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 위에 만들어진 아파트, 버티기 위해 감당해야 했던 무게들
악몽을 잠시 뒤로 밀어 두고 오랜만에 동네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내가 만든 악몽은 아직도 눈꺼풀 뒤에 눅눅하게 남아 있었지만, 오랫동안 내 삶의 뿌리였던 친구들을 만나는 순간만큼은 그 잔해들을 조금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같은 골목에서 서로의 울음과 웃음을 다 알고 지냈던 녀석들. 감출 것도, 감춰지는 것도 없었던 관계. 그런 사람들과 마시는 술 한 잔은 언제나 내게 ‘살아 있음’이라는 감각을 느끼게 했다.
열 명이 넘던 무리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서서히 걸러졌다. 어떤 친구는 타인의 아픔을 농담 삼아 소비했고, 또 누구는 시샘 어린 말투로 상처만 남겼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 떠난 사람들은 어느새 기억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결국 남은 건 마음의 결이 서로 닮은 우리 셋뿐이었다.
강북, 그것도 경기도와 경계선인 서울의 끝자락에서 자란 우리는 얼핏 비슷해 보였지만, 나는 늘 친구들보다 형편이 한참 못 미친다는 피해의식 속에 살았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은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숨기며 살아왔던 습관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괜히 더 씩씩한 척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웃으며 넘기려 했던 날들이 많았다. 그래도 세월이 흘러 집 한 채를 사고, 직업 군인이 되어 안정적인 급여를 받기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친구들에게 술 한 잔을 쿨하게 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깨를 조금은 편 채 말이다.
영만이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뛰어들었다. 어린 나이에 부장이 되었고, 이제는 억대 연봉을 받는다. 억대 연봉은 믿기지 않았다. 영만은 병사로 입대하기 전 잠시 일했던 작은 모임 카페의 사장님이 만든 회사에 취직을 했다. 하사보다도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영만을 보며 ‘대체 저게 사는 건가?’ 싶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영만은 늘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나는 사장님 하나 보고 가는 거야. 아직도 정말 보고 배울 점이 많아.”
나는 그 말이 늘 신기했다. 내가 몸 담은 울타리는 언제나 경계해야 했고, 믿을 사람을 찾기는 힘들었다. 혼자 버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이리저리 치이면서 몸으로 배웠다. 하지만 영만이는 스무 살 초반부터 인생의 대선배를 만나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게 항상 부러웠다. 뭔가 두렵지 않은 사람처럼 보여서. 결국 그 작은 구멍가게 같던 회사는 해마다 몸집을 불려 갔고, 영만이도 그 성장 속도에 맞춰 계속 성장했다.
임원급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하면서 영만이는 단 한 번도 사장님을 욕하지 않았다. 회사가 잠시 어려워서 월급이 몇 달 밀려도 담담하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 믿음과 성실함 그리고 작은 회사를 함께 성장시킨 경험은 영만이의 무기가 되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아주 강력한 무기. 나는 옆에서 그의 성장을 지켜보며 그가 가진 무기의 실체를 궁금해했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무기는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연차가 쌓이고 호봉이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서열이 올라가는 군대. 열심히 하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나 월급은 모두에게 평등한 그곳에서 내가 가진 무기는 없었다. 영화처럼 직업군인이라면 모두가 무서워할 신체적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사회가 우리의 경험과 고생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반면 사회는 능력에 대한 아주 정확한 보상을 주는 듯했다. 연봉을 넘는 성과급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남자 인생에도 격이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영만이도 어느 순간 조금 거만해진 듯한 말투와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의 높이를 이제 알고 있다는 듯, 내게 추락은 절대 없다는 오만함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동훈이는 영만이와는 다른 존재였다. 내 오랜 버팀목. 말이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읽히지 않는 얼굴. 하지만 그런 모습의 동훈이 나는 좋았다. 사람들 틈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듯 보이는 표정 뒤에, 누구보다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동훈이는 내 말을 유난히 잘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입은 그 앞에서 항상 바빴다. 가끔은 듣기만 하는 그 모습이 미울 때도 있었지만, 고시에 번번이 낙방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던 동훈에게 이런저런 것을 요구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기다렸다. 그가 언젠가 스스로 말할 그날을.
