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B 홍보의 애로사항
B2B 홍보는 '커리어의 무덤'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지간한 B2B 기업에서는 홍보를 영업지원 수준으로 인식하고, B2B에서 경력이 쌓일수록 B2C로 넘어가기도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백수였던 20대의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그리고 큰 고민 없이 B2B IT 홍보에 발을 들여놓았고, 시간이 꽤 지나서야 저 말을 접하게 됐다. 100%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7년 동안 한 회사에서 홍보담당자로 일했지만 나의 모든 상사는 홍보나 마케팅 경험이 전혀 없는 분들이었다. 대부분은 내게 많은 도움을 주려고 하셨고 인간적으로도 배울 점이 있었지만 결국 홍보는 모두 내 몫이었다. 업무 고민을 나누거나 조언을 구할 곳이 없는 상태로 일한 몇 년은 내가 과연 발전하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으며 굉장히 외로웠다. 어느 정도는 일하고 부딪히며 발전했겠지만, 혼자라는 것에서 기인하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대개 B2B 회사는 홍보나 마케팅에 대한 이해도가 낮으므로 예산 확보가 어려우며, 포트폴리오에 넣을 수 없지만 품은 많이 드는 아주 애매한 일들이 구렁이 담 넘듯 넘어온다. 웨비나도, 광고도, 백서도 돈 때문에 줄기차게 까이면서 골프공과 USB 라이터를 기념품으로 제작하고 있는 아이러니란.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도 웨비나 한 번을 못 해봤다. "이 돈 쓰면 고객 얼마나 들어와?"는 무적의 질문이었다. 이렇게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상황에서는 홍보팀, 마케팅팀이 아니라 인바운드팀, 영업지원팀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걸 체감하는 순간 진정한 '현타'가 밀려온다. 팀장이 "광고 말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10건 미만의 인바운드로 심층 분석 보고서를 작성할 때, 세일즈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이거 해줘요 저거 해줘요 툭툭 던질 때. 이게 바로 그 '커리어의 무덤'이구나, 하면서 사람인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봤자 B2B를 벗어나기는 이제 힘들지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체계가 없고 전문 인력이 부족한) 일반적인 B2B IT 기업의 (마케팅과 구분되지 않는, 마케팅과 구분할 상황이 아닌) 홍보는 결국 인바운드로 수렴하는 것 같다. 이렇다 할 위기도 없고, 광고를 한다고 매출로 바로 이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위에 보고할 수 있는, 그리고 위에서 관심을 보이는 것은 결국 인바운드라는 수치였다. 인바운드 유입 경로를 닦아놓아야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할 말이 생긴다. 물론 B2B 홍보는 인바운드와 직결되지 않으며 홍보가 갖는 고유의 영역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랬다.
또 모든 조직과 직무가 그렇겠지만 B2B 홍보는 더더욱 경영진의 성향과 의중에 따라 널을 뛰게 된다. 내 경우는 '테크니컬 가스라이팅'이 문제였다.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으면서 전문적인 IT 기술 칼럼과 백서를 '갖고' 싶다는 경영진의 압박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테크니컬 라이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테크니컬 라이터가 필요하면 테크니컬 라이터를 고용해야지... 도대체 무슨 소리야 정말... 게다가 내 글을 검수하겠다는 임원은 정말이지 글을 더럽게 못 쓰는 사람이었다. 긴 문장을 선호하고 일본어 어투를 사용하며 주술도 맞추지 못하는 인간이 감히 내 글을 검수하겠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었다. 칼럼 몇 편을 쓴 후 언쟁을 거쳐 어찌어찌 넘어가기는 했지만 결국 백서는 내가 썼다. 그것도 네 편이나. 실력도 인품도 훌륭한 세일즈와 기술 담당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준 덕분에 좋은 결과물이 나오긴 했다. 그러나 백서를 제작하게 된 과정은 무척 불쾌했으며, 잘 해낸 것과 별개로 '홍보'담당자로서의 커리어에 과연 어떤 의미인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퇴사한 지 1년이 지났는데 그 이후 새로 업로드된 백서가 하나도 없다는 게 코미디라면 코미디다.
어영부영 시작했지만 B2B 홍보 경력만 따져도 어느새 9년 차다. B2B 홍보가 커리어의 무덤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으나, 커리어의 무덤이 될 가능성이 큰 것 같기는 하다. 특히 IT 분야의 경우 1)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솔루션·서비스 등을 다루고 2) 타깃이 명확하지 않으며 3) 홈페이지에서 서비스를 바로 구매하고 사용할 수 없을 때 무덤행 급행열차를 탈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걸 다 종합해보면 매우 올드한 IT 기업일 가능성이 높고 회사의 경쟁력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저런 조건으로도 돈을 벌고 있는 회사가 의외로 많다. 그리고 아마 홍보나 마케팅 관련 부서, 상사, 전임자, 체계 등이 없는 상황일 것이다.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고는 해도, 악조건 속에서 방향을 제대로 잡고 '홍보'에 걸맞은 일을 깊이 있게 수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다 싶을 때는 빨리 발을 빼는 것도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과 업계 이야기를 신나게 나눌 때, 기획기사가 잘 빠졌을 때, 어렵고 복잡한 아이템을 쉽게 풀어썼을 때, 인바운드가 눈에 띄게 증가할 때, 사내에서 미미하던 홍보의 존재감이 커질 때의 보람을 생각하면 또 나름의 기쁨이 있다. 공들여 제작한 브로슈어나 기념품을 좁아터진 업계에서 그대로 베껴갈 때는 열받지만 뭐 그것도 내가 잘했다는 일종의 증명이라고 생각한다. 남은 인생에서 B2C는 경험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이왕 B2B에 발을 들였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해봐야지. 아직 무덤에 들어가기엔 너무 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