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아저씨. 도망간 19살
잠시 혼란을 경험하고 검정고시 준비에 집중했다. 적어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사람 대우를 받을 것 같았다. 간신히 턱걸이로 운 좋게 한 번에 합격했다. 정말 운이 좋았다. 자퇴생 딱지를 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미성년자이고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새로운 딱지가 생겼다. 검정고시로 친구들보다 1년 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졸업을 했어도 돈이 급하다 보니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공부해서 뭘 해보겠다는 생각이나 대학은 아예 머릿속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급한 건 여전히 돈이었다.
그렇게 19살 생일이 지나자마자 운전면허를 땄다. 속도 모르는 친구들은, 당장 멈춰도 어색하지 않은 아빠 차를 끌고 밤에 가끔 운전 연습을 하는 나를 보며 부러워했다. 면허를 따고 이것저것 고민하던 중 택배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받는다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그 뒤로 택배 회사를 찾고 또 찾았다. 마침내 사람을 구한다는 작은 서대문구의 택배회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고 찾아갔다.
점장이라는 사람은 내가 들어오자 초점 없는 동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기분 나쁘게 물었다.
“몇 살이야?”
“19살이요. 근데 1종 보통 있어요.”
“너 탑차 운전 해봤어?”
순간 망설였다. 아빠 소형차만 몇 번 운전해 본 게 전부였고, 트럭은 면허 딸 때 잠깐 해 본 것이 전부였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거짓말을 선택했다. 돈 앞에서 양심 같은 건 사치였다.
“네, 제가 시골에서 자라서 무면허로 운전 많이 했어요.”
거짓말을 하고 후회했지만, 다행히 점장은 알겠다고 말하며 다음 주부터 나오라고 했다.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파격적이었다. 월급 160만 원에 차량 제공, 원하면 그 차로 출퇴근까지 해도 된다고 했다. 160만 원이라는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드디어 큰돈을 벌 수 있게 된 게 행복했다.
기쁜 마음으로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걱정하며 운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원하는 대로 돼 다행이라고 격려했다.
기대했던 출근 날, 사무실에서 내가 배달해야 할 지역과 차량을 배정받았다. 모든 절차는 너무나도 신속했다. 차라리 좋았다. 이제 일만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금방 집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출근 시간은 최악이었다. 물류센터에 06시에 도착하면, 전국에서 올라오는 큰 트럭에서 물건을 내려 자기 지역에 맞게 신속하게 분류해야 했다. 저 멀리서 내 지역을 외치며 물건이 굴러오면 정신없이 물건을 내려 트럭 앞으로 옮겼다. 그렇게 정신없이 분류를 마치면 어느덧 아침 07시가 넘어 있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온몸의 힘이 빠졌다. 배송하는 순서대로 1톤 트럭에 물건을 정리해서 넣고, 08시가 되어야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처음이라 운전도 서툴고 모든 게 정신없었다. 탑차라 후방을 볼 수도 없었고 당시에는 후방 카메라라는 것도 없었다. 막내급인 나는 서대문구 중에서도 연립 빌라가 가득한 구역을 배정받았다.
한참 일하고 나서야 알았다. 아파트나 회사 빌딩 배송과 비교할 때 빌라촌 배송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다는 것을. 지리도 모르고 운전도 서툴러 첫 한 달은 지옥 그 자체였다. 배송을 제때 하지 못하면 물건이 몰려서 1톤 차량에 다 넣지도 못했다. 무거운 물건이 오면 승강기가 없는 빌라 꼭대기까지 끙끙거리며 옮기느라 몇십 분씩 손해를 보기도 했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시간조차 아까워 슈퍼에서 빵 조각을 사서 먹으며 배송했다. 주말조차 반납하고 쉬지 않고 배송해야 했다. 혹시 배송이 늦어 문제가 생기거나 물건이 파손되면 모든 변상은 택배기사인 내 몫이었다.
아침 05시 30분에 일어나 밤 10시가 넘어야 겨우 집에 도착했다. 아침 물건을 분류할 때 동료들의 표정을 보면 마치 일하는 기계보다 못한 노예처럼 보였다. 한 가닥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나름 돈을 많이 받는 직종인데도 그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다들 “나 좀 여기서 구해줘! 너무 힘들어!”라고 외치는 듯했다.
악으로 깡으로 한 달을 버텨 냈다. 160만 원을 위해서…. 특별히 운동한 것도 없는데 체중은 6kg이나 빠졌다. 그리고 기다리던 월급날이 되었다.
“고생했어.”
봉투를 열어보니 90만 원이 들어 있었다. 점장님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거 왜 90만 원이에요…?”
