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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노 Nov 25. 2021

과학기술전쟁의 서막 : 전격전

과학기술력을 가진 독일에 맞서기 위해 미국은 OSRD를 만들었다.

OSRD의 탄생 배경

히틀러는 모든 유럽국가들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유럽국가들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생각은 불가능에 가까운 망상이었다. 독일이 모든 유럽을 정복할만한 자원과 군수품, 국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세계대전 시기, 빌헬름 2세는 독일의 힘을 세계에 보여주겠다는 야망을 펼쳤지만 실패했다. 따라서 독일 안에서도 히틀러의 야망이 성공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장군들이 있었다. 전쟁 초기 독일군과 연합군 모두 300만명 가량의 병사를 동원했고, 탱크나 요새의 수는 연합군이  많이 가지고 있어 양측의 군사력에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상식을 깨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독일이 6주만에 프랑스를 점령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과학기술을 결합한 새로운 전쟁형태 : 전격전(Blitzkrieg)

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은 과학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전쟁형태를 개발했다. 새로운 전술의 이름은 전격전(Blitzkrieg)이다. 전격전을 수행한 독일 기갑부대는 매우 빠르게 진격할 수 있었다. 전격전에 당한 여러 유럽 국가들은 혼란에 빠졌고, 독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전쟁을 바꾼 놀라운 사례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독일인은 내연기관(engine), 라디오(radio), 항공기(airplane)를 이용해 전격전(Blitzkrieg)을 수행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독일인들이 첨단 과학기술을 사용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은 일반인들도 알고 있던 내연기관, 라디오, 항공기 기술을 결합해 새로운 형태의 전쟁방법을 만들었습니다.


- 제 71대 미국 해군장관, Richard. J. Danzig -



전격전(Blitzkrieg)이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탱크, 기계화보병, 항공기, 공수부대를 이용해 기동성을 최대로 추구한 전술이다. 독일의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은 영국의 리델하트(Liddell Hart)와, 당시 무명이었던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의 저서에 영향을 받아 자동차와 탱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술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구데리안의 전격전 개념은 그가 발간한 저서, "전차, 앞으로!"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격전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폭격기로 주요 거점을 폭격하여, 적군의 통신망 및 보급로를 차단한다.

공수부대를 전선 후방에 강하시켜 기갑부대의 주요 진격로를 확보한다

전선의 후방에서 포병이 화력을 집중하여 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전차를 집중시킨 기갑사단으로 적 방어선을 돌파한다.

선두 기갑부대가 계속 진격하는 동안, 일반 보병사단이 후방에 남겨진 적의 잔여 병력을 소탕하고 도시를 점령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기갑부대의 진격속도는 번개(Blitz)처럼 빨랐다.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과정에서 구데리안은 제2기갑사단을 이끌고 순식간에 오스트리아 수도인 빈으로 진격하여 전격전의 효과를 입증했다. 제2기갑사단은 독일 남부의 뷜츠부르크에서 빈까지 48시간 만에 670km를 진격한 것이다. 뒤이은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군은 전격전이 승리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프랑스 침공

독일의 프랑스 침공은 매우 빠르게 전개되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의 굴욕을 안겨준 프랑스를 향한 칼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0년 5월 10일 하인츠 구데리안은 나무가 울창한 아르덴 숲으로 진격했고, 4일이 지나 프랑스 방어선을 꿰뚫었다. 프랑스를 방어하기위한 연합군과 침략자 독일군의 병력규모는 300만명 가량으로 비슷했지만, 독일 기갑사단의 빠른 진격에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세운 방어선인 마지노선이 무너지고, 벨기에 세운 방어선도 무너졌다. 프랑스를 돕기위한 연합군은 덩케르크에서 영국으로 철수한다. 독일군은 승승장구하여 결국 6월 14일 파리까지 진격한다.

프랑스 정부는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장군에게 상황을 반전시킬 역할을 맡겼지만, 이미 페탱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전쟁에 참여한 연합군 300만명중 200만명이 독일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계속 항전한다면, 복수심에 사로잡힌 나치 독일이 포로로 사로잡힌 젊은이들을 학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페탱은 이 문제에 대해 고심했고, 결국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프랑스의 지도자 자격으로 독일과 패전협상을 한다.


프랑스의 패배

페탱과 히틀러의 휴전협정

6월 17일 필리프 페탱은 독일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6월 22일 독일과 프랑스의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페탱은 전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독일군이 점령하지 않은 남부의 소도시 비시를 수도로 정하고 친독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반면,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은 자유프랑스 국민회의(자유프랑스)를 수립하고 독일과의 항전을 선언했다. 알제리 등 일부 프랑스 식민지는 이에 호응하여 자유프랑스군을 형성했고, 국내에선 레지스탕스가 독일군과 비시 정권에 맞서 저항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 독일의 승리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과학자가 있었다. MIT 공과대학 학장과 카네기 연구소 소장을 맡았던 버네바 부시(Vannevar Bush)라는 컴퓨터 공학자였다.


