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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Nov 08. 2024

옛 서책의 미칭 황권과 운편의 식물, 황벽나무와 운향

황벽黃檗, 운향芸香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4년 9/10월>

서책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옛 한자어 중에 황권黃卷과 운편芸編이 있다. 나는 10여년 전, 산골에서 주경야독하신 조부님 문집 <경와유고>를 번역하면서 이 낱말들을 처음 만났다. ‘산골 집에서 깨달음 (山齋悟言)’의 “좋은 손님 만나면 서책을 이야기하고, 맑은 바람 맞아 흰 구름 쓸었네 (常因佳客題黃卷 每得淸風掃白雲)”라는 구절에서 황권을, ‘와우산재에 쓴다 (題臥牛山齋)’의 “아침에 언덕 밭 갈아 몸은 굶주리지 않고, 밤에 책 마주하니 뜻은 괴롭지 않아라 (朝畊壟畒身無餒 夜對芸編意不艱)”에서 운편을 보았던 것이다.


두 단어 모두 현대의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어서 뜻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큰사전>에서는 “황권(黃卷) [이] 서책을 가리키는 말. 옛날에 책에 좀을 막기 위하여 황경나무의 잎으로 누른 물을 들인 종이로 책의를 한 까닭.”, “운편(芸編) [이] “서책(書冊)”의 아름다운 일컬음. 옛적에는 책에 좀먹음을 막기 위하여 책 장 사이에 궁궁이(芸草)의 잎을 넣어 두었던 데에서 온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나는 황권과 운편이 서책을 뜻하는 것을 안 것으로 만족하고, 좀을 막는 데 사용한 식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주석백미고사> 권6, 문학부/경적류 - 황권, 운편


몇 달 전에 장유승 교수의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이라는 책을 읽었다. 1장이 ‘손안의 백과사전-백미고사’였다. 마침 나도 잔권 1책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서 더 흥미로웠다. 이른바 세월이 지나도 가치가 오르지 않는 싸구려 섭치로 분류되는 고서인데, 이 고서가 옛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 지에 대한 장유승 교수의 눈밝은 해설이 인상적이었다. 서재 구석에서 <유록類錄-三>이라는 표제가 쓰인 <주석백미고사>를 찾아서 펼쳤다. 몇 장 넘기는데 마침 황권黃卷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권6(卷之六)의 첫째 장, 문학부文學部/경적류經籍類의 첫 부분이다. 또 한 장을 넘기니 운편芸編도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자세히 읽어 보았다.



황권黃卷) 둔재한람遯齋閑覽. 옛 사람들이 책을 베낄 때 모두 노란 종이를 썼다. 황벽黃蘗으로 종이를 물들여서 좀벌레를 피했으므로 황권黃卷이라고 한다. 오자誤字가 있으면 자황雌黃으로 지웠다.*


운편芸編) 육첩六帖. 운초芸草 향으로 좀을 피할 수 있다. 장서가들이 사용하여 책에 이 향기를 배게 한다고 해서 책을 운편이라고 한다. 고시에 “운초 잎으로 향기를 배게 하여 좀벌레를 쫓는다. (芸葉薰香走蠹魚)”가 있다.**



이 <백미고사>의 기사는 각각 황벽黃蘗과 운초芸草가 좀벌레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황권과 운편이 서책을 뜻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좀벌레가 싫어하는 황벽과 운초가 어떤 식물일까?


황벽나무 (2022.6.5 오산 물향기수목원)


먼저 황벽黃蘗에 대해 알아보자. 황벽黃蘗은 현재에도 우리가 황벽나무(Phellodendron amurense)로 부르는 나무이다. 황벽黃檗과 통한다. <한국 식물명의 유래>를 보면, ‘황경나무’와 ‘황경피나무’ 모두 황벽나무의 이명이라고 했다. <중약대사전>에서는 황벽黃檗(黃柏)은 황벽나무를 뜻하고, <식물의 한자어원사전>에서도 황벽黃檗(檗, 黃柏)은 황벽나무를 뜻한다. <훈몽자회>에 “蘗 황벽피 벽”, <동의보감> 탕액편에 “黃蘗 황벽나모 겁질”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로 나오는 등 우리나라에서도 이 나무는 언제나 황벽나무를 뜻했다. <조선식물향명집>에서는 Phellodendron amurense의 한자명으로 黃檗(黃柏)을 채록하고 한글로 ‘황경피나무’를 기록했다. 그후 <한국식물도감>에서 황벽나무로 이름을 바꾸었다. 즉 중국과 일본, 우리나라에서 황벽黃檗이 가리키는 나무는 같았다. 아마도 황벽나무가 세 나라에 모두 자생하고, 실제 종이를 물들이는 황색염료로 쓰였기 때문에 혼동이 없었던 듯하다.***


