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가시나무와 만병초
머리에 석남(石南)꽃을 꽂고
내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너도 죽어서……
너 죽는 바람에
내가 깨어나면
내 깨는 바람에
너도 깨어나서……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꺼나,
죽어서도 살아나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꺼나.
서정주의 시 소연가小戀歌 이다. 노회찬 전 의원이 불러서 인구에 회자되었던 시이다. 이 시의 모티프인 석남 꽃은 낯 선 이름이라 꽃의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랑 이야기 중 하나를 감상하면서 어떤 꽃인지 추적해 보기로 하자.
“신라 최항崔伉의 자字는 석남石枏인데,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부모가 막아서 만나지 못한 지 몇 개월 만에 항이 갑자기 죽었다. 8일이 지난 밤중에 항이 여인의 집으로 갔는데, 여인은 그가 죽은 줄 모르고 기쁘게 맞이했다. 항은 머리에 석남 가지를 꽂고 있었는데, 여인에게 나누어주며, “부모님께서 당신과 같이 사는 것을 허락했다오. 그래서 내가 온 것이라오.”라고 말하고는 여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항은 담을 넘어서 들어갔는데, 날이 다 새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집안 사람이 나와서 여인을 보고 온 연유를 물으니, 여인이 자세히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 집안 사람이, “우리 항은 죽은 지 8일이 되었소, 오늘 장례를 치를려고 하는데, 무슨 괴상한 말을 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인은, “낭군께서는 저에게 석남 가지를 나누어 꽂아 주셨으니, 이것으로 증거를 삼아주세요.”라고 말했다. 마침내 관을 열어 보니, 시신의 머리에 석남이 꽂혀 있는데, 옷은 이슬에 젖어있고 신발을 신고 있었다. 여인이 그가 죽은 것을 알고 통곡하다가 기절하려고 할 즈음에 항이 다시 살아났다. 그 둘은 삼십 년을 함께 살다가 죽었다.”
이 석남꽃 이야기는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에 실려 있는데, <신라수이전>에서 인용한 이야기 한토막이다. 수이전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최치원이 지은 글이라고 한다. <우리말큰사전>을 찾아보면, 석남(石南, 石楠)은 진달래과의 각시석남이나 만병초로나온다. <한국의나무>를 보면, 진달래과의 각시석남(장지석남, Andromeda polifolia L.)은 한반도에서는 함경남도의 산지에 자생하고, 만병초(Rhododendron brachycarpum)도 지리산 이북의 높은 산지와 울릉도에서 자란다고 한다. 신라 사람 최항이 머리에 꽂은 석남이 함경남도에 자라는 식물인 각시석남은 아닐 것 같지만, 만병초를 말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하겠다.
<동의보감> 탕액편에도 석남엽石南葉이 약재로 나오는데, “근골과 피부의 풍風에 주로 쓴다. 신腎을 기르고 음陰을 강하게 하며, 다리가 약한 것을 고친다. 이 약은 종남산終南山 돌 위에서 자라는데 비파나무 잎 같으나 털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름 앞에 ‘당唐’이라는 중국산 약재 표시를 하고 있다. 보통 한방에서는 이 석남을 만병초로 보는 듯하다. <선한약물학>에서도 ‘만병초’라고 적었다. 유희의 <물명고>도 “석남石楠, 종남산 돌 위에서 자라는데 비파나무 잎 같으나 털이 없다”고 하여 정확히 <동의보감>의 설명과 일치한다. <광재물보>에는 좀 더 자세히, “석남은 돌 위에서 자라고 잎은 비파나무와 비슷한데, 위에 작은 가시가 있고, 겨울을 지나도록 시들지 않는다. 봄에 흰 꽃이 피고, 가을에 작은 붉은 열매를 맺는다. 차로 대용할 수 있고, 두풍을 고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의 설명은 모두 중국 문헌을 인용한 것인데, <본초강목>의 석남 설명을 살펴보자.
“석남石南, 돌 사이의 양지에서 자라므로 이름이 석남이다. … 강호江湖 사이에서 자라는 것은 잎이 비파나무 같은데, 위에 작은 가시가 있고 겨울이 지나도 시들지 않는다. 봄에 흰 꽃이 무리를 이루어 피고 가을에 작은 붉은 열매를 맺는다. … 석남 잎은 비파나무 잎 작은 것과 비슷한데 잎 뒤에 털이 없고 빛이 나며 주름이 없다. 정월과 이월 사이에 꽃이 핀다. 겨울에는 두 잎이 화포(花苞, 꽃턱잎)가 된다. 턱잎이 열리면 그 안에 15개 정도의 꽃이 있는데 크기는 참죽나무 꽃과 같이 매우 자잘하다. 매 포苞 하나마다 대략 탄알 정도 크기의 공 모양을 이룬다. 꽃 하나에 꽃잎이 여섯 개이고 한 떨기에는 7~8개의 공이 있으며, 담백한 녹색이다. 잎 끝은 조금 엷은 붉은색이다. 꽃이 피면 꽃술이 꽃에 가득하여 꽃술만 보이고 꽃은 보이지 않는다. 꽃이 질 무렵 지난 해의 녹색 잎은 모두 떨어지고 점차 새 잎이 난다.” ****
이 설명을 읽어보면, 석남이 상록수인 점과 잎 모양에서 만병초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꽃에 대한 묘사를 보면 만병초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중약대사전>을 참조하면, 석남엽石南葉은 석남엽石楠葉, 홍수엽紅樹葉 등으로 불리고, 석남(石楠, Photinia serrulata Lindl.)의 잎이라고 했다. <중국식물지>를 보면 Photinia속의 여러 식물에 석남石楠 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데, 이중 광엽석남(光葉石楠, Photinia glabra (Thunb.) Maxim.)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관상용으로 식재하는 홍가시나무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동의보감>이나 <광재물보>, <물명고> 등의 석남도 중국 문헌의 설명을 차용하고 있으므로 Photinia속, 즉 홍가시나무속의 식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신라수이전>의 석남도 당나라 유학을 하여 중국 문헌에 익숙한 최치원이 지었을 경우 만병초보다는 홍가시나무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한국의나무>에 의하면, 장미과 홍가시나무는 중국, 일본, 대만 등이 원산지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제주 및 남부지방에 울타리, 관상용으로 비교적 흔하게 식재하고 있다. … 5~6월에 지름 1cm 정도인 백색의 꽃이 복산방꽃차례에 빽빽이 모여 달린다”고 했다. 반면 진달래과 만병초는 “6~7월에 가지 끝에서 나온 꽃차례에 백색 또는 연한 홍색의 양성화가 5~15개씩 달린다”고 했다. 이와 같이 홍가시나무나 만병초의 개화기는 초여름이고, <신라수이전>의 배경은 이슬이 내리는 계절이므로, 당시 최항은 석남 꽃이 아니라 가지를 꺽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럴 경우에도 만병초보다는 홍가시나무가 더 어울려 보인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의종 정축 (1157) 년의 울릉도에 대한 다음 기록에 나오는 석남초(石南草)는 울릉도에 자생하는 나무일 것이므로 만병초이다.
