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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쓰러진 엄마, 미성년 노동자

거친 손 위에 다짐

by 고용환

아빠와 엄마는 가진 것 없어도 악착같이 일하면 형편이 나아진다고 믿었다. 그리고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그 믿음은 잠시 현실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드디어 단칸방을 벗어나 이사했다. 신혼집이자 내가 태어났던 반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해, 동생이 태어난 주인집 옆 단칸방을 거쳐, 빨간 벽돌의 방 두 칸짜리 연립으로. 소파와 큰 식탁을 둘 자리는 없었지만, 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좁은 거실 겸 주방이 있었고, 주인집에서 보았던 하얀 의자가 있는 깨끗한 물이 나오는 화장실이 있었으며, 방이 두 개나 있었다. 두 번째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이사 전부터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작은 짐들을 옮겼다.


어린 내게 무엇보다 좋았던 건 내 방이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이사 전 미리 집을 보러 갔을 때 엄마가 말했다.


“동생이 아직 어려서 엄마랑 아빠랑 같이 잘 거야. 작은 방은 네 방이야.”


아빠는 나를 데리고 가구점에 가 갈색 원목 책상과 바퀴 달린 의자를 골라주었다. 오른쪽에 서랍이 달려 있고, 상판 위에는 유리까지 깔린 책상. 친척 집에서나 구경하던 바로 그 책상이 내 것이 되자, 이상하게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그날 친할머니는 엄마에게 장롱을 선물하셨다. 엄마는 어린 소녀처럼 장롱 문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 웃음은 진짜였다.


이삿날, 정신없이 짐을 들이고 밤이 되자 아빠는 두 손 가득 후라이드치킨과 과일을 사 왔다. 우리는 처음으로 ‘거실’이라는 공간에 둘러앉아 바삭한 치킨을 뜯었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 모든 게 부모님이 열심히 살았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두 분이 자랑스러웠다.


집이라는 공간이 이렇게 쾌적하고 포근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새집도, 아파트도, 넓은 마당이 있는 집도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는 만족했다. 앞으로도 열심히만 살면 더 넓고 좋은 집으로 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우리 사이를 환하게 비췄다.


그 무렵 아빠와 함께 배달하던 동료들도 사업을 키우거나 더 나은 집으로 옮겨갔다. 몇 달 뒤, 우리 가족은 친하게 지내던 아빠 동료의 초대를 받아 집에 놀러 갔다. 대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이층짜리 단독주택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빨간 벽돌집 근처에 살던 분이었는데, 우리가 단칸방을 벗어나는 동안 그 아저씨는 훌쩍 더 큰 저택으로 옮겨온 것이다.


엄마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집 자랑을 늘어놓는 아주머니 옆에서 건성으로 웃으며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었다. 특히 주방에서 한참을 서서 싱크대와 대리석 식탁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표정에는 부러움과 한숨이 겹쳐 있었다. 아빠는 아저씨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장사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 얼굴에서는 부러움도, 초조함도 잘 보이지 않았다. 술이 오르자 아저씨가 조언하듯 아빠에게 말했다.

“그 소매업 그만하고, 친척들 챙기는 것도 그만하고, 내 말 좀 들을 걸 그랬지?”
“지금도 괜찮아. 몇 년만 더 하면 괜찮아질 거야.”
“진작 내 말 들었으면 자네도 벌써 더 큰 집으로 가서 살았겠지.”


아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듯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자존심에 금이 갔을 것이다. 빨간 벽돌집으로 이사한 것만으로도 행복했지만, 아빠가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우리에게도 더 큰 기회가 있었을지 모른다.


아빠는 배달을 하면서 일손이 모자라면 친척들을 직원으로 들여 배달을 소화했다. 처음엔 모든 게 좋았다. 친척들이 주변에 늘 있어 나도 든든했다. 그러나 준비 없는 확장과, 핏줄로 엮인 관계 속에서 일은 금세 엉켰다. 배달은 늦어지고 외상은 늘었다. 친척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월급만 바라는 이들이 되었다. 자금 회수는 막혔고, 돈 관리는 흔들렸다. 그래도 아빠는 친척들 월급을 우선 챙겼다. 사업은 커지지 않았고, 수입은 수고에 비해 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친척들은 각자 장사를 하겠다며 근처에 소매점을 차렸고, 아빠의 거래처를 나눠 가졌다. 결국 아빠의 수입은 급격히 줄었다. 엄마는 친척들 밥까지 챙기며 보이지 않는 일을 도맡아 더 바빠졌다.


