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인 것을 알아서 상처주지 못 하는 마음
나는 어릴 때부터 중독에 취약한 편이었다. 그런 스스로를 잘 알아서 게임도 시작하지 않았다. 어쩌다 한번 무언가에 푹 빠지면 정말 질리도록 그것에 매달렸다. 컴퓨터 게임부터 총 게임, 화투, 드라마, 인스턴트 음식까지. 짧으면 일주일부터 길면 몇 년까지 내 온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 빠져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언제나 중독에서 벗어날 순 있었다. 내가 중독된 무언가가 나의 삶을 망치고 있다고 자각하면 삭제가 빨랐다. 언제 사랑했냐는 듯 가차 없이 버렸다. 이후로는 다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신은 내 삶의 ‘어리석음’의 키워드를 오래 머물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늦더라도 때가 오면 지혜로운 판단을 해냈다. 나에게는 현명한 판단력과 실행력이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쉽사리 삭제 버튼을 누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바로 사랑.
사랑에 깊게 중독되었다. 이건 현재도 그렇다. 나는 연애를 하지 않을 때에도 늘 무언가를 열혈 하게 사랑하는 중이었다. 사랑의 범위는 다소 넓었다. 가족부터 지인, 연예인, 동물, 자연까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엮으면 지구는 거미줄로 칭칭 감겨있을 거라 생각을 한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연결 선을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 너와 내가, 우리가 연결되어 있기에 내가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사랑의 힘을 맹신했다.
하지만 사랑은 네게 불안감과 두려움을 주었다. 그 두려움은 너무도 강력해서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먹어치웠다. 나는 사랑이 조금이라도 남은 것 같다 느껴지면 아무리 해로운 관계여도 잘 끊어내지 못했다. 나의 사랑에는 밑바닥이 없었다. 1층에 서서 이곳이 제일 낮은 곳인가 둘러보면 다시 싱크홀이 생겨났다. 그렇게 바닥으로, 더 바닥으로, 희망의 빛줄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랑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 두려울 때면 눈을 감고 상상으로 사랑을 찾았다. 그렇게 영원히 눈을 뜨지 못했다. 눈 뜬 현실에 사랑이 없으면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누군가가 네게 상처를 주어도 날 사랑해서 그랬다 느끼면 고통이 잊혔다. 사랑은 내가 믿고 있는 지혜와 현명함을 모두 일그러뜨렸다. 나는 습관처럼 사랑에 대해 중얼거렸다. “나는 그 사람이 날 사랑했다면 나에게 이렇게 상처 주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아. 근데 그게 그 사람이 날 사랑하는 방식이면? 그 아픈 공격이 사랑의 고백이었으면 어쩌지? 내가 고백을 공격으로 오해하고 아파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그리고 내가 답했다. “그 사람의 사랑의 방식이 아프다고 표현해야지, 널 사랑한다면 널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 나는 늘 정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행동은 달랐다. 또다시 상처를 받고 괜찮다고, 사랑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랑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장르에서 조차 사랑을 찾으려 애쓰고 유추하고 이해하려 애썼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것들이 아주 많았다. 처음 그와 연애를 할 때, 온 세상에 넓게 퍼져있던 사랑들이 하나 둘 그에게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을 때 낯선 기분을 느꼈다. 이 모든 사랑을 그에게 주어도 되는지 의심스러웠다. 그가 나의 사랑을 받고 부담을 느끼진 않을지, 내가 준 사랑을 형태만 사랑이라 칭하진 않을지, 그 사랑이 상처가 되지 않을지 많은 걱정이 생겼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 사람을 위해 사랑의 방식을 고민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는 나와 달랐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을 궁금해하지도, 잘 맞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두는 성향도 아니었다. 그런 그는 나의 인간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잘 맞지도 않는 사람을 왜 만나는 것인지, 힘든 관계에서 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늘 의문을 표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설명은 그를 이해시킬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쉽게 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연애는 진작 끝이 났을거라는 것을 알까.
그는 오직 나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으로 지구를 거미줄로 칭칭 감은 사람이라면, 그는 내 지구를 품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 거미줄이 나를 답답하게 만들진 않을까, 혹여나 나를 위협하진 않을까 걱정해 주는 사람이었다. 타인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길,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길, 애인인 자신보다도 나의 삶을 먼저 사랑하길 바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나의 삶을 사랑하려면 그의 존재가 방해가 되었다. 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차마 그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나의 삶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너무 많이 사랑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