“차 수리비, 지연배송 때문에 반품된 것 변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장 일주일 동안 배달 안 돼서 상한 것 변상…”
다 맞는 말이었다. 운전이 서툴러 초반에 차를 부숴 담벼락을 무너뜨린 적도 있었다. 배송이 밀려 반품을 당하기도 했고, 특히 양념게장이 와서 차 구석에 둔 탓에 음식이 상해 고객과 고객센터 직원에게 욕을 배불리 들은 적도 있다. 순진하게 월급날에 돈이 다 나올 거라 착각한 내가 부끄러웠다. 알고 있었더라면,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이라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처음엔 다 그래. 다음 달엔 잘하면 되지. 늦었으니 빨리 가봐.”
고작 90만 원을 받기 위해 주말 없이 새벽에 일어나 한 끼 겨우 먹으며 15시간씩 일했는데, 90만 원은 너무 초라했다. 아니, 너무 억울했다. 그 어떤 일도 처음 말한 대로 내게 돈을 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확실하고 편하다고 약속하던 일자리는 내게 절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서운했지만 다음 달에도 출근해야 했다.
시간이 흐르자 동네가 눈에 들기 시작했고, 운전 실력도 늘어 좁은 골목에서 후진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무거운 물건이 난감했지만 견딜 만했다. 그러나 잠잠해질 만하면 시련은 또 찾아왔다. 점장이 급히 불러 모은 적이 있었는데, 도착해 보니 공원에 우리 회사 차 한 대가 덩그러니 주차되어 있었다. 차 안에는 배송 물건들이 가득했다. 기사 중 한 분이 도망간 것이었다.
차 번호판을 보니 그분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아빠보다 더 연세가 있어 보이는, 빌라 지역을 담당하던 분이었다. 몇 마디 나눈 적도 없었지만 물류센터에서 오가며 목례를 몇 번 나눴다. 언제나 지쳐 보이던 그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망간 아저씨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해도 해도 끝없는 물량 앞에서 느끼는 부담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나이 든 분은 얼마나 버거웠을까. 마음 한편으론 이해되면서도 그분을 미워하기도 했다.
점장은 우리에게 차에 있던 수많은 물건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것을 동지애라고 표현해야 하나…’ ‘내 구역이 아니면 배송할 의무가 없으니 거절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짜증이 밀려왔지만 몸은 자동으로 물품을 차에 적재하고 있었다. 내 물량에 갑자기 생긴 것들을 소화하려면 적어도 며칠, 아니 주말까지 반납해야 겨우 소화할 정도로 양이 늘어났다.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배달을 멈출 수 없었다. 당장 내가 필요한 돈이니까, 돈 벌려고 자퇴했으니까….
내 구역이 아닌 다른 지역 배송까지 하고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집에 왔다. 일하는 동안 도망간 아저씨 때문에 고생한 것이 너무 화가 났다. 무책임하게 차를 버리고 도망간 게 어이없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눈을 감고 생각하니, 잘 알지도 못하는 그분이 안타깝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루하루 방전되어 더 이상 충전도 안 되는 건전지처럼 버텼을 그분의 심정이 떠올랐다. 그 나이에 매일 끝없는 배달에 굴레 진 채로 그만두고 싶어서 차를 버리고 도망갈지 수천 번 고민했을 것이다. 그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보며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었다. 눈 뜨고 싶지 않아 잠만 잔다는 친척 형처럼 아저씨도 그렇게 힘들었을 것이다.
두 달은 마치 몇 배속으로 흘러간 듯했다. 택배 물건을 배송하다 “고맙다”며 물 한 잔이라도 주는 분을 만나면 힘이 났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쁜 일 탓에 내 주변엔 불만이 점점 쌓여갔다. 휴일도 없이, 평일에 누구를 만날 여유도 없는 나 때문에 여자친구는 오해 아닌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 주말에 서대문역으로 나오라고 해 배달하는 동안 옆에 태웠다. 그녀는 그것도 데이트라고 좋아했지만, 차에서 내렸다가 타기를 반복하며 물건을 들고뛰는 나를 보며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일을 마치고 간만에 밥을 사주려고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왜 우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한참 울고 난 뒤 “밥맛 없다”며 지하철역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그냥 삐진 거겠지’ 하고 집에 돌아왔지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이불을 덮고 자려는데 문자가 왔다.
“미안해. 앞으로 방해 안 할게. 제발 조심 운전해. 뭐 좀 챙겨 먹고.”
오래 만나서 사랑의 감정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문자를 읽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말고 감춰야 하는 게 남자라고 배웠지만, 나는 아직 애송이었다. 맛있는 것도, 좋은 곳도 데려가지 못하고 항상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같이 먹는 못난 나를 좋아해 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어 너무 고맙고 든든했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 남들이 해주는 만큼이라도 원 없이 해주겠다고 다짐하며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잠이 들었다.
큰 실수가 없었던 탓인지 두 번째 월급은 10만 원 정도를 제외하고 거의 다 받을 수 있었다. 차량을 가지고 출퇴근하니 교통비도 절약되어 크게 느껴졌다. 월급을 받은 뒤 문구점에서 흰색 봉투를 샀다. 그 위에 정성껏 손글씨를 썼다.
