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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창복 Oct 30. 2022

소설 환취 (10화/25화)

10. 마중

10. 마중      


 저절로 멈추게 되더군요. 어떤 설명하기 어려운 어색함이 저를 멈추게 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뜨거운 물은 뿌리지 않기로 했어요. 그러고 보니 혹시라도 눈에 화상을 입어 장님이 된 고양이가 회사 안을 돌아다니면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기도 했고요. 뜨거운 물을 버리고 냉수를 다시 종이컵에 받기 시작했어요. 물을 받으면서 '고양이도 냉수를 맞으면 혹시 감기 걸리려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조금 들었지만, 고양이는 털이 있어서 괜찮을 것 같았고 물 좀 맞았다고 몸에 상처 나는 것도 아니라서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물이 담긴 종이컵을 들고나가니, 땅콩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제 쪽으로 다가오더군요. 어떤 것이든 처음이 어렵죠. 제 발 앞에 왔을 때도 물이 담긴 종이컵을 잠시 들고만 있었어요. 그러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마음으로 물을 뿌렸어요. 얼굴에 물을 맞은 땅콩이는 순간 정신을 못 차리며 뒷걸음질을 몇 번 치다가 빠르게 주차장 쪽으로 달아났어요. 전 종이컵에 다시 물을 받아 따라갔고요. 그리고 숨어있는 곳을 찾아내 뿌리기를 반복했어요. 아침 무렵까지요. 땅콩이는 회사 구석구석으로 저의 물벼락을 피해 도망 다니다 항상 헤어지던 "신데렐라 타임" 즈음, 제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밤새 땅콩이에게 물을 뿌려대며 쫓아다녔더니, 퇴근할 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더군요.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한 뒤, 바로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잠이 오질 않았어요. 과연 직원들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아닌가를 놓고 혼자 끙끙대며 걱정했거든요. 젊을 때는 갑자기 해고를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퇴사를 해도 '다른 데 구하지 뭐….'라고 생각하면서 여유를 부릴 수 있었지만, 중년이 넘어서부터는 그런 여유는 없어졌어요. 그리고 할아버지 경비원분처럼 오래 그곳에서 일하고 싶었고요.

     

 다음 출근할 때부터는 "역주행 길"에서 마주치는 직원들의 눈치를 저절로 살피게 되더군요. 왠지 직원의 눈빛이나 표정이 안 좋아 보이면, 제가 고양이를 회사에 들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인 것만 같았어요. 이런 식으로 출퇴근할 때마다 계속 직원들의 심기가 어떨지 신경 쓰다 보니, 점점 출퇴근 길에 발생하는 하나의 노이로제가 되어가고 있었죠. 멀리서 다가오는 직원들의 무리가 보이면, 벌써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거든요. 빨리 땅콩이와의 관계를 끝내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어요.

     

 땅콩이는 제가 근무 서는 날마다 물벼락을 맞으니, 나중엔 종이컵만 봐도 멀찌감치 떨어지더군요. 그런데도 제가 출근하는 날엔 어김없이 경비실 근처에 나타났어요. 할아버지 경비원분의 말씀처럼 이미 경비실 근처를 자신의 고유 영역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어요. 출근할 때마다 가방에 넣어가던 통조림은 당연히 안 챙겼죠. 통조림 대신 제가 마실 피로회복제를 좀 더 사 먹었어요. 통조림 값이 절약되니, 저에겐 확실히 이득이 되더군요. 한 번은 얼마나 땅콩이에게 돈이 들었는지 계산을 해봤어요. 그동안 땅콩이에게 사다 먹인 통조림 값이 아까워서 여태 먹은 거 내놓으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죠. '그 돈이면 차라리 무얼 할 수 있었고, 무얼 살 수 있었는데….'하고 아쉬워하며 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어요.

      

 몇 주의 시간이 지나자 땅콩이도 더 이상 저에게 가까이 오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그저 멀찍이서 맴돌기만 하더군요. 그리고 저에 대한 경계심이 늘면서 서서히 달라져갔어요. 항상 밝고 톡톡 튀는 활기가 느껴지던 모습에서 걱정스럽고 힘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게 보였거든요. 그리고 완전한 길고양이의 모습처럼 지저분해지고 털도 거칠어졌고요. 전 그저 맛있는 먹이를 먹을 수 없는 아쉬움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도 일자리를 잃으면 상심하는데, 먹이를 잃은 짐승은 말할 것도 없었겠죠.

