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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man Jan 06. 2021

전쟁의 형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투퀴디데스, 천병희 옮김,『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숲, 2009

*원문에 아테나이로 표기된 부분은 편의상 아테네로 바꾸었음을 알림.



30년 동안 전 그리스 세계가 말려들게 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를 기록한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는 이 전쟁이 과거의 어떤 전쟁보다 기록해둘 가치가 있는 큰 전쟁이 되리라 믿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투퀴디데스는 자신의 조국 아테네를 몰락시킨 전쟁에 대해 기술하였고, 전쟁의 원인과 전개, 전쟁 속에서 드러난 인간 행동의 패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과거사에 관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며,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나 전쟁 중에 벌어진 일들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유사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재현될 것이라고 그는 예언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다 보면, 그의 예언이 허언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전쟁의 원인에 관하여, 투퀴디데스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라고 분석한다. 여기서 핵심은 공포다.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급격히 성장한 아테네를 두려워하여 견제하였다. 여기에는 단순한 공포감 말고도 이익, 명예심이 결합되어 있는데, 도널드 케이건은 “투키디데스의 이 세 가지 설명 방식은 모두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동기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정당화한다. 공포심, 명예, 이익이 바로 그것이다”라며 투퀴디데스의 분석이 여전히 유효함을 시사하였다(도널드 케이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까치). 또한, 이러한 설명은 ‘투퀴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라는 개념으로도 유명한데, 최근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은 『예정된 전쟁』(정혜윤 옮김, 세종서적)에서 이 개념을 통해 미중 갈등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또 다른 부분은 3권 81~83장에 걸쳐 나오는 케르퀴라 내전과 그로 인한 학살에 대한 분석이었다. 케르퀴라의 민주파와 과두파가 치열한 정치적 분쟁을 겪고 있었는데, 과두파가 케르퀴라의 민주정을 전복시키려는 과정에서 아테네와 라케다이몬까지 개입한 내전이 발발하였고, 결국 민주파가 승리하였다. 승리한 민주파는 “자신들이 적으로 간주한 시민들을 계속 학살했다.”



그런데 이 학살은 정치적 보복의 형태만을 띠지 않았다. 어떤 이는 개인적 원한 관계 때문에 누군가를 죽였고, 어떤 이는 채무 관계 때문에 죽었다.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일어난 잔혹한 죽음과 학살은 이번 전쟁에만 국한된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전쟁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파악하였다. 왜냐하면, “평화 시에는 도시든 개인이든 원하지 않는데 어려움을 당하도록 강요받는 일이 없으므로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한다. 그러나 일상의 필요가 충족될 수 없는 전쟁은 난폭한 교사(敎師)이며, 사람의 마음을 대체로 그들이 처한 환경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전쟁은 살상과 같은 폭력이 더 일상화된 ‘가치 전도’의 상황이다. 이로 인하여 기존에 존재했던 증오와 분노라도, 전쟁을 만나면서 그 양상이 더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박찬승, 돌배개)에서도 민간에서의 상호 학살 과정을 분석하며, 그 원인을 한국전쟁 이전부터 각 마을 공동체가 갖고 있던 갈등이 전쟁 기간 중에 학살이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으로 지적하였다.



또한 전쟁은 대부분의 사람이 최소 두 진영으로 나뉘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상황이다. 폭력의 일상화에서의 이분법적 대립과 갈등은 곧 상대 진영에 대한 학살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여기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은 둘 중 하나에 참여하기를 강요받으며 또 강요한다. “충동적인 열의는 남자다움의 징표가 되고, 등 뒤에서 적에게 음모를 꾸미는 것은 정당방위가 되었다. 과격파는 언제나 신뢰받고, 그들을 반박하는 자는 의심을 받았다.”



투퀴디데스는 이러한 전쟁의 광기를 초래하는 근원 역시 “탐욕과 야심에서 비롯된 권력욕”이라고 보았다. 정치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극단적 수사를 동원하여 광기를 부추기며, 그 과정에서 반대파에 대한 학살이나 폭력적 수단을 통한 불법적인 권력 탈취가 행해진다는 것이다.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으며, 시간이 흘러 변하는 것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누군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고 한국전쟁을 떠올릴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내전의 성격을 갖는 다른 전쟁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무엇을 떠올렸든, 전쟁은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것이라는 투퀴디데스의 예언적 지혜는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여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분량도 만만치 않거니와, 생소한 인명과 지명, 각 동맹국 간의 복잡한 이합집산에 대한 설명이 계속해서 등장하여, 서사의 흐름 자체를 좇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쟁의 마지막 10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도널드 케이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현대인이 좀 더 읽기 쉬운 문체와 적재적소에 배치된 지도 자료로, 내용이 좀 더 머리에 잘 들어온다. 그리고 투퀴디데스의 서술이 중단된 이후 부분까지 서술되어 있다. 나도 케이건이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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