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온기
그가 사라진 지 한 달이 지났다.
토요일 아침의 루틴은 여전했다.
지하철 창엔 잠이 덜 깬 내 얼굴이 비쳤고,
두 정거장을 지나는 짧은 시간 동안
흔들리는 불빛 위로 상념이 흘러 다녔다.
도착한 종합자료실 끝자리.
햇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앉아서야
비로소 주말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맞은편의 빈자리는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어
내 주말의 일부로 조용히 자리 잡았다.
더는 일부러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무심해서,
빈 공간은 시간의 더께로 채워지는 법이다.
그러던 토요일이었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칫했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그가 앉아 있었다.
은빛 머리칼, 창밖을 바라보는 익숙한 옆모습.
지난 한 달의 시간이 통째로 증발한 듯,
그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고요히 책을 읽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툭, 제자리를 찾는 느낌이었다.
빠져나갔던 일주일의 조각이
소리 없이 돌아와 맞춰졌다.
그는 조금 수척해 보였다.
손등의 힘줄이 전보다 도드라졌고,
창밖을 보는 눈빛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차마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우리의 관계는 그럴 만큼 가깝지 않았고,
그의 빈자리를 의식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정적 속에서 두 시간이 흘렀다.
책의 문장은 평소보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존재가 공간의 밀도를 바꿔놓은 것 같았다.
그의 부재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점심 무렵,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괜히 책 속으로 더 깊이 고개를 묻었다.
그가 내 옆을 지나
옥상 쉼터로 향하는 걸 희미하게 느꼈다.
십 분쯤 지났을까.
나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나섰다.
옥상에는 눅눅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살갗에 닿는 감촉이 시렸다.
그는 자판기 커피를 손에 쥔 채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나를 돌아보며 옅게 웃었다.
지난봄, 처음 말을 걸었던 그 웃음이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리가 비어 있어서… 지난 한 달, 괜히 허전하더군요.”
그는 내 말을 잠시 음미하듯 머금었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저 앞뒤에 앉아 책만 보던 사이인데,
그 익숙함이라는 게 힘이 세더군요.
저도 모르게 몇 번, 그쪽 생각을 했습니다.”
순간, 이유 모를 설렘이 스쳤다.
더 말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인생은 때로 멈춤으로써 더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는 걸 안다.
이 짧은 대화의 여운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나눌 가장 긴 대화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먼 곳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잠시 먼 길을 걷고 왔습니다.
가끔은 익숙한 길을 떠나봐야,
그 길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게 되더군요.”
자리로 돌아온 뒤 몇 시간이 흘렀다.
오후 늦게 그는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자료실을 나섰다.
오늘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인가.
짧은 아쉬움이 스쳤다.
책에 다시 집중하려던 찰나,
누군가 조용히 내 옆에 섰다.
그였다.
간 줄로만 알았던 그의 손에는
따뜻한 캔커피가 들려 있었다.
그가 책상 위에 커피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까… 옥상에서 먼저 아는 체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웃는 모습이 참 멋지시네요.”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총총히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다정함과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같은 남자에게 이런 끌림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손안에 남은 커피의 온기가
꽤 오래도록 식지 않았다.
늘 같던 토요일의 도서관.
이제 그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작고 따뜻한 온점이 하나 찍혔다.
다음 문장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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