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부용木芙蓉, 거상화拒霜花, 연꽃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편찬한 책 중에 1965년 신구문화사에서 발행한 <꽃다발>이 있다. 선장본線裝本은 아니지만, 사주쌍변四周雙邊이 있고 어미魚尾와 판심제版心題를 달고 있어서 고서의 아취가 느껴지는 책이다. 이 책의 부제가 ‘한국여류시찬역韓國女流詩撰譯’ 인데, 주로 조선시대 여류 시인들의 한시를 번역한 것이다. 허난설헌 등 사대부 집안의 여류 시인도 있지만 황진이나 매창, 옥봉 등 소위 시기詩妓로 불린 기생들의 시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평안남도 성천의 기생 부용芙蓉이 지은 ‘봄바람 (春風起)’ 등을 읽고서 부용芙蓉이 무슨 꽃일까 오랫동안 궁금했었다.
垂楊深處倚窓開 실버들은 빈 뜰에 휘늘어지고
小院無人長綠苔 이끼는 혼자 자라 푸르른 것을
簾外時聞風自起 봄 바람은 무어라 까불이는가
幾回錯認故人來 님 오는가 空然이 내가 속나니
부용芙蓉은 대개 연꽃을 뜻하지만, 현재 우리가 부용이라는 부르는 무궁화속 꽃일 수도 있다. 부용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무궁화속의 부용에도 초본과 목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중부지방에서 주로 만날 수 있는 초본은 미국 원산의 미국부용++으로 불리고, 중국 원산의 목본 부용(Hibiscus mutabilis L.)은 주로 제주도에서 자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작년 여름에는 강남대로를 걷다가 연분홍 어여쁜 미국부용을 만나기도 했지만 목본 부용은 중부지방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지난 7월 초 영월 여행에서 정말 화사하게 핀 미국부용을 감상한 후에는 남쪽 지방에만 자란다는 목본 부용이 더욱 보고 싶어졌다.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중순 제주도 여행에서 드디어 도로변에 활짝 핀 부용을 만났다. 너무 반가워서 곧장 가까운 공터에 차를 세웠다. 부용 꽃을 보면서 먼저 밑동을 찾아 나무인지부터 확인했다. 도감에서 여러 번 봤던 벽오동 잎처럼 네다섯 군데 갈라진 잎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리저리 꽃을 감상했다. 모란이나 작약 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상한 기품이 스며있는 연분홍색 꽃이, 과연 부용이구나! 홀로 감탄했다.
<본초강목>에 연蓮의 다양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연꽃(Nelumbo nucifera Gaertner)의 이름과 관련한 부분만 발췌해본다. “연꽃(蓮,藕). 뿌리는 우藕, 열매는 연蓮, 줄기와 잎은 하荷이다. … 부거芙蕖는 총명總名이다. 별명은 부용芙蓉이다. … 함담菡萏은 연꽃(蓮花)이다. … 강동江東 사람들은 연꽃(荷花)을 부용芙蓉이라고 부른다. … 꽃이 피지 않으면 함담菡萏이 되고, 이미 피면 부거芙蕖가 된다. … 함담菡萏은 피지 않아서 함函으로 합쳐져 있다는 뜻이다. 부용芙蓉은 고운 모습을 펴서 베풀었다는 뜻이다.”* 역시 연꽃은 옛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낀 꽃이어서 인지 이름도 다양한데, 부용芙蓉은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문인들도 대개 부용芙蓉으로 연꽃을 가리켰다. 앞에서 소개한 성천 기생 부용도 “부용이 활짝 피어 연못 가득 붉은데, 사람들은 부용이 나보다 곱다 하네 (芙蓉花發滿池紅 人道芙蓉勝妾容)”라는 시구를 남긴 것으로 보아 연꽃을 가리킨 것이다. 그렇다면 제주도에서 감상한 무궁화속의 부용은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낙하생집洛下生集에는 부용에 대한 다음 기록이 있다.
