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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Mar 11. 2021

딸기가 세 박스의 만원

하루  요리 일기-딸기 편

꾸준히 요리하기로 마음먹은 지 둘째 날.

공판장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다.  밖으로 나오고  장바구니 같은 것을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딸기는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 있으니 별 상관은 없지만 공판장 가는 길에는 식자재 마트도 있어 구경해야 한다. 그럼 분명 또 뭘 살 텐데 들 손이 있으려나... 에라 모르겠다. 나온 거 어쩌겠어. 다음부터는 꼭 챙기리라. 공판장에 도착하자 멀리서부터 가운데 입구 앞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다가가니 딸기 6박스를 들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박스에 만원이라고 했다. 딸기를  바로 그 자리에서 구입했다. 박스를 쌓고 맨 위 박스에는 종이로 딸기를 덮고 테이프로 가로 세로 대각선 한번 붙여서 고정시켜준다. 들고 갈 수 있도록 여유공간을 두고 테이프를 붙여 주셨다. 딸기를 사기 무섭게  아주머니께서

"오렌지는 필요 없어? 오렌지가 맛있어"

                        은근슬쩍 권유하셨다. 당황했지만 우리 집엔 주황색 과일이 있다는 걸 떠올랐다.

"아, 오렌지는 집에 있어서 괜찮아요."

                       그 말을 뱉고 나니 오렌지가 아니라 한라봉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말이다.

공판장에서 내 또래들을 본 적이 없고 있다 해도 대부분 부모님이랑 같이 오기 때문에 나는 공판장에 갈 때마다 조금씩 긴장을 하곤 한다. 붙임성 좋게 말을 거시는 아주머니의 말을 무시하기는 조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딸기를 들고 집에 돌아가는 길, 한 손으로 들고 오는 게 무거워 옆으로 눕혀서 품에 안고 왔다. 오는 길에 식자재 마트에 들려 레몬, 건포도 부추도 샀다. 딸기가 세 박스인데 뭐 해 먹지? 고민하며 집으로 걸어갔다.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을 뒤져보니 딸기청, 딸기잼, 티라미수, 딸기 정과 등 많은 유튜브 영상이 나왔다.

우선을 딸기청을 할 생각이었다. 한 박스를 터서 볼에 딸기를 넣고 물을 가득 채우고 사과 식초를 부었다. 딸기가 너무 이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1분 정도 두다가 헹궜는데 딸기의 살이 녹아 자신의 아픈 살 부분을 드러냈다. 뭉개진 딸기들이 많아서 물기를 제거하려고 키친타월에 닦으면 딸기가 다 으깨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튜브 영상에서는 키친타월에 물기를 제거하는데 내겐 불가능한 일이 됐다. 딸기도 수분인데 왜 물기를 제거해야 하는 걸까? 채반에 받쳐놨지만 물기가 마르기까지 기다릴 인내심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씻은 딸기를 조각조각 잘라서 동량의 설탕을 넣고 섞었다. 하얀 설탕이 수분 때문인지 금방 녹아서 딸기와 비슷한 색으로 물들어 갔다. 만들고 나니 양이 너무 많아서 절반을 덜고 딸기 한 박스를 더 씻어서 딸기잼을 만들기로 했다.

두 번째 박스 딸기는 식초 물에 오래 안 담가 둬서인지 마구 물속에서 손으로 뒤집지 않아서인지 상태가 좋았다. 이제야 주방 공간에서 몸이 풀려서 과도로 딸기의 초록 머리카락을 밀고, 툭 버리고, 떨구고, 새 딸기를 집고, 초록 머리카락을 밀고, 툭 버리고, 떨구고, 딸기를 집는 일을 반복했다. 노동요가 없으니까 분위기가 삭막했다.

냄비에 절반 딸기청과 딸기, 설탕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장자리에서 거품이 올라오면서 가운데 좀 더 연한 거품들이 가운데로 모인다. 약불로 맞춰나도 빠르게 부풀어 거품이 올라오기 때문에 입으로 후후 바람을 불며 거품을 꺼트렸다. 20분 정도가 지나니 주걱을 젓는 느낌에서 미세하게 조금씩 느낌이 왔고 주걱으로 계속 저으니 가운데 연한 색의 핑크 거품이 바깥의 진한 거품들과 섞이면서 입욕제를 푼 욕조가 되었다. 20분이 더 지나고 나니 중불로 맞춰나도 계속 저어주기만 하면 냄비를 벗어날 만큼 크게 거품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씩 화산 구멍들이 생기면서 냄비 밖으로 시럽이 튀는 일이 조금씩 생겼다. 복 복 올라오 구멍들을 바라보며 나무 주걱을 젓고 있자니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썩 나쁘지 않았다.  20분이 더 지나자 이제 물속에서 팔을 휘저을 때처럼 나뭇 주걱으로부터  잼의 흐름이 느껴졌다. 잼이 우주인지 우주가 딸기인지 모를 정도로 색이 짙어졌고 딸기 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속 나무주걱으로 젓는 동안 '여기에 전분물을 풀면 어떻게 될까? 찹쌀풀처럼 만들어질 테니 금방 되지 않을까? 딸기와 한라봉을 같이 섞어서 잼을 만들면 어떤 맛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불을 줄이고 급하게 레몬 반개를 손으로 짜서 넣었다. 한 번 끓인 후 식혀서 유리병에 옮겨 담았다.

총 700g의 딸기잼이 나왔다. 손으로 찍어서 맛을 봤더니 딸기잼이 아니라 무화과잼 맛? 물엿 같은 맛이 났다. 뭐지? 뭐가 잘못된 거지? 레몬을 너무 많이 넣었나? 맨 처음 딸기를 넣고 졸일 때는 딸기잼 향이 났는데 맛과 향이 너무 달라져서 당황했다. 물기를 제거하지 않고 넣어서 그런가? 딸기잼이 아니라 딸기 물엿처럼 가느다란 유리실(시럽실)이 형태가 잡힌 것을 보고 당황했다. 식으면 맛이 달라질까 조금의 희망을 품었지만 맛은 식기 전이나 식기 후나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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