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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일 May 01. 2024

미루어둔 완벽한 날

여름의 끝

대학교 4학년 여름, 언론 고시에 실패하고는 동기들과 낮부터 소주를 찌끄리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겨울방학에 몽골로 가서 초원을 달리다 게르에서 자고, 러시아로 넘어가 바이칼호도 보고 오자고 했다. 대륙 어딘가에 처박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낄낄거리며 호기를 부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에서 나를 찾았다. 그날 이후, 온 집안이 구정물에 빠진 듯 생기를 잃어갔고, 이내 우리 가족은 살던 집에서 쫓겨나 변두리 늙은 빌라에 패대기쳐졌다.


그해 겨울, 나는 졸업도 하기 전에 부랴부랴 증권회사에 입사했다. 가난은, 아무리 도배를 해도 숨길 수 없는 썩은 석고보드 냄새처럼, 부지런히 가꾸어도 숨길 수 없는 끈질김과 지독함이 있었다. 징그럽게 어깨를 끌어안는 술 취한 상사의 주둥이 구린내처럼, 뿌리치지 못하고 주눅이 들게 하는 못된 힘이 있었다.

 

어찌할 방법이 없어, 그저 돈을 많이 벌면 깨어진 꿈과 가족이 예전처럼 다시 붙을 것이라는 기대만으로 버텼다. 모두가 존재하지도 않는 내 남편과 자식을 미리 반대하며 내게 빨대를 꽂았고, 나 또한 틈을 벌리고 싶지 않아 그들의 바람에 맞추어 살았다. 그렇게, 삶의 재미를 찾거나 키우는 것 같은 일들을 미루고, 발 아픈 구두 위에 올라가 또각이며 매일 발을 굴렀다. 벗어날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하지만, 삶은 늘 냉정하게 앞서갔다. 숨이 가쁘게 따라가던 어느 날, 바짓단을 잡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넘어졌고, 일어나지 못했다. 갑자기 내게 상한 냄새라도 나는 것인지, 다들 신속하게 빨대를 거두었다. 내 부재로 본인들이 겪을 불편을 꼼꼼하게 점검하여 대비할 뿐, 주룩주룩 쏟아지는 나를 봐주지 않았다. 나는 너무 빨리 녹아버린 것일까? 또 아무 곳에 버려졌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러면 돌아갈 수 없는데.'


많은 밤 뒤척이며 앙가슴쳤다. 새벽이면 변기를 붙잡고 진물 진물 녹아내린 속을 게워냈고, 숨찬 대륙의 꿈은 제 분을 못 이겨 파사삭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회사를 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미뤄둔 완벽한 날은 오지 않았다.




들끓던 것들이 식어 밍밍해졌고, 생활은 물처럼 차가워졌다. 삶은 하루하루 쇠약해지는 것이었고, 애태우다 사그라들고 마는 속상함이 밤새 껍진거려 잠을 설친다.


그럼에도 세상은 온통 개학을 맞은 교실처럼 와글거린다. 모두가 신나는 여름방학 같은 청춘을 보내고 왔음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전학생처럼 주눅이 들고, 그래서 자꾸만 눈치 없는 말을 꺼내버리는 것 같아 자책하며 움츠러들기만 한다.


‘어, 저거…’


신발장 구석 캔버스화 박스가 눈에 들어온다. 언제고 신나는 일이 생길 때 신겠다고 십수 년 전 사놓았던, 몹시 아끼느라 몇 번 신지도 못한 그 신발. 멋졌던 신발은 앞 코가 누래져 있었고, 발을 넣고 끈을 묶으려니 탄력을 잃은 고무가 ‘폭’하며 벌어져 퍼진다. 등줄기로 열이 오르고 목덜미에 따갑게 두드러기가 올라온다. 어둡고 퀴퀴한 신발장 속에서 혼자 예쁘다 부스스 삭아버린, 내 청춘같이 아까운 신발.


현관문을 나서는데 툭, 비가 내린다. 머리채를 잡힌 듯 잠시 멈추어 섰지만,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깨진 보도블록이 온 힘을 다해 질척이는 등을 내어주고, 타야 할 버스가 저만치 앞에 선다.


‘여기! 여기, 나 있어요!’


수많은 사연이 와글거리는 길을 뒤로하고, 버스가 저 멀리 속도를 낸다. 이를 악물고 다리를 찔룩이며 안간힘 썼지만,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 나는 또 뒤처지고, 내게서 먼 곳에 남겨졌다.


이제 나의 길은 다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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