국가 과학기술 연구소

버네바 부시는 2차 세계대전이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최초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독일은 이미 1887년에 제국물리연구소(Physikalisch-Technische Reichsanstalt)를 설립했고, 일본은 이미 1917년에 이화학연구소(理化学研究所, 약칭 RIKEN)을 설립했다. 추축국인 독일과 일본은 연구소를 통해 과학기술을 군대에 적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미국도 가만히 있던것은 아니었다. 1923년 발명왕 에디슨의 제안으로 미국 해군 연구소(The U.S. Naval Research Laboratory)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과학자인 버네바 부시는 미국의 과학 연구를 지켜보며 연구과정에 불협화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과학의 문외한인 군인과 정치인들이 과학적 진리와는 상관없는 정치논리, 경제논리로 연구에 간섭했기 때문이다. 부족한 연구비, 신기술 적용에 반감을 갖는 옛날 장군들, 정치논리에 따라 진행중이던 연구를 폐기하는 정치인들로 혁신적인 과학연구들이 중단이 되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버네바 부시는 미국의 과학연구 지원 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독일이 과학기술을 활용한 전격전으로 유럽을 점령하기 시작하자, 버네바 부시는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연구개발을 지휘하는 조직을 구상하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삼촌인 프레드릭 델라노를 통해 대통령과 과학자들의 면담시간을 잡았다.



미국의 과학자 백악관으로 행진하다.

6월 14일 파리가 점령당한 날, 미국의 과학자들이 백악관으로 행진했다. 대통령에게 새로운 조직을 만들것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과 과학자들이 함께한 회의에서 버네바 부시는 미국이 위기에 처했다고 루즈벨트에게 경고했다. 추축국인 독일과 일본에 비해 미국의 군사 기술은 수준이 낮기 때문에, 미국은 추축국에 대항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통령님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했습니다. 독일은 발달한 과학기술력을 활용해 유럽을 점령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미국과 연합군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에 대항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드림팀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드림팀이 미국의 연구개발을 가속화 시킬 겁니다.

- 버네바 부시의 제안을 상상하여 재현 -


버네바 부시는 OSRD(과학연구개발국)을 설명하는 한 장의 제안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건냈다. 부시의 제안서를 읽은 루즈벨트는 잠시 뒤 종이에 "OK - FDR"이라는 서명을 했다. 대통령과의 면담은 성공적이었다.


행정명령 8807

루즈벨트의 승낙은 과학자들의 아우성을 달래기 위한 그저 그런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루즈벨트는 행정명령 8807을 발표해 OSRD를 창설하고, 여러 국가 기관들이 OSRD에 협력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버네바 부시를 OSRD의 국장으로 임명했다.

1941년 6월 28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행정명령 8807을 발표했다. 버네바 부시는 OSRD의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과학 연구에 대한 정부 계약 및 협정을 체결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즉, 대통령의 대리인으로써 OSRD의 국장은 과학 연구에 권한 전권을 위임받은 것이다.


1941년 6월 28일  


국방과 관련된 과학적 및 의학적 문제에 대한 연구를 위한 적절한 규정을 보장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OSRD(과학 연구 개발국)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수행합니다.

(1) 국방과 관련된 과학 연구의 현황과 과학 연구 발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에 관해 대통령에게 조언합니다.

(2) 과학 연구 개발을 위해 국가의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는 중심지 역할을 합니다.

(3) 국방에 관련된 연구활동을 조정하고 지원합니다.

(4) 군인들과 협력하여 국방 과학 연구 수행을 위한 광범위하고 조정된 계획을 개발합니다.

(5) 전쟁 메커니즘 및 장치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시작하고 지원합니다.

(6) 국방에 영향을 미치는 의학적 문제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시작하고 지원합니다.

(7) 미국 국방에 필요한 국방력을 가진 타국 정부가 필요로하는 과학 연구를 지원합니다.


- 행정명령 8807 (Executive order 8807)



OSRD 국장, 버네바 부시 

OSRD의 국장, 버네바 부시 (Vannevar bush, 1890 - 1974)


대통령에게 권한을 받은 버네바 부시는 국방 과학 연구에 필요한 과학자를 찾기 위해 정부, 대학 및 산업계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전문가를 고용하고 연구 계약에 서명했다. 또한 무기 개발을 위해 필요한 과학자들의 징집시기를 연기하여, 마음껏 연구개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버네바 부시는 OSRD 국장이 되어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떻게 과학이 미국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미군에 입대한 젊은이들이 잔혹한 전장에서 희생당하지 않기위해서 무엇을 연구개발해야하는가?' 고민 끝에 버네바 부시는 답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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