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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man Feb 21. 2021

일본의 유학화와 근대화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 보기>



박훈,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민음사, 2012






19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라는 대대적이고 극적인 사회 변혁을 겪었다. 일본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정치적으로는 헌법과 의회 정치를 실현했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제적 생산양식으로 도약했다. 같은 시기, 류큐, 청, 조선 같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러한 사회 변혁을 이루지 못하였다. 현대 한국에서는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근대화에 실패한 조선'이라는 대조적인 두 이미지로 두 국가의 역사를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연히 일본은 어떻게 메이지유신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물음이 따라온다. 시중에서 유통되는 일본사 관련 서적 중 일본 고대사나 중세사보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현대사 서적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이러한 관심을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훈의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일본근대사에 관심 있는 한국인에게는 그 자체로 흥미를 유발하는 제목이다. 먼저 이 책의 목차를 살펴보자.




1장 도쿠가와 체제의 구조와 특징

2장 일본은 어떻게 서양 문물을 신속히 수용할 수 있었나

3장 도쿠가와 막부는 왜 패했는가

4장 유학의 확산과 ‘사대부적 정치 문화’의 형성

5장 ‘사화’하는 사무라이와 메이지 유신



1장은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체제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운영되었는지를 다룬다. 이 부분은 한국인 독자에게는 생소하여 읽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후의 역사 전개와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려면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부분이기에 정독할 필요가 있다. 2장은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 과정을, 3장은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막부의 존재를 다룬다. 4~5장은 저자의 고유한 견해로, 메이지유신과 근대화가 이루어진 데에는 서구 못지않게 유학의 영향도 크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더 학술적으로 다룬 책은 동저자의 <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가 있다) 4장은 “사대부적 정치문화”와 일본의 유학화 경향을 설명하고, 5장에서는 이를 메이지유신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대충 목차를 훑어봐도, 도쿠가와 시대의 정치체제부터 메이지유신 과정을 잘 설명한 책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역사 서적이 처음이라면, 어느 시대든 이렇게 기본적이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용, 특히 정치적 사건을 충실하게 다룬 책 한 두 권을 두 세 번 반복해서 읽고, 주제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체계적인 서술은 아니라는 흠이 있지만, 일본근대사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개념이나 사항들을 충실히 다루고 있어 추천할 만하다.




박훈에 따르면, 메이지유신과 일본 근대화의 주요 성공 요인으로는 ‘서구의 충격’도 있지만, 이와 더불어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이 일본 지배 계층의 유학화이다. “일본에서는 유학의 전성기에 서구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일본의 막부 정부는 무가 정권이기에 18세기 말 이전까지 일본에서 유학의 영향력은 미미한 정도였다. 과거제도 없었기에 학문으로 관직에 진출할 방법은 별로 많지 않았고, 생계를 위해서 학자들이 의사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향이 뒤집힌 것은 1790년 도쿠가와 막부가 유학을 중시하는 정책을 잇달아 내놓으면서부터다. 막부 정권에서 지배층은 무인인 사무라이지만, 도쿠가와 체제가 안정되고 난 뒤에는 유례없는 장기 평화 체제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인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어려워진 사무라이들은 “행정 능력과 정치 역량”을 키워야 했다. 그러한 필요 위에서, 전국적으로 많은 수의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고, 주자학을 주로 배웠다. 그 결과, 사무라이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학문적 소양을 갖춘 “독서하는 사무라이” 또는 “칼 찬 사대부”가 대량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사무라이들이 유학적 소양을 갖춘 엘리트, 즉 “사대부화”되면서 유학은 일본 사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배 계층이 “점차 천하 대사, 국가 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치자(治者) 의식’에 눈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정치 문화가 사대부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신분 이동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식” 면에서 지배 계층의 “정치화”, 더 나아가 사무라이보다 하위 신분인 백성 중에서도 정치의식이 고양된 자들이 나오게 된 것을 지칭한다.