“부용에는 네 종류가 있다. 연꽃(蓮華)이 부용이다. 거상화拒霜花도 부용으로 부른다. 이른바 ‘가을 강 가에 자라고 있는 부용은, 봄바람에 피지 않음을 원망하지 않네 (芙蓉生在秋江上 莫向春風怨未開)’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신이화辛夷花 또한 부용이라고 한다. 이른바 ‘나무 끝의 부용화가 산 속에서 붉게 피었네 (木末芙蓉花 山中發紅萼)’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풀꽃에도 부용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누군가 이학규에게 목련이 부용이 아닌가 질문한 데 대한 답변이다. <광군방보>를 참조해보면 ‘부용생재추강상芙蓉生在秋江上’은 당나라 고첨高幨의 시로, 별칭이 거상화인 목부용木芙蓉 조에 수록되어 있고, ‘목말부용화木末芙蓉花’는 당나라 왕유王維(699~759)의 시로 신이辛夷 조에 실려 있다. 신이화는 자목련(Magnolia liliflora Desr.)이고, 거상화拒霜花는 무궁화속의 목부용, 즉 내가 제주도에서 감상한 부용이다. 그리고, <본초강목>은 다음과 같이 목부용을 소개하고 있다.
“목부용木芙蓉. 지부용地芙蓉, 목련木蓮, 거상拒霜이라고도 한다. 이 꽃은 연꽃처럼 고와서 부용芙蓉이나 목련木蓮 같은 이름이 있게 되었다. 8, 9월에 피기 시작하므로 거상拒霜(서리에 맞선다)이라고 이름한다. … 목부용은 곳곳에 있다. 가지를 삽목하면 곧 자라는 작은 나무이다. 줄기는 목형(荊)처럼 총생하며, 큰 것은 한 길 남짓이다. 잎은 벽오동(桐) 같이 크며, 결각이 지고 뾰족한 끝이 다섯 혹은 일곱이 있다. 가을이 깊어가며 꽃이 핀다. 꽃은 모란이나 작약 류 같이 홍紅, 백白, 황黃 색이 있고 겹꽃도 있다. 추위에 잘 견디며 지지 않으며 열매를 맺지 않는다.“***
우리나라 문헌으로,<산림경제> 양화養花 편에는 “목부용木芙蓉, 간혹 목련木蓮으로 부른다. 8월에 꽃이 핀다. 일명 거상화拒霜花이다”가 기록되어 있다. 유희柳僖의 <물명고>에는 자목련의 별칭인 신이辛夷를 설명하는 부분 마지막에 목부용木芙蓉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목부용은 가지를 삽목하면 곧 자라는 작은 나무이다. 잎은 벽오동(桐) 같이 크며, 가을이 깊어가며 꽃이 핀다. 꽃은 모란이나 작약 같이 순홍純紅 색이 먼저 피고 담홍淡紅과 백白 색이 그 다음으로 핀다. 목련木蓮, 지부용地芙蓉, 거상拒霜과 같은 것이다”**** 아마도, 자목련과 목부용이 모두 목련으로 불리기도 하여 같은 부분에 기록했을 터인데, <물명고>의 설명은 <본초강목>과 일맥상통한다. 아무튼, 이런 설명으로 보아 거상화가 바로 목부용이고 현재 우리가 부용으로 부르는 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문인들은 무궁화속의 부용을 시문에서 어떤 한자어를 썼을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부용이 대부분 연꽃의 대명사로 사용되면서, 무궁화속 부용은 거상화로 표현된 듯하다. 특히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 1418~1453)이 비해당 48영 중 하나로 거상화를 노래하면서,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어에서 거상화가 고착화되는 듯하다. 비해당 48영에 차운한 대표적인 시로 성삼문成三問(1418~1456)이 거상화를 읊은 시를 감상해본다.
