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그리는 중

백경 초단편집

by 백경

솔이는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챙긴 거라곤 큰 캐리어 가방 하나와 배낭뿐이었다.

한국에서 10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곳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였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 야자수 나무가 솔이를 반겼다.


“히야…. 다시는 못 올 줄 알았는데.”


우연한 계기로 인도네시아에 온 건 지금부터 7년 전이었다.

여전히 몇몇 친구들은 “인도네시아? 인도랑 같은 나라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발끈하긴 했지만, 내가 인도네시아 사람도 아니고….

열변을 토하며 대변할 필요는 없었다.


난 택시를 잡아타고 예약한 호텔로 몸을 실었다.

퇴사한 지 하루, 전날까지 일에 치였던 게 꿈만 같았다.

한국은 아직 겨울.

솔이는 딱 한 번, 한국의 겨울을 피한 적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목조 주택에서 살아 추위를 유난히 잘 견뎠던 그녀인데, 한 번의 겨울을 피하고는 추위를 견딜 수 없었는 몸이 되었다.


“난 겨울아이야. 겨울에 태어나기도 했고, 추위도 잘 견뎌.”


늘 자랑스럽게 남자친구에게 했던 말이었다.

따뜻한 그의 품에 안겨 이 말을 전할 때면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밝은 도심을 바라보며 회상했다.

한국에서 입고 온 긴팔은 짐덩이처럼 거슬렸다.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더웠다.

마치 짐덩이 같은 인연의 허물을 아직도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솔이가 인도네시아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젊은 날 언젠가 와봤던 그 추억이 그리움이 되었서였다.


사람들은 늘 월급이 적다고 말한다.


“아니, 우리 삼백은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일하는데?”


“그러게요. 이번 연봉 협상 때는 꼭 말할 거예요.”


솔이도 불만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애초에 문제는 월급이 아니었다.

자신의 전공과 맞지 않은 일을 하며, 적당한 돈을 벌고 주말이 되면 적당한 데이트를 하고.


‘이렇게 살다 죽는 걸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날이 있기 전까진 두려움이 많고 겁이 많은 아이였다.


결혼을 약속했던 그가 자신의 침대에서 친구와 함께 있는 걸 보고 그녀의 일상은 파괴되었다.

처음엔 믿지 못했고 그다음엔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친구를 잃고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그동안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한 회사를 그만두었다.

오랫동안 핑계를 대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선택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많은 걸 포기했고 새로운 걸 얻었다.


.

.

.


다음 날, 늦은 오후까지 침대에 누워있었다.

지금 시기 한국에선 쓸 일 없는 에어컨이 이럴 땐 고마웠다.

졸린 눈을 비비며 외출 준비를 했다.

캐리어에서 준비한 예쁜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캔버스와 색연필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태양은 뜨거웠고 그늘 아래에서 피부에 와닿는 바람은 따스했다.

불편한 감정과 설레는 감정이 공존했다.


간단한 브런치를 즐기고 카페에 앉아 작은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솔이는 자신이 보는 세계를 종이 위에 담을 때만큼은 근심걱정을 털어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그림을 그렸다.


때로는 그녀가 앉은 풍경이,

때로는 그녀가 사용한 오브젝트들이,

때로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캔버스 위에서 시간이 멈춘 채 옮겨졌다.


갑자기 색연필로 그린 그림 위로 눈물이 떨어져 번지기 시작했다.

그림 그릴 때만큼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캔버스 위 멈춘 시간들 위로 현실의 시간이 흘러내린다.


그때였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손수건을 건넸다.

솔이는 부끄러워 에 손수건만 낚아채서 눈물을 닦았다.

그러자 의자를 끌어 누군가가 솔이 옆에 앉았고 말을 걸어왔다.


“한국인이시죠?”


솔이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가볍게 그녀에게 닿았다.


“예….”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그가 이야기를 꺼냈다.


“저, 사실 아까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림 그리시는 거 같더라고요. 저도 그림 그려요.”


그는 위로하듯 공통점을 찾는 듯했다.


“그래서 말을 걸까 말까 망설였는데….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 왔어요.”


한참을 눈물을 닦고 호흡이 괜찮아지자 솔이는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손수건….”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자신의 억울함, 화, 슬픔이 묻어있는 손수건을 그냥 건넬 수 없었다.


“며칠 더 이곳에 있으면 나중에 돌려주세요.”


그제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에 검은 피부, 훈훈한 미소가 아름다운 남자였다.


“저 혹시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예?”


솔이는 깜짝 놀랐다.

한국이었다면 이 남자, 사이비 종교가 아닐까 했을 것이다.


“그림 한 장만 그려줘요. 절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해서요.”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려드릴게요.”


그의 웃음에 그녀도 웃게 되었다.


.

.

.


며칠을 그와 만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솔이보다 네 살 어린 남자였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발리에서 한 달 지내다, 지금은 자카르타에서 지낸다고 했다.


“누나는 세상을 참 다채롭게 보는 거 같아.”


“다채롭기는…. 확신이 없어서 다른 일 했던 건데. 뭐.”


“아니야. 그림체와 색채가 매력적이야.”


“넌 그런데 그림 안 그려?”


“응, 난 지금은 안 그리고 싶어. 그냥 이 순간을 눈에 담고 싶어. 이곳이 그리고 싶을 때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싶은 곳이 그리우면 오면 되잖아.”


그녀는 그의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한국에서의 그녀라면 그가 철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그를 만나면서 그런 생각 따위를 하지 않았다.


“나도 그림 도구를 챙겨 오긴 했거든? 그런데 누나랑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어. 언젠가 다시 오면 되니까. 누나가 그랬듯이.”


그녀는 몰랐다.

자신이 그에게 영향을 끼칠 줄은.


“누나. 그러니까 현재를 즐겨.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죽는 그날까지 오늘이 가장 감사한 날이잖아.”


그의 미소는 그녀를 설레게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일이면 오늘을 기억할 순 있겠지. 하지만 온전한 오늘은 지금뿐인 걸. 단 하나뿐인 유일한 그걸 우린 매 순간 누리고 있잖아. 그러니 가장 감사한 날이지.”


그녀는 조용히 읊조렸다.


“감사한 날이라니...”


그리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맞네. 네 말이. 함께 해줘서 고마워.”


그리고는 깨끗이 빤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와의 며칠간의 만남은, 나를 다시 그리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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