“아들만 믿어. 나중에 호강시켜 줄게요.”
그리고 봉투에 140만 원을 넣었다. 이렇게 매달 벌 수만 있다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렇게 일하면 분명 모두 웃는 날이 올 것이라, 우리 가족도 평범해질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가을에 시작한 일은 어느덧 추운 한겨울이 되었다. 물류센터에서 물건을 나누는 일도 추위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다. 친구들은 수능이 끝나 대학생이라는 또 다른 신분으로 놀기에 바빴고, 나는 여전히 일만 했다. 배정받은 동네를 완벽히 파악한 몇 달 후, 여유가 조금 생겼다. 가끔은 순대국밥도 먹을 수 있는 사치스러운 날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남의 돈 버는 것처럼 치사하고 더러운 거 없다”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빠의 말이 떠오르는 날이 많았다.
시간 단축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점장은 내게 주변 지역을 추가로 배정해 주었다. ‘노는 꼴을 못 보는구나’ 싶었지만, 싫은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문제는 영업 압박이었다. 배송만 하는 게 아니고 낙원상가 같은 곳에 가서 정기적으로 우리 택배를 쓰게 할 거래처를 확보하라는 식의 압박이 있었다. 배달할 시간도 부족한데 거래처를 어떻게 만들어오란 말인가. 너무 이기적이고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시키는 건 다 해야 하는 노예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점장이 아니라 바로 나였기에, 틈나는 대로 업소를 방문해 명함을 돌리며 “물건 보낼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라고 말하고 다녔다.
이런 정신적 압박이 계속되자 몇 달 사이 제대로 쉬지 못했고, 젊음이라는 최고급 육체를 가졌음에도 체력은 바닥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난 체력 탓에 졸음운전하는 날이 늘어났다. 겨울이 되자 새벽 출근길 히터를 틀고 운전하던 중 빈번히 꾸벅거리곤 했다. 잠을 깨려고 창문을 열고 껌을 씹어도 잠시뿐이었다. 그렇게 졸음운전으로 목숨을 내건 채 출근하는 날이 이어졌다. 마치 하루살이처럼 위태로운 인생이었다. 그런데도 운전대를 놓을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집을 나섰더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보통 또래라면 첫눈이라 낭만을 떠올리며 여자친구에게 전화해 데이트 약속을 잡을 텐데, 눈이나 비는 아주 치명적인 장애물이었다. 물건을 가득 실은 1톤 탑차는 눈 때문에 더 위험했다. 내리는 눈을 보며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차를 가득 덮은 눈을 쓸어내고 얼어붙은 와이퍼를 살핀 뒤 물류센터로 급히 출발했다. 눈 때문에 조금 늦게 출발한 게 마음에 걸려 무심코 과속해 올림픽대로를 달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졸고 있었다.
차는 차선을 이탈해 대각선으로 가고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급정차하려 브레이크를 밟자 차가 밀리며 옆으로 돌기 시작했다. 눈 때문에 도로가 얼어 좌측으로 쏠리면서 트럭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머릿속은 하얀 눈처럼 변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죽음 앞에서 환영을 보거나 다른 경험을 한다고들 하는데,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짧은 찰나였지만 마치 몇십 분처럼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 것 같았다.
트럭은 올림픽대로를 벗어나 가드레일을 살짝 부딪치며 겨우 정차했다. 새벽이 아니었다면 분명 다른 차와 충돌해 큰 사고가 났을 것이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온몸에서 한기가 돌았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었구나 싶었다. 빨리 뛰는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고 식은땀은 등을 타고 흘렀다. 한숨 돌리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어디야? 왜 이렇게 늦어! 빨리 안 와!”
점장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사람들은 내가 죽건 다치건 관심이 없었다. 그저 배송하는 기계의 부품쯤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며칠 뒤, 나는 통보 없이 일을 그만두었다. 마치 트럭을 두고 도망갔던 그 아저씨처럼 나도 도망쳤다. 택배를 하다 20대도 채우지 못한 나이에 죽고 싶지는 않았다. 삶이 아름답고 희망이 가득 차 있지는 않았지만, 영원히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뭔가를 버티다 보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을 멈추기로 했다. 아마 차를 두고 도망갔던 그 아저씨도 나와 같은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백수가 되고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동네 산에 올라갔다. 걸으며 생각했다. ‘이 세상에 능력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몽둥이뿐인 사람들에게 돈을 많이 준다거나 일이 편하다고 하면, 그건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역시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절대 없다.’ 노트에 적어 둔 ‘집을 사겠다’는 문장은 영원히 글자로만 남을지 몰랐다.
원래 밑바닥은 이런 것이라고 혼잣말하며 산 밑바닥부터 오르고 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