반면 큰집으로 이사한 그 아저씨는 과감했다. 석유 배달에서 유조차를 사 도매로 빠르게 전환했다. 아빠에게도 함께 하자고 권했지만, 아빠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익숙한 것이 좋았을 것이다. 초등학교조차 마치지 못하고 공장에서 푼돈을 받으며 일하던 시절을 지나, 석유 배달은 아빠를 사람답게 살게 해 준 첫 직업이었다. 직원들이 아빠를 ‘사장님’이라 불렀고, 장사도 잘될 땐 잘됐다. 아빠는 그 호황이 오래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친척들과의 불화는 잦아졌다. 그 와중에도 아빠는 매주 친척들을 불러 외식을 하고, 낡아가는 오토바이와 배달 트럭을 더 사들여 빚을 얹었다. 전세로 옮기면서 우리 가족은 은행빚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엄마는 불안했으나 성품이 너무 착해 아빠에게 잔소리 한마디 못 했다. 만약 돈 관리를 엄마가 맡았다면 이 정도로 기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아빠가 주는 생활비로 살림을 지켰고, 그중 조금을 아껴 대출과 저축을 겨우 이어갔다. 출발이 비슷했던 동료는 결국 다른 다리를 건넜고, 작은 선택의 차이는 ‘가난한 아빠’와 ‘부자 아빠’라는 이름으로 나뉘었다.


내가 본 동료 아저씨는 검소했다. 외상은 없었고 과소비도 없었다. 겉모습만 보면 오히려 아빠보다 더 검소해 보였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갈비를 먹으러 갈 때, 그 집은 정육점 고기를 사 와 집에서 구워 먹었다. 그 작은 차이가 이층 집이라는 결과로 눈앞에 서자, 어린 나이에도 충격을 받았다. 아마 엄마는 모든 걸 더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리석 식탁과 반짝이는 ㄷ자 주방을 보며 부러움과 후회를 숨기려 애썼을 것이다.


그 무렵, 집은 내게 잠을 청하는 곳 그 이상이었다. 단칸방을 벗어났다고 무조건 행복한 건 아니었다. 집은 삶을 비추는 가장 정확한 거울처럼 느껴졌다.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 집의 공기와 크기가 달라졌다.


아빠는 버티고 또 버텼다. 하지만 결과는 냉혹했다. 도시가스가 보급되면서 등유 난방은 자리를 잃었다. 거래처는 하나둘 사라졌다. 겨울이면 전화벨이 마를 정도로 울리던 시절은 지나갔다. 가게 전화가 조용해질수록 엄마의 표정도 굳어갔다. 거래처와 전화번호를 넘길 기회가 한 번 있었지만, 아빠는 놓지 못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까지 버티기만 했다. 뒤늦게 작은 유조차를 사 대용량 등유 배달에 나섰지만 넉넉하지 않았다. 희망으로 빛나던 아빠의 뒷모습은 점점 막다른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친척들은 지방으로 거래처를 옮겨 각자 살길을 찾았고, 아빠는 홀로 자리를 지키며 자신을 잃어갔다. 그때 마음을 다잡고 기술을 배우거나 다른 일을 시작했다면, 적어도 엄마와 우리 형제의 고생을 덜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는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았다.


아빠가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잦아졌다. 취하면 전성기를 떠올렸다. “하루에 몇백을 찍던 때가 있었지.” 나는 점점 세상 물정을 알아가며 아빠가 한심하게 보였다. ‘그때 그렇게 벌었다면,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지?’ 가끔 엄마의 장부를 몰래 들여다보면 걱정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설상가상 IMF의 바람이 스쳐가며 동네마다 곡소리가 났다. 아빠는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다. “나라가 이래서 그렇다.” 탓할 대상을 찾는 동안, 수입은 끊겼다. 사실상 백수였다. 아침마다 아빠는 집을 나서며 무심하게 말했다.