궁궁이 (2022.9.12 화악산)


다음으로 운초芸草에 대해 살펴본다. <큰사전>에서 운초의 우리말 이름을 ‘궁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궁궁이는 <조선식물향명집>에서 Angelica polymorpa의 향명으로 수록된 후 지금도 쓰이는 식물명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운초가 궁궁이일까? 그러나 <물명고>에서는 ‘궁궁芎藭’을 ‘궁궁이’라고 했다. 그러나 별도로 ‘훈초薰草’를 설명하는 부분에 ‘운芸’을 수록하고 있으므로, 유희 선생은 운초를 궁궁이로 이해하지는 않은 듯하다. 즉, “운芸. 노란 꽃에 잎은 콩이나 자주개자리(苜蓿) 같다. 이것은 훈薰과 한 종류일지도 모르겠다. 우운牛芸, 권황화權黃華와 같다.”****이라고 하여 운초의 우리말을 기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훈초薰草의 일종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Rue - Jenny Linford, "Guide to Herbs, A comperhensive guide to herbs and their uses," Parragon, 2012


1937년에 간행된 <선한약물학>에서는 “운향芸香. Ruta[羅]. 운향과에 속한 다년생 향초 헨루우다(ヘンルウダ)의 잎이니 줄기의 키가 1~2척이요, 하부는 목질상을 이루며 잎은 회록색灰綠色 우상복엽으로 호생했는데 ….”*****라고 기록했다. ‘ヘンルウダ’는 현대 일본에서는 ‘ヘンルーダ’라고 하며 학명은 Ruta graveolens이다. <식물의 한자어원사전>에서는 운향芸香(이명 운芸, 운호芸蒿, 취초臭草)의 학명을 Ruta graveolens로 표기하고, “고대에는 궁중의 정원에 심었다. 잎을 장서용의 좀벌레 방제용(衣魚除)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서고를 운각芸閣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하여, 운편芸編과 운향의 관계를 보여준다. <중약대사전>에서도 운향芸香의 학명을 Ruta graveolens라고 했다.


Ruta graveolens은 영어로 common rue 혹은 rue이다. 2006년 간행된 이영노의 <한국식물도감>에서는 ‘운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재식하는 식물로 수록했다. 유럽 남부 원산으로 꽃은 노란색, 잎은 1~2회 깃꼴로 갈라지며, 작은 잎은 타원형 또는 주걱모양이라고 한다. 노란 꽃이 피고 목숙과 비슷한 잎이라고 설명한 <물명고>의 운芸은 바로 이 운향을 가리키는 듯하다. 현대 이름이 ‘자주개자리(Medicago sativa L.)’인 콩과 식물 목숙의 잎은 언뜻 보면 운향 잎과 비슷하다. .


자주개자리/목숙 (2022.5.12 성남)


아마도 <큰사전>에서 운편芸編의 식물 운초를 궁궁이라고 한 것은 식물명에 대한 혼동 때문일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에 자생하거나 도입되지 않은 식물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그 실체를 밝히기가 어려웠던 점을 말해준다. 어쨌던 중국에서 좀벌레로부터 서책을 보호하는 데 사용했던 운향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루타’ 혹은 ‘루’라는 이름으로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Ruta graveolens’는 운향과(Rutaceae)와 운향속(Ruta) 이름의 기원이 된 원 식물이므로 ‘루타’나 ‘루’보다는 이영노의 <한국식물도감> 처럼 ‘운향’으로 부르면 더 운치 있을 듯하다.


안동 도산의 산골 마을에서 주경야독했던 시골 선비, 경와敬窩 권호윤權鎬胤(1913~1972)의 글 중에서 ‘운편芸編’이 나오는 시 전편을 읽어본다. 제목은 ‘와우산재에 쓴다 (題臥牛山齋)’이다.