最愛木芙蓉 목부용을 가장 사랑하노라
儼然君子容 엄연한 군자의 모습이라네
雪霜非所畏 눈서리도 두렵지 않으니
還似在泥中 진흙 속에 핀 연꽃인 듯하여라
영락없이 무궁화속 부용을 묘사하고 있다. 한가지 의문은 과연 남국에서 잘 자라는 목부용이 안평대군 당시 서울에 자라고 있었을까이다. 이에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 세종 29년(1447)에 “대마도 종정성宗貞盛이 야로구也老仇를 보내어 목부용木芙蓉 3그루와 양매楊梅나무(소귀나무 Myrica rubra) 1그루를 바치므로, 상림원上林園에 심으라 명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로 보면 당시 상림원에는 목부용이 있었으며, 안평대군도 그 목부용을 구해 비해당에 심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듯 부용이라는 이름을 연꽃에게 내주고 거상화라는 이름으로 줄곧 읊어졌던 무궁화속의 Hibiscus mutabilis L.은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서 한자로 부용芙蓉, 한글로 ‘부용화’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정태현 편찬의 1943년 <조선삼림식물도설>이나 <한국식물도감-목본>에는 수록되지 않다가, 1966년 임업시험장 간행 <한국수목도감>부터 ‘부용’으로 수록되어 오늘날 부용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제주도 여행 첫날에 상봉했던 부용은 마지막 날에도 곳곳에서 만나 눈길을 주었다. 서귀포 근처 어느 해안 선착장에서는 흰색 꽃이 활짝 핀 부용도 감상할 수 있어서 행운이 깃든 날인 듯 기뻤다. 앞으로도 나는 부용하면 활짝 핀 연꽃이 아니라 입추가 지난 여름날 제주도에서 감상한 부용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
<끝>
* 蓮藕. 其根藕 其實蓮 其莖葉荷 … 芙蕖總名也 別名芙蓉 … 菡萏蓮花也 … 江東人呼荷花為芙蓉 … 其花未發為菡萏 已發為芙蕖 … 菡萏 函合未發之意 芙蓉 敷布容艷之意 – 본초강목
**芙蓉有四種 荷華曰芙蓉 拒霜花亦名芙蓉 所謂芙蓉生在秋江上 莫向春風怨未開者是也 辛夷花亦名芙蓉 所謂木末芙蓉花 山中發紅萼是也 草花亦有名草芙蓉者 今吾兄所言者 木蓮也 非木芙蓉也 - 낙하생집洛下生集
*** 木芙蓉. 地芙蓉, 木蓮, … 拒霜. 時珍曰 此花艷如荷花 故有芙蓉木蓮之名 八九月始開 故名拒霜. … 木芙蓉處處有之 插條即生 小木也 其幹叢生如荊 高者丈許 其葉大如桐 有五尖及七尖者 冬凋夏茂 秋半始着花 花類牡丹芍藥 有紅者白者黃者千葉者 最耐寒而不落 不結實 – 본초강목
**** 木芙蓉. 揷条卽生 小木也 葉大如桐 秋半始華 華似牡丹芍藥 而純紅者先開 淡紅與白者次之. 木蓮, 地芙蓉, 拒霜 仝 – 물명고
*****對馬島 宗貞盛遣也老仇 獻木芙蓉三株 楊梅木株 命植于上林園 – 조선왕조실록 세종29
+표지사진 - 부용, 2022.8.12 제주도 성산
++ 이영노의 <한국식물도감>에는 미국부용(Hibiscus oculiroseus Britton)이 수록되어 있고, <국가표준재배식물목록>에는 Hibiscus moscheutos L.에 ‘미국부용’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대신 Hibiscus oculiroseus Britton에는 ‘히비스커스 오쿨리로세우스’라는 이름을 추천하고 있다. 내가 영월에서 만난 것은 Hibiscus oculiroseus일 가능성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