“돈…”
“돈이 어디 있어!”
“돈 좀 줘.”


엄마는 마음이 약했다.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여주고 식당으로 일을 하러 나갔다. 아빠는 할 일 없이 거리를 떠돌았다. 엄마는 우리를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동생 밥을 챙겼다. 단칸방에 살던 때엔 그래도 가족이 함께 밥을 먹는 날이 많았는데, 그날들 이후로 동생은 나와 둘이 먹는 식사가 잦아졌다. 미안함이 입안에 맴돌았다. 엄마는 몸이 망가질 때까지 일했다. 옆에서 보며 ‘사람 몸이 저렇게 버틸 수 있을까’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설거지, 청소, 동생 챙김 정도였다. 돈을 벌겠다며 새벽에 일어나 전단지를 돌렸고, 주말엔 하루 종일 돌아 겨우 몇십만 원을 벌었다. 엄마는 말리지 못했다. 엄마가 말리기 전에, 나는 속으로만 바랐다. 아빠가 다시 일을 시작해 “이제 너희는 일하지 마”라고 말해주길. 그러나 그런 날은 빨리 오지 않았다.


아빠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등교 전, 자고 있는 얼굴뿐이었다. 그는 늘 밤늦게 들어왔다. 날마다 자는 뒷모습만 보았다. 답답함이 차오르던 어느 날, 나는 엄마에게 따지듯 말했다.

“왜 아빠한테 잔소리 안 해? 뭐라도 좀 하라고 해야지!”
“일하겠지…”
“무슨 일을 해요. 벌써 몇 년째인데.”


아빠의 복이라면, 이렇게 착한 엄마를 만난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착함이 가난의 최악의 조합이라고 엄마를 다그치며 원망했다.

“엄마, 평생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면 아빠한테 말 좀 해요. 일찍 들어오라고 하고, 일하라고 하고! 우리가 이렇게 사는 건 엄마 책임도 있어요. 잊지 마요.”


그 말을 뱉고 나면, 나는 늘 죄인이 되었다. 엄마는 이미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었으니까.

그 무렵 내 성적은 바닥을 향해 내동댕이쳐졌다. 학원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돈을 버는 일이라고 믿었다. 미성년자인 몸으로 돈을 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른 채, 나는 공부에서 멀어져 허황한 꿈을 좇기 시작했다. 아빠는 중간중간 일용직을 나가려 했고, 다른 일도 시도했지만 금세 집에 머물렀다. 이상하게도 아빠 곁에는 늘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다. 주말엔 물론, 평일에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빠는 경마에 빠져 있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뼈처럼 박혔다. 벌어오는 돈 하나 없이, 나약하고 무능한 서로를 위로하며 또 내일을 흘려보냈다.


어린 시절의 아빠와 나눈 아름다운 추억도 뒤로하고 아빠라는 존재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훗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장례식장에서 황당한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조문객의 발길이 뜸해졌을 무렵, 아버지와 함께 도박을 다니던 친구가 내 앞에 섰다. 그는 영정 앞에서 오랫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울더니, 내게 다가와 떨리는 목소리로 내 손을 꼭 잡았다.

“네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돈을 빌렸는데… 받을 수 있을까?”


법적으로 돌려줄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대신 갚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는 서서히 안도의 빛이 번졌다. 차갑던 손끝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나는 깨달았다. 돈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얼굴을 바꾸고, 체온을 바꾸며, 관계의 무게마저 바꿀 수 있었다.


