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울타리 밖의 세상, 청춘의 무게
자퇴는 단지 서류 몇 장에 서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너무도 간단히 마무리되었다. 학생으로 남아 있어야 할 사람이 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전환되는 것이 이렇게 간편하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량 학생도 아니었던 내가 자퇴하겠다고 예고도 없이 엄마 손을 붙잡고 학교에 갔는데도, 담임 선생님은 말리지 않았다. 마치 가망 없는 사람은 그냥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듯, 공기와 분위기는 차가웠다. 아마도 내가 복학생 신분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하류 인생을 맛보기 위한 발버둥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그렇게 쉽게 벗어나고, 엄마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앞으로 내가 짊어져야 할 무게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엄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들, 배고프지…?”
“조금….”
김밥천국에 들어가 분식을 시키고 말없이 먹었다. 엄마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엄마는 우리 아들을 믿어.”
나는 안심시켜드리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자퇴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나는 멍하니 집에만 있었다. 학교에 가는 친구들은 부럽다는 듯, 수업이 끝나면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학생이 학교를 가지 않으니 할 일이 없었다. 우선 전단 아르바이트를 늘려하면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생각 같아서는 할 일이 넘쳐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있는다고 일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나태해질 때마다 ‘돈 때문에 학생의 길을 포기했으니 돈을 벌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사정을 알던 전단지 사장님의 소개로 막노동을 하게 되었다. 새벽 5시에 눈을 떠 공사 현장으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마치 창고에 처박히는 의미 없는 상자처럼 내 몸이 가치 없어 보였다. 차에 탄 사람들의 눈빛은 모두 희망이라는 단어가 지워진 듯 초점이 없었다. 하루 일당이 5만 원이라는 말에 나는 곧장 계산기를 두드렸다. 5만 원씩 30일이면 한 달에 150만 원. 그 돈이면 당장이라도 부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꾸벅꾸벅 졸다 ‘도착’이라는 기사님의 말에 눈을 떠 차에서 내렸다. 도착한 곳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뒤편, 신축 연립주택 공사 현장이었다. 학교를 떠난 내가 친구들보다 더 빨리 일어나, 학교가 보이는 곳에서 일을 하게 된 현실이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래도 ‘150만 원이면 상처받은 자존심 따위는 치유할 수 있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이를 악물고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점심을 먹고 스티로폼 위에 누워 쉬는 동안, 건너편에서 교복을 입고 운동하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씁쓸한 마음으로 학교를 바라보며 후회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더 입을 다물고 일에만 몰두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엄마의 야간 일을 그만두게 하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것만이 내 삶을 덜 억울하게 만들 것 같았다.
가끔 속도 모르는 친구들이 점심시간에 찾아와 수다를 떨다 가기도 했다. 힘들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종소리에 맞춰 유유히 학교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와 그들의 차이를 절감했다. 학생과 노동자, 두 단어로 신분은 명확히 갈렸다. 학생에게는 희망이 있었지만, 노동자에게는 오직 일당만이 있었다. 현장 일을 마치고 돈을 받으면 나의 하루도 함께 마감되었다. 마치 문 닫은 가게처럼, 집에 도착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은 근육통으로 욱신거렸고 작은 움직임조차 힘들었다. 머리를 바닥에 대는 순간 마법에 걸린 듯 눈이 감겼고, 다시 알람이 울리면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해도 뜨기 전, 차갑고 무거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현장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고생하는 내 모습을 안타까워서였는지, 아니면 자퇴한 모습을 한심하게 여겨서였는지, 아빠는 내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엄마에게 일당을 전해주면, 엄마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엄마가 받지 않으려 할 때마다 나는 ‘걱정하지 마, 평생 이렇게 살진 않을 거야’라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30일도 채우지 못하고 허리를 다쳐 일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몸 쓰는 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던 아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일을 쉬는 동안 다시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중국집 오토바이 배달이라도 할까 고민했지만,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아들… 다 좋은데 오토바이 배달은 안 했으면 좋겠어.”
오토바이로 석유 배달을 하던 아빠가 여러 번의 사고로 죽을 뻔한 경험이 있었기에, 엄마의 그 말은 무게가 달랐다. 나는 그 약속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그 무렵, 나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 처음 여자친구를 알게 되었다. 몇 번의 대화는 금세 전화 통화로 이어졌고, 목소리를 나누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실제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초겨울 바람이 매섭던 날, 우리는 중간 지점인 동대문역 근처, 오래된 카페 ‘시드니’에서 처음 마주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그녀를 보고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빠르게 연인 사이가 되었다.
소꿉장난 같은 몇 번의 만남이 이어졌지만, 여자와 제대로 된 교제를 해본 경험이 없던 나는 더 깊이 빠져들었다. 젊음의 열기는 주체하기 벅찼고,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모든 것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나의 비밀, 즉 자퇴 사실이 결국 그녀의 어머니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담담히 받아들이던 그녀와 달리, 나는 초조와 불안 속에서 흔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관계는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익숙한 번호가 휴대전화에 떴다. 그녀의 어머니였다.