龍峀東馳闢一山  용두산 동으로 뻗어 산 하나 열었는데

山如牛臥抱林關  소가 누워 수풀을 품은 관문 같아라

朝畊壟畒身無餒  아침에 언덕 밭 갈아 몸은 굶주리지 않고

夜對芸編意不艱  밤에 책 마주하니 뜻은 괴롭지 않아라

雨歇巖崖泉奏響  비 갠 벼랑에서 샘물 소리 들리는데

月窺墻角壁生顔  담 모퉁이 달 비추자 벽에 비친 얼굴

誰知這裡幽人趣  이 속의 유인幽人 정취 누가 알리요

只看靑芽雜砌間  섬돌 사이 푸른 새싹만 바라보노라!


황벽나무 잎과 수피 (좌 - 2021.9.11 소백산, 우 - 2024.2.13 문경새재)


황벽나무는 제주와 전라남도를 제외한 전국의 산야에 자라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나무이다. 우리나라 자생 종 가운데 굴참나무, 개살구나무와 더불어 수피에 코르크질이 발달하는 대표적인 나무이고, 우상복엽 잎이 마주나는 나무로 나도 꽤 자주 감상했던 나무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백미고사에서 서책을 뜻하는 단어 황권과 운편의 식물이 모두 운향과 식물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니 운향과 식물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내가 지금껏 만났던 운향과 식물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본다. 산초나무, 초피나무, 왕초피, 개산초, 머귀나무, 황벽나무, 쉬나무, 탱자나무, 귤나무, 상산, 백선! 상산은 잎이 2개씩 한쪽으로 어긋나는 상산형 잎으로도 유명하다. 


좌-상산 (2022.8.12 제주도)과 우-백선 (2022.7.9 영월)


나는 식물도감과 사진으로만 찾아보았던 운향을 직접 감상하기 위해 무더웠던 지난 추석 연휴 기간 중, 성묘차 안동 다녀오는 길에 봉화의 백두대간수목원으로 향했다. 여름보다 더 뜨거운 햇살 속에 땀을 뻘뻘 흘리며 수목원 온실에 도착하여,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조바심을 치면서 온갖 진귀한 식물을 살펴보다가 운향을 만났다. 잎 모양으로 운향임을 알아챘을 때의 기쁨은 식물애호가들은 알 것이다. 운향 잎들 사이로 겨우 보이는 자그마한 팻말에도 Ruta가 보였다. 노란색으로 피었을 꽃은 없고 대신 꼬투리 끝이 4갈래로 벌어진 자그마한 열매가 말라가고 있었다. 운향을 보니 잎사귀 한 두어 개 말려서 책 사이에 넣어 두고 싶어졌다. 우리나라에 운향을 대량으로 재배하는 곳도 있을 것이니, 언젠가는 운향 잎을 구해 운편 한권을 서재에 보관해야겠다. 그때까지 우선 궁궁이 잎이라도 구해서 말려봐야겠다.


운향 꽃 (사진-최동기 선생 제공)
운향 잎과 열매 (2024.9.15 백두대간수목원)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통권212호, 2024년 9/10월, pp.76~83>


* 黃卷) 遯齋閑覽 古人寫書 皆用黃紙 用黃蘗染之以辟蠹 故曰黃卷 有誤字以雌黃滅之 - 註釋白眉故事, 卷之六, 文學部, 經籍類. (遯齋閑覽 : 북송北宋 때 범정민范正敏이 지은 책.)

** 芸編) 六帖 芸草香能辟蠹 藏書者輒以薰之 故書曰芸編 古詩芸葉薰香走蠹魚 - 註釋白眉故事, 卷之六, 文學部, 經籍類. (六帖 : 당唐 나라 때 白居易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類書, <白氏經史事類六帖 >의 약칭, ??추가 원전 확인 필요)

*** "황색염료에는 울금, 황벽, 치자, 닭의장풀 등이 사용되었는데 울금과 황벽을 이용한 황색염은 의복뿐만 아니라 서첩을 만드는 종이 등에 널리 사용되었고 치자 색소는 지금까지도 음식물에 사용되고 있다." - <조선조 후기 궁중 복식 - 영왕 복식 중심>, 문화재청 궁중유물전시관, 1999. p.229

****芸. 黃花 葉如菽蓿 此恐與薰一類 牛芸 權黃華 仝 – 물명고

***** 芸香 Ruta[羅]  “운향과에 속한 다년생 향초 ヘンルウダ의 葉이니 莖의 高가 一二尺이요, 하부는 목질상을 成햇스며 葉은 灰綠色 우상복엽으로 호생햇는데 ….” – 선한약물학

+표지사진 - 운향 (2024.9.15 백두대간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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