그 기억은 생생하게 지금까지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러나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면, 현실의 아버지는 여전히 술과 빚에 허덕이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진로를 놓고 고민이 깊어졌다. 단칸방에서 벗어났던 날의 행복은 현실 앞에서 무뎌졌다. 우리는 다시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마치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한 순간에 무너질 것 같았다. 집중해서 공부하려고 했지만 할수록 내게 상처만 남겼다. 결국 평균은 계속 떨어졌다. 사람들은 내가 노력하니까 공부도 잘할 거라 착각했지만, 내 머리는 정해진 배터리처럼 한계가 있었다. 아침 전단지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리자 공부할 시간은 더 줄었고, 체력은 바닥났다. 당시 시급 4천 원은 내겐 작은 돈이 아니었다. 나는 전당포 대출 명함을 자동차 유리에 꽂으며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말로 스스로를 속였다. 사실은 돈의 노예가 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진학을 앞두고 나는 인문계와 상업고 사이에서 수없이 흔들렸다. 대학은 사치처럼 보였다. 밀어줄 든든한 어른도, 기댈 곳도 없었기에 상고를 결심했다. “빨리 취업하고 싶어요.” 그렇게 말했다. 뜻밖에도, 세상 일에 무심해 보이던 아빠가 눈에 핏줄을 세우며 반대했다.


“충분히 인문계 가고도 남는 성적인데 왜 그런 데를 가!”
“아니에요. 성적이 떨어지고 있어요. 인문계 간다고 다 대학 가는 것도 아니고, 등록금도… 자신 없어요.”
“네가 왜 돈 걱정을 해! 아빠가 알아서 할 테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인문계 가!”
“뭘 알아서 해요? 이 꼴 좀 보세요. 제발 정신 차려요!”
“뭐야? 이 자식, 감히!”


대화 도중 집을 뛰쳐나왔다.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미안함에 나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집 앞, 강북 구석의 작고 작은 대학교 운동장을 끝없이 걸었다. 반대하는 아빠를 원망하며, 원망이 다할 때까지.


어린 시절 놀이터처럼 드나들던 그 작은 대학교조차 내 성적으로는 문턱을 넘기 어려웠다. 그 사실을 인정한 순간부터, 어쩌면 나는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날, 엄마는 야간 식당 일을 나가기 전 조용히 말했다.


“아빠 말대로 한번 인문계 가보는 게 어떠니?”
“엄마까지 왜 그래요. 공부로는 안 돼요. 이 성적으로는 아무것도.”
“알아… 그래도 한 번만 해보자. 그리고 아빠도, 조금은 이해해 줘.”


엄마는 돈이 없어 초등학교도 못 다니고 공장에서 일하던 아빠의 삶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아빠에게 ‘상고’는 마치 자식이 공장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대로라면 상고를 갔어야 했지만, 나는 엄마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내가 인문계를 가면 아빠도 다시 일을 시작하지 않을까.’ 작은 기대와 함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는 달랐다. 1학년 첫 시험 평균은 60점대였다. 중학교 때는 어떻게든 75점은 유지했는데, 처참했다. 시험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노력을 안 했다면 억울하지 않았을 텐데, 최선을 다했기에 분노가 치밀었다.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구나.’ 젊고 미래가 펼쳐진 나이였지만, 그날의 시험지는 내게 속삭였다.


'너의 인생 평균은 하위권일 거야. 애쓰지 말고 포기해.'


아빠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춘기 소년처럼 방황했다. 그러던 어느 저녁, 집 전화가 울렸다.

“아들이지? 어머니가 쓰러져서 병원으로 가는 중이니 빨리 와라.”


식당 사장님의 다급한 목소리에 몸이 얼어붙었다. 쉴 새 없이 일만 하던 엄마, 최근 더 야위어 가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생 손을 잡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환자복을 입고 링거를 맞고 있었다. 사장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네 엄마, 영양실조란다.”


이 시대에 영양실조라니. 눈물이 쏟아졌다. 이렇게 일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나아지는 것도 없는데, 엄마 몸이 무너진 뒤에야 나는 멈춰 섰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현실이 지독히도 싫었다. 일을 안 하는 아빠보다, 그 순간만큼은 돈이 더 미웠다. 돈이 엄마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믿고 싶었다. 축 늘어진 엄마의 거친 손을 잡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돈을 벌겠다.'


엄마가 퇴원하고 며칠 뒤, 나는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가 자진 퇴학을 했다. 엄마가 쓰러진 뒤라서였는지,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 때문에 힘들다면 돈을 빨리 벌어야 한다는 내 결정이 안타까웠겠지만, 그를 탓할 자격이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쳐 있었다.


그렇게 나는, 돈 때문에, 스스로 열일곱의 미성년 노동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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