학창 시절 동훈은 공부를 잘했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암기력과 수학능력이 우수했다. 같이 시험공부를 하면 딴짓을 하다가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면 만점 수준으로 성적이 나왔다. 그 옆에서 뜬 눈으로 밤을 보내며 공부한 나는 언제나 중간 언저리였다. 나는 당연히 동훈이가 영만이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무슨 일인지 동훈은 수능을 망치고 말았다. 그때 처음으로 동훈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다. 평소 감정표현을 하지 않던 동훈도 그때는 무너져 내렸다. 동훈의 방황은 생각보다 길었다. 나와 함께 동반입대로 군대를 갔고, 그곳에서 나는 군인이 되고 동훈은 제대하고 세무 관련 대학에 입학해서 세무사가 되기 위해 한참 동안 공부를 했다.
동훈이가 옆에서 나를 조용히 응원한 것처럼 나도 그를 조용히 응원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좋은 성과가 없었다. 그때는 조용히 동훈이게 소주 한잔을 사주며 아무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워줬다. 결국 이십 대 끝자락이 되어서야 시험을 접고 회사에 취직했다. 그때부터 동훈의 입이 조금씩 열렸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군 간부로 지낸 내가 듣기엔 사소한 회사 이야기였지만, 그에게는 아마 오랜 침묵 끝에 비로소 꺼낸 삶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동안 듣지 못했던 만큼 천천히 조용히 진심으로 들어주었다.
한편으로는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동안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을까.’ 꼭 필요한 말만 하라고, 성과나 자랑거리가 없으면 조용히 입을 닫고 살라고 누군가 동훈이를 세뇌한 것 같았다. 말을 아꼈던 이유는 아마도 그래 서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이 시간이 흘러 이제 우리는 서로의 삶을 조용히 들어주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동훈이는 우리 셋 중 가장 평범하고, 그래서 더 안정적으로 보였다. 첫사랑과 오랜 연애를 끝내고 결혼까지 이어간 여정은 잔잔했지만,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단단함이 있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잘 지냈냐?”
“뭐, 늘 똑같지. 나… 본부장으로 승진할 것 같아.”
“야, 그게 말이 되냐? 서른 초반에 본부장이면… 연봉 진짜 억 넘겠네?”
“돈이 뭐가 중요하냐. 그래도 불안하긴 해. 회사가 커지면서 능력자들이 계속 들어오는데, 진짜 대단한 사람들 많더라.”
돈이 뭐가 중요하냐는 그 말은 충분히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여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기에 부러움 삼키고 영만의 얼굴을 바라봤다. 동훈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박자를 맞춰가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너도 그런 말을 하네. 세상에 잘난 사람 많지.”
“나는 사장님한테 인정받은 것 말고 가진 게 없어. 근데 요즘 겸직하면서 고생했더니 사장님이 선물 하나 주시더라.”
“선물? 동원 참치 세트?”
“미친놈. 여기가 군대냐.”
“나는 참치 세트도 부럽던데 군대에서 명절 선물은 주요 직위자만 줘.”
“네가 정말 고생이 많다. 나라 지키느라고. 사장님이 차를 사주셨어.”
'차'라는 말에 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설마 자동차를 말하는 건가? 근데 자랑하고 있으니 먹는 차를 받았다고 농담을 던질 영만이 아니었다.
“차…? 혹시 자동차를 선물했다고?”
“겸직 한 네 개쯤 하면 아파트도 사주시겠다.”
“진짜 잘하나 보다 너.”
나와 동훈이 비행기를 태워주자 뻘쭘했는지 영만은 자연스럽게 시선은 내게로 돌리며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이미 우리들의 표정에서 부러움을 봤기에 더 이상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너 아파트 한 채 더 샀다며. 요즘 어때?”
그 질문이 나올 줄 알았지만 막상 영만이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괜히 신경이 거슬렸다. 있어 보이는 척하기에는 이미 내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동훈을 통해서 들었을 테니 영만에게도 나의 충동구매 아파트 후회 기를 말해야만 했다.
“속상하지. 열심히 한다고는 하는데…. 아빠 돌아가시고 충동적으로 산 거 같아. 급했어. 그래서 마음고생 좀 하고 있지. 그래도 덕분에 참 배우는 게 많아.”
