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현 감독님의 영화 [파묘]가 얼마 전 개봉했습니다. 이전작 '검은 사제들', '사바하'와 비슷하게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스릴러 영화입니다. 무당인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 풍수지리사인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이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 네 인물들이 기묘한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영화는 흘러갑니다.
'후반부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이 있습니다. 영화 중반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라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정확히 그 대사처럼 영화의 줄거리 역시 두 부분으로 뚝 끊겨 있습니다. 하지만 글에서는 그런 부분보다는 영화를 파내어 보면 그 안에서 어떤 메시지들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중심으로 제시하겠습니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 잔뜩입니다.
왼쪽부터 장의사 영근, 무당 봉길, 무당 화림, 풍수지리사 상덕
'파묘(破墓)' 는 분명히 항일영화의 향기를 풍긴다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분명 공감할 듯 합니다. 일본 주술사가 한반도의 척추로 불리는 태백산맥의 한 터에 일종의 오니를 심어 두었으며 그것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설정, 등장인물들의 작중 이름들이 실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라는 점(영화 중반에 무당 봉길의 성이 윤 씨라는 것이 밝혀지기도 합니다). 더하여 전반부 의뢰인의 조부가 친일 행위에 가담했다는 설정 등에서 감독이 분명 일제강점기 근처 어딘가를 조준하고 있음이 엿보입니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정서를 돌이켜 보면 상처가 많지 않나. 이걸 파묘를 해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라고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불길한 무덤을 파내는 무당 화림
대한민국의 중추에 박힌 역사
일본 주술사 키츠네는 한반도의 척추인 산맥 어딘가에 불로 된 쇠를 박아 넣었고,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가진 넷은 숨겨진 것을 파내어 찾고 나아가 그 원흉을 제거하려 합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추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아직까지도 뜨거운 쇠가 깊이 박혀 있고, 감독은 그것을 한번 파내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파묘라 함은 이미 과거에 죽은 망자의 무덤을 파내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기 묻힌 이는 누구일까-, 어떤 일이 있었길래 무덤을 옮기는 것인가- 등 과거의 인물과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집니다. 영화 역시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일제강점기를 둘러싼 파묘를 감행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영화 중반, 친일파였던 의뢰인의 조부의 묘가 첩장되어 있음이 밝혀집니다. 구조를 살펴보면 일본 주술사의 오니 관 위에 친일파의 관이 올려져 있는 셈이지요. 오니의 관은 매우 섬뜩하고 지저분한 반면 친일파의 관은 왕에게나 어울릴 만한 외관을 가지고 있으며 안에 금은보화가 들어 있습니다. 삐까번쩍한 관 아래에 지저분하고 악한 기운을 풍기는 관이 잠들어 있었다는 설정은, 친일행위 가담자들과 그 후손들의 막대한 재산과 부의 근간에는 악행과 부조리가 있다는 은유로도 보입니다.
나아가서 악함 위에 쌓인 부는 언젠가는 그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메시지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니의 관 위에 놓여 있던 친일파의 관 속의 온갖 금은보화들이 비 오는 날 화장장의 불구덩이 속으로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로요.
일본의 제국주의
제국주의의 연속성
독특했던 점은 네 인물이 일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가장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오니가 에도 막부 직전 시기의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엄청난 힘으로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의 간을 빼먹는 이 오니는 대사로 미루어 보아 17세기 초반 세키가하라 전투에 다이묘로서 참전했던 인물입니다. 즉 시기상으로 한참 이후에 이루어진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강제 점령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일본 내부의 전쟁에서 사람들을 베었던 자가 주술사에 의해 일본제국-대한제국의 관계 안에 강제로 끼워넣어진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권력을 위한 폭력, 제국주의와 같은 어떤 악(惡)함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는 은유로도 보입니다.
이러한 악함의 지속과 대물림을 주동하는 세력은 키츠네라는 이름의 주술사입니다. 키츠네의 주술은 400년 전의 세키가하라 전투부터 작중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이 주술사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언급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키츠네는 전술했던 [제국주의], 혹은 [권력을 위한 폭력과 지배의 사슬]이라는 악한 관념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개인적인 해석이라 슥슥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장재현 감독님이 진행한 인터뷰들을 참고해 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메시지와는 별개로 배우들의 연기와 쫄깃한 사운드 덕에 몰입해서 보았습니다. 후반부에 불꽃이 날아 다니고, 괴랄한 얼굴의 오니와 전투를 벌인다던가 하는 장면은 약간 낯설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습니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영화 극후반부에는 나레이션으로 너무 쉽게쉽게(?) 전개를 퉁쳐버리는 느낌이 조금 들었었는데, 이동진 평론가님도 비슷한 부분을 한줄평에서 지적하셨더라구요. 무튼 재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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