정도 나올 것 같아. 만약 집을 산다면.”
“정말 미쳤다. 매달 30만 원을 왜 은행 배부르게 갖다 바치는 거야? 너 요즘 다닌다는 대학교 과가 혹시 ‘정신과’ 아니냐?”
“하하… 이거 뭐 개그맨이네. 심리상담학과야.”
“니가 무슨 상담학과야. 상담받아야 하는 건 바로 너구먼. 우리 월급에 30만 원씩 왜 은행 좋은 일 시키나. 제발 정신 차려라, 요한아.”
“어차피 지금은 내가 들어가서 살지 않을 거니까 세입자 구해서 그 돈으로 내면 손해는 안 볼 거야.”
“아, 답답하네. 무주택으로 있다가 나이 사십쯤 돼서 청약 넣어야지. 그 시골 촌구석 집 사면 청약 날아가. 알기는 아냐?”
“알지. 그래도 난 그렇게 운에 맡기고 싶지 않아.”
“이거 정신과 맞네. 운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도야. 그래서 싸게 주는 거잖아. 그것도 무주택자들에게. 아, 답답해 죽겠다.”
“선배, 장어 타겠다. 빨리 먹자.” 나는 말을 돌렸다.
그도 내가 고집이 세다는 걸 알았다. 아무리 말해도 결국 내 길을 갈 걸 알면서도,
그래도 걱정이 됐던 거다. 술잔 속 불빛이 선배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지쳐 있었고, 나는 불안했다.
우리의 대화는 사실 설득이 아니라, 각자의 두려움을 견디는 방식이었다.
술자리는 결국 부대 이야기로 흘러갔다. 선배는 술에 취해, “이 월급으로 애 둘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 하며 하소연했다.
마이너스 통장 없으면 파산이라고, 매달 통장을 들여다보는 게 지옥 같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 달부터 형수가 일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 말 속에는 자책과 안도, 그리고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 말을 듣고 한마디해주고 싶었다.
“형, 옷값 줄이고, 신발 좀 덜 사고, 보여주는 데 돈 쓰지 마.”
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으로 산다. 심장같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건,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전부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소주잔만 다시 채웠다.
나는 일찍부터 배웠다.
세상엔 ‘늦게 배운 후회’보다 ‘일찍 깨달은 절약’이 낫다는 걸.
결혼은 안 했지만, 나는 자식에게 신세 지는 삶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내가 늙었을 때, 내 아이들이 나를 걱정해야 한다면 그건 이미 실패한 인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방식대로 버텼고, 모았다. 지금의 가난은 일시적이지만, 소비로 습관이 된 행동은 가난을 대물림한다고 믿었다.
“젊을 때 고생하고 나이 먹어 편하게 살아야 한다.”
그건 내 철학이자, 나 자신에게 내린 유언 같은 말이었다. 아버지의 실패는 내 경고였고, 선배의 현실은 내 거울이었다. 선배는 빚을 두려워했지만, 나는 그 빚의 구조를 이해하려 했다.
나쁜 빚은 우리 아버지의 빚이었다 — 카드론, 현금서비스, 감정의 소비. 그건 절망의 빚이었다.
하지만 주택담보대출은 달랐다. 시간을 담보로 잡고, 미래를 바꾸는 빚이었다. 아버지는 10퍼센트 넘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했다.
“조금만, 이번 한 번만.” 그 말은 늘 같았다. 나는 세 번 속았다. 그래도 안 줄 수는 없었다.
그 돈을 건네는 순간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을 갚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신용카드를 버렸다.
사람의 욕망을 조용히 빨아들이는 마력 같은 그것을. 정말 돈이 없으면 안 쓰게 되는데, 카드가 있으면 누구나 미래를 저당 잡힌다. 나는 그 시스템이 무섭다고 느꼈다.
그건 이자를 매기는 금융이 아니라, 사람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괴물 같았다. 신문을 꾸준히 읽으며 깨달았다.
돈이란 결국 ‘시간을 사는 수단’이라는 걸. 누군가는 빚으로 미래를 당기고, 누군가는 저축으로 과거를 버틴다. 나는 그 중간에서, 아주 작은 균형점을 찾고 싶었다.
며칠 뒤, 부동산 사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잘 지냈어요?”
“네, 사장님. 안녕하세요.”
“생각해보셨어요?”
“아직 고민 중인데 좀 무섭기도 하고, 뭐… 깡통전세니 집값 폭락이니 그런 말들이 많아서요.”
사장님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신혼집이면 상관없어요. 잠시 세놓고 나중에 들어오면 아무 문제 없어요. 그나저나 그 집, 층도 높고 전망도 좋아서 문의 많아요.”
사장님의 그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 묘하게 조급해졌다.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내가 이 사람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나.’ 하지만 그 불안은 곧 또 다른 충동으로 바뀌었다.
결국 퇴근하고 바로 김포로 향했다.
첫 번째 아파트, 그 언덕길을 천천히 걸으며 이 동네의 공기, 사람, 그리고 저녁 냄새를 새삼스레 느꼈다.
아파트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보고, 마트도 들러보고, 주변의 소리를 귀로 새겼다. 그러다 언덕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서 마주친 풍경은, 숨이 턱 막힐 만큼 낯설고 싸늘했다.
'공동묘지.' 바람이 묘하게 차가웠다.
사장님이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곳. 언덕 너머 그 아래, 조용히 누워 있는 수백 개의 이름들.
나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집을 가진다는 건, 어쩌면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살기 위해 집을 짓지만, 결국 그 집도 언젠가 흙으로 돌아간다.
공동묘지를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집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에 잠시 세워둔
한 사람의 흔적이라는 것을. 지도라도 제대로 봤으면 금세 알았을 텐데,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많은 걸 놓쳤다.
그 순간, 집보다도 내 성급함이 부끄러웠다. 방향을 보니, 그날 잠겨 있던 작은 방이 떠올랐다.
그 방 창문으로는 아마 이 묘지가 한눈에 보였겠지. 집주인도, 사장님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묘한 배신감이 밀려왔다.
나를 ‘호구’로 본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심장에서 머리로 피가 확 솟구쳤다.
“DELETE.”
나는 마음속으로 그 집을 지워버렸다.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세상은 언제나 경험 없는 사람의 어깨 위에 수업료를 올린다. 그래서 나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갔다.
다른 부동산을 돌며, 내가 진짜 살고 싶은 집, ‘나 홀로 아파트’를 찾아다녔다.
그날 밤, 한강을 건너며 창밖을 봤다. 도시의 불빛이 물 위에 부서졌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세상을 바꾸는 건 거대한 선택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반복이었다. 그 반복이 쌓여 결국 삶이 된다.
“이번엔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내 인생의 첫 계약은, 누가 아닌 내가 써 내려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