내 말이 끝나자 영만과 동훈이는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고, 빠르게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오랜만에 웃고 떠들며 3차까지 열심히 달리다 보니 몸은 엉망이 되었지만, 정신은 오히려 개운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묘하게 살아 있는 기분. 내가 아직 버티고 있다는 기분. 생존 신고로 이보다 충만할 수 없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며칠이 지나서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계약하겠다는 분들이 있으세요.”
“집 사전점검 끝나서 안 열어줄 텐데, 안 봐도 괜찮대요?”
“네, 괜찮다고 하십니다. 계약금 바로 넣겠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들어가서 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도로소음. 물론 눈썰미가 있으면 예측은 가능하겠지만 무엇인가 내가 큰 죄를 짓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도로소음에 대해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면 지금 나는 침묵해야 할까?
내가 알겠다는 답변을 안 하고 뜸을 들이자 사장님이 귀신같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요즘 미세먼지 때문에 창문 열고 사는 사람 거의 없어요.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이렇게 싼 매물도 찾기 힘든데 서로서로 돕는 거라 생각하세요.”
"서로서로 돕는다"라는 말에 나의 죄책감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분들 연세는 어떻게 되세요?”
“중년이시고 두 분 모두 차분해 보이세요. 자녀는 이미 성인인데 지방에 있다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계좌번호 보낼게요.”
몇 분 뒤, 500만 원이 입금되었다. 이 돈이 입금되었다는 것은 설령 그분들이 계약을 파기해도 돌려받지 못함을 의미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지금 이 상황에서 집주인인 내가 손해를 볼 일은 드물었다.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있었다.
23평 구축도 2천만 원에 월 50만 원을 받고 있었는데, 신축 34평 대단지의 월세는 그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물량이 많이 풀린 비인기 지역 신축 아파트에서 그것도 도로소음에 저층을 가진 소유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격은 낮추는 것이었다. 대출로 산 아파트는 공실이 나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은행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경우, 결국 집은 은행의 것이 되어버린다. 나같이 공무원 신분에 N잡도 안 되는 경우에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한강 조망을 가진 호수들은 조금 프리미엄까지 붙어 거래되는 상황에서, 내 집은 한참 동안 조용했다. 시세를 체크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공인 바보’였는지 다시 한번 후회를 했다.
세입자를 맞춰 둔 상태에서 집단대출을 받고 보증금을 더하니 매수에 들어간 순수 비용은 3천만 원 정도였다. 마음고생을 해서 그렇지 뭐가 되었던 나의 영토가 조금 더 확장된 것은 맞는 사실이었다. 갭투자라는 구조는 영토를 더 갖고 싶어 하는 집주인과 전략적으로 거주를 선택하는 세입자들 사이에서 묘하게 시너지 효과를 냈다. 물론 깡통이라도 불안해하며 대출이 작은 집을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적당히 있으면 버틸 수 있는 구조였다.
계약서를 쓰는 당일 세입자 중년 부부는 나를 보며 젊은 사람이 참으로 부지런하다고, 돈에 빨리 눈을 뜬 것 같다고 칭찬했다. 그 말을 들을 때 조금의 죄책감이 나를 죄어 왔다.
살기에 그렇게 좋은 집이 아닐 수도 있는데…. 혹시나 너무 시끄러워서 고통을 받으면 어쩌나 마음을 쓰고 있는 건 나였다.
충동적인 분양권 매수에 마음고생을 2년 넘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2018년 나는 두 번째 집문서를 손에 넣었다. 허세를 부리면 월세가 아파트 두 곳에서 들어온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달랐다. 두 번째 아파트를 너무 저렴하게 세 놓은 바람에 은행 이자 내기 위해 내 돈을 보태야 했다. 그럼에도 2년만 버티면 달라질 거라는 희망은 놓지 않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리는 단순한 희망 하나로 버틸 수며 이 힘든 세상을 이겨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축 주변에는 아직 끝없는 흙더미와 빈 땅들이 존재했고 당장은 아니어도 내게는 기회처럼 보였다. 지금은 초라해 보여도, 언젠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마법처럼 주변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 그때가 되면 좋아진 입지 때문에 시세가 오를 거라는 희망. 아무리 늦게 출발했어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결승선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작지만 강한 믿음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