학교가 우후죽순 생기면서 형성된 “학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사무라이들은 유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정치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정치 경험을 쌓은 사무라이들이 서구의 충격에 대응했던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를 얘기할 때는,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유학의 정치적 영향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상서와 군주 친정(親政) 등을 통해 이어진다. 상서란 “유교 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는 정치 참여의 수단”이다. 막부 말기에는, 막강한 정치적 효과를 지녔던 상서를 통해 사무라이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여기에는 심지어 상층 영민(領民)도 가세했다. 상서 문화는 메이지유신 이후까지도 이어졌다. 메이지 초기 여론은 “상서”와 “신문의 독자 투고란”을 통해서 표출되었다. 상서라는 전통적인 매체와 신문이라는 근대적 미디어의 만남인 것이다. 「민선의원 설립 건백서」는 이러한 배경을 두고 있다. 이를 보면, 70년대 자유민권운동도 유학적 정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지배층이 유학적 소양을 지니게 되면서, 군주에게 기대하는 바도 달라졌다. 원래 막부 체제에서 번주나 쇼군은 정무가 아니라 “의례와 교제”를 주 업무로 삼았다. 그러나 막부 말기로 가면, 이들이 직접 정사를 돌봐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요시다 쇼인을 비롯한 여러 개혁가가 공감한 부분이기도 하다. 군주 친정이 특히나 더 중요한 이유는 근대 천황제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은 서양의 근대적 주권자로서의 형상을 띠게 되었지만, 여전히 “유교적 군주의 측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때의 “병영국가적 요소”와 함께 “사대부적 정치 문화”라는 유학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고, 유학의 틀 속에서 서양의 충격과 맞닥뜨렸고 서양의 정치 문화를 수용하거나 변용하였다. 이러한 유학의 영향은 1890년, 헌법과 의회의 수립과 서양화의 물결 속에서 다시 희미해져 갔다. 유학의 전성기는 짧았지만, 유학이 근대 일본 사회에 남긴 흔적은 무시할 수 없다.



마츠다 고이치로, 윤채영 옮김,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 보기』, 아포리아, 2017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유학화와 근대화의 상관관계를 개인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상가일 것이다. 그는 일본의 근대의 시작 지점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흔히 그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논할 때는, 존 스튜어트 밀이나 알렉시스 드 토크빌, 프랑수아 기조 같은 서구 사상가들을 꼽는다. <학문의 권장>과 <문명론의 개략> 같은 초기 저작에서 그들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눈치챌 수 있다.




후쿠자와는 개인을 억압하는 모든 체제와 관습에 저항하였고, 어떠한 외부적 억압에 의해서도 침해받을 수 없는 권리(right)를 역설하며, 다원적인 주체가 경쟁을 벌이는 상태를 문명의 기초조건으로 바라보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을 일본 사회에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부분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나 <대의정부론>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처럼 후쿠자와의 사상은 서구의 자유주의·개인주의와 통하는 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츠다 고이치로는 “후쿠자와의 개인주의가 의외로 유교 특히 주자학에서 강조되는 내발(內發)적인 자기비판 그리고 극기와 통하는 데가 있다”고 주장한다. 후쿠자와는 젊은 시절 시라이시 쇼잔이라는 한학자에게 정통 한학을 수학하였고, <논어>, <맹자>, <대학>, 주자학 등 유학적 소양을 충분히 쌓은 인물이었다. 그의 사상의 기초조건은 이미 “근세 후기의 일본 지식사회 가운데 배태되어 있었다.” 후쿠자와와 유학은,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주희의 사상을 답습하면서, 이를 통해 서구의 사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conscience를 그는 “본마음”이라는 말로 번역했는데, 이는 주희가 사용하는 개념으로, “미리 하늘이 사람에게 심어 준 도덕성을 가리킨다.” 후쿠자와는 주희의 용어를 사용하여 서양의 conscience를 “인간의 본질적인 도덕 의지”라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또한 dignity라는 개념을 풀이할 때도, 후쿠자와는 “집안 구석진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라는, 한 사람의 내면적인 노력을 중시하는 유교적 도덕 체계를 빌려 설명하였다.




즉, 그는 주희의 사상에서 “도덕적인 향상을 위한 노력과 자기규율의 장려”라는 부분에 공감하였고, 주자학적인 수양론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흡수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의 반대자로 여겨졌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신의 문명론과 도덕론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유학의 이론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근거로 삼았다는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후쿠자와 하면 으레 존 스튜어트 밀과 토크빌 등을 언급했다. 물론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서양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받아들일 때 후쿠자와는 이미 충분한 유학적 소양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 역시 18세기 말부터 진행된 일본 유학화의 흐름 아래 놓인 인물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다. 이런 면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적 과제는 유학이라는 기존의 학문을 전유함으로써 서양의 새로운 사상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이하여 일본을 문명화시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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