“얼굴 한번 보자꾸나.”
그 만남에서 그녀의 어머니는 조용히 부탁했다.
“중요한 시기야. 우리 딸을 정말 좋아한다면… 한동안 만나지 말아 줘. 나중에 대학 가고 다시 만나면 되잖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계속 만나겠다’고 큰소리칠 수도, ‘돈 없고 학교도 안 다니는 애 취급하지 말라’고 따질 수도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부모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몰래 이어가는 만남이 주는 서글픔은 컸다. ‘돈이 없으면, 순수해야 할 첫사랑조차 지켜낼 수 없구나.’ 그 생각에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괜히 그녀에게 화를 내는 날이 잦아졌다.
안정된 직장을 구한다는 것이 자퇴생 신분으로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검정고시를 틈틈이 준비하면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급이 작든 크든 가릴 수 없었다. 써준다고 하면 감사하다고 절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왜 아빠와 엄마가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어린 나이에 속성으로 배우게 되었다. 가끔 공부하느라 힘들다며 투정 부리는 친구들이 놀러 오면, 나는 몰래 마트에서 산 맥주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복 받은 줄 알아라. 돈 버는 건 공부보다 몇천 배는 더 힘든 거다.”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내 몰골을 보고 친구들은 그저 침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친구 어머니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너희 엄마 지금 내가 있는 가게에 와 있으니 빨리 와라.”
급히 달려간 식당에서 본 엄마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화장실 불장난 사건으로 주인집 아주머니 앞에서 고개를 숙이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또다시 나 때문에 엄마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줌마! 안 만날 테니까, 빨리 가세요!”
내가 소리쳤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비웃으며 말했다.
“봐라, 못 배우고 학교도 안 다니니 애가 저 모양이지.”
엄마는 “가만히 있어”라며 나를 제지했지만,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억울함과 분노가 가슴을 불태웠다.
‘내가 자퇴생이라서…
우리 부모가 돈이 없어서…
내가 능력 없고 가진 게 없어서…
내가 낙오자라서…
그래서 그녀 인생을 망칠 존재라서….’
한 달쯤 지나, 동네 미용실 아주머니의 소개로 새로운 일을 얻게 되었다. 한 아저씨가 나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큰 어려운 일은 아니고, 그냥 나 도와서 일하면 돼. 할 수 있겠니?”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다음날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고 버스를 타고서야 도착한 곳은 커다란 컨테이너가 있는 창고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오만 가지 잡동사니가 종류별로 정리돼 있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닦고 옮겼다. 며칠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월급은 얼마인가요?”
“기본급 60만 원이야.”
“네? 그게 전부 인 가요?”
“아니, 일 들어가면 추가로 돈이 나오니까 걱정 마.”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르바이트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몇 주가 지나던 어느 날, 문자 한 통이 왔다.
“내일은 아침에 오지 말고 밤에 와. 밤새도록 일할 거야.”
다음날 밤, 창고 앞에는 용달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시받은 물건을 싣고 도착한 곳은 강남 한복판, 불빛이 쏟아지는 촬영 현장이었다.
“영화 소품 스태프 일을 하는 거야. 오늘만 도와주면 돼.”
눈앞의 풍경은 낯설고도 신기했다. TV에서 보던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니, 마치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다. 조명과 카메라, 오디오 장비가 분주히 움직였다. 나는 시키는 대로 물건을 나르고, 필요하면 사 오고, 새벽까지 뛰어다녔다.
아침이 밝았을 때, 아저씨는 내 손에 3만 원을 쥐여주었다. ‘이곳이라면 내가 자퇴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뒤로도 몇 차례 촬영장을 오갔다. 지방 촬영이 있을 때는 버스를 타고 내려가 며칠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연꽃잎 소품을 만들기 위해 분홍색 한지를 며칠 동안 잘라 봉투에 담기도 했고, 갑자기 강아지가 필요하다 해서 촬영 콘셉트에 맞는 강아지를 사 오기도 했다.
그러나 미성년자라는 꼬리표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술자리에선 눈치를 봐야 했고, 나 때문에 불편해하는 기류가 감지되곤 했다. 일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집을 자주 비우는 것이 엄마와 어린 동생을 생각하면 불안했다. 무엇보다 기본급이 너무 적어, 내가 세운 ‘돈을 빨리 벌어야 한다’는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네 달쯤 지나, 흥행영화 몇 편의 이름 없는 소품 스태프로 남은 짧은 경력을 끝으로 일을 그만두었다. 소속감도, 전망도, 그때의 나에겐 사치였다.
오로지 바람은 하나였다. 엄마를 편하게 해 주고, 학생 신분을 포기한 대가를 금전으로라도 상쇄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른들처럼 당당히 살아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