     


 처음에나 잠깐 갈등이 있었지 나중엔 땅콩이에게 물을 뿌리는 것도 아무 감정 없이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인간은 어떤 행동이든 쉽게 익숙해지니까요. 계속 눈에 보이는 근처 어딘가에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강화된 저의 외면의 힘이 땅콩이에 대한 신경 쓰임마저 옅어지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땅콩"이라는 이름보다 '그 재수 없는 고양이'라는 인식이 더욱 단단히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이었어요. 여느 때처럼 출근길에 마주치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죠. 그런데 저 멀리 인도 옆 도로변까지 땅콩이가 나와있는 게 보이더라고요. 가만히 절 쳐다보고 있더군요. 전 걷다가 그 자리에서 잠시 멈칫했어요. 제가 출근하는 시간은 보통 초저녁 때라 아직 해가 완전히 진 것도 아닌, 그 시간에 땅콩이를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밝은 시간에 보면 제가 다를 줄 알았나 봐요. 짐승다운 모자란 생각이었죠. 전 순식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어요. 전속력으로 땅콩이를 향해 걸어가면서 고양이가 절 마중하듯 나와 있는 걸 직원들이 보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지를 걱정했어요. 땅콩이는 제가 거의 코앞에 다다라서야 재빨리 회사 안으로 뛰어들어 가더군요. 도망가는 땅콩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제 근처에도 얼씬 못하게 할, 확실한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어요.     


 건물 뒤편에 있는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울 때면 땅콩이는 저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앉아있었어요. 그리고 담배를 다 피우고 나오다 건물 모퉁이를 돌면 몇 초 뒤에 따라 나오곤 했어요. 계획은 간단했어요. 담배를 피우고 나오면서 모퉁이를 돌아 숨어있다가 땅콩이가 따라 나오던 중에 저와 마주치면, 그 순간 "워이!" 하며 큰 소리를 내면서 구둣발로 밀어내는 것이었어요. 놀라게 만들어서 공포심을 심어 주려는 계획이었죠. 이렇게 하면 불안해져서 제 근처에 있거나 따라오는 걸 더 이상 못할 거란 생각이었어요.


 도망갔던 땅콩이가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어느새 슬그머니 경비실 근처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있더군요. 전 계획대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나오다 건물 모퉁이에 숨었죠. 그리고 '머리만 보이면, 머리만 보이면 된다.'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초초한 마음으로 뒤이어 따라 나올 땅콩이를 기다렸어요. 잠시 뒤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땅콩이의 머리가 보이더군요. 전 순간 크게 "워이!" 하는 소리를 내면서 힘차게 발을 뻗었어요. 그런데 땅콩이가 예상보다 멀리 있더라고요. 어떻게든 발로 밀어내려는 생각으로 다리를 무리해서 뻗다가, 중심이 앞으로 무너져버렸죠. 그리고 그만 제 통제를 벗어난 발끝이 정통으로 땅콩이의 머리를 가격해버렸어요. 땅콩이는 엄청난 충격에 놀라, 고통을 담은 고양이만의 비명을 지르며 근처에 주차된 차량 밑으로 빠르게 숨었어요. 저도 순간 놀라서 땅콩이가 숨은 곳으로 바로 따라가 보았고요. 자세를 낮춰 차량 밑을 손전등으로 비춰 보니 잔뜩 겁먹은 모습의 땅콩이가 보였어요.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아서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나서 물어봤어요.


"땅콩아! 괜찮아? 아이고…."    


 참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길고양이에게 정을 붙였던 제 자신이 싫었고요. 어찌 되었든 때린 건 잘못이었어요. 제대로 맞아서인지 땅콩이는 예전보다 좀 더 거리를 띄워서 경비실 근처를 맴돌거나 순찰하는 절 따라오곤 했어요. 그런데 외면을 시작한 초기엔 경비실 근처에 앉아만 있던 녀석이, 땅에 코를 박고 맴돌기 시작하는 게 이상해 보이더군요. 왜 정신없이 저러고 다니는지 자세히 보니, 땅콩이는 무언가를 잡아먹고 있었어요. 벌레를 먹고 있더군요. 그걸 보니 머리를 때리게 된 일과 겹쳐서 그런지 착잡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마음속에서 작은 갈등 하나가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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