“왕이 동해 가운데 우릉도(羽陵島 울릉도)가 있는데, 땅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여 옛날에는 주州와 현縣이 있었던 곳이고 백성이 살 만하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시찰하게 하였다. 유립이 돌아와 아뢰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마루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가면 1만여 걸음이고, 서쪽으로 가면 1만 3천여 걸음이며, 남쪽으로 가면 1만 5천여 걸음이고, 북쪽으로 가면 8천여 걸음입니다. 촌락 터가 일곱 군데가 있고, 석불과 철종鐵鍾, 석탑이 있으며, 시호柴胡, 고본蒿本, 석남초石南草가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위와 돌이 많아서 백성이 살 수 없습니다." 하여, 드디어 그 논의를 정지했다.”*****
참고로 <식물의 한자어원사전>을 보면, 일본에서는 석남화石楠花가 진달래과 Rhododendron속의 만병초 류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로 보면,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석남으로 만병초를 가리켰을 수도 있다. 이렇듯, 고전 속의 식물 이름은 정확히 무엇인지 밝히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수이전의 석남이 무엇인지도 불확실해져버렸다. 하지만, 홍가시나무든 만병초든 경주에 자생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신라시대 당시에도 석남은 대가집 정원을 장식하는 나무로 가꾸어진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나는 꽤 오래 전 포천의 평강식물원에 갔을 때 만병초 꽃을 처음 보았고, 몇 해 전 스웨덴에서도 정원을 장식하는 만병초 꽃을 감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직 만병초 꽃을 자생지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언젠가는 숲 속에서 꽃이 풍성하게 활짝 핀 만병초를 만나 그 멋진 모습을 찍어보고 싶다.
<끝, 2019.5.23 페이스북 노트에 올렸던 내용을 2021년 1월 보완함>
*新羅崔伉字石南 有愛妾 父母禁之 不得見數月 伉暴死 經八日夜中 伉往妾家 妾不知其死也 顚喜迎接 伉首揷石枏枝 分與妾曰 父母許與汝同居 故來耳 遂與妾還到其家 伉踰垣而入 夜將曉 久無消息 家人出見之 問來由 妾具說 家人曰 伉死八日 今日欲葬 何說怪事 妾曰 良人與我 分揷石枏枝 可以此爲驗 於是 開棺視之 屍首揷石枏 露濕衣裳 履已穿矣 妾知其死 痛哭欲絶 伉乃還蘇 偕老三十年而終 - 首揷石枏, 大東韻府群玉 <대동운부군옥>
**石南葉, 主筋骨皮膚風 養腎强陰 療脚弱 此藥生終南山石上 如枇杷葉 無毛 <동의보감>
***石南, 生石上葉如枇杷 上有小刺凌冬不凋 春生白花 秋結細紅實 可充茗又可愈頭風 <광재물보>
****石南, 生于石間向陽之處 故名石南 … 江湖間出者 葉如枇杷 上有小刺 凌冬不凋 春生白花成簇 秋結細紅實 …. 石南葉似枇杷葉之小者 而背無毛 光而不皺 正二月間開花 冬有二葉為花苞 苞既開 中有十五餘花 大小如椿花 甚細碎 每一苞約彈許大 成一毬 一花六葉 一朵有七八毬 淡白綠色 葉末微淡赤色 花既開 蕊滿花 但見蕊不見花 花纔罷 去年綠葉盡脫落 漸生新葉 <본초강목>
*****王 聞東海中 有羽陵島 地廣土肥 舊有州縣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金柔立往視 柔立回奏 島中有大山 從山頂 向東 行至海一萬餘步 向西 行一萬三千餘步 向南 行一萬五千餘步 向北 行八千餘步 有村落基址七所 有石佛鐵鍾石塔 多生柴胡 蒿本 石南草 然土多巖石 民不可居 遂寢其議 <고려사절요>
絶壑爭攢海松樹 깎아지른 골짝에 해송이 모였고
陰崖時發石枏花 그늘진 언덕엔 석남화가 피었네
高田往往人耕種 높은 밭엔 종종 사람들 경작하고
隔水遙看三兩家 물 건너 두세 집이 멀리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