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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창복 Nov 04. 2022

엽편소설 - 돈벌레

돈벌레


 이른 추위에 보일러를 왕창 켜놓고 건조해진 목을 시원한 콜라 한잔으로 개운하게 적셔줄 때였어요. 방바닥에 비스듬히 기댄 채 영화를 보고 있던 저의 시선의 가장자리에서 '다다다다닥'하는 재빠른 움직임이 느껴지더군요. 정말 컸어요. 제가 살면서 본 가장 큰 돈벌레였을 거예요. 빠른 속도로 저에게 다가오는 돈벌레를 보며 전 비명을 지르듯 말했어요.


"뭐~~어~~~야~~~!"


 그 거대한 크기에 휴지로 압사시키긴 두려웠고 살충제는 너무 멀리 있었어요. 전 유리잔에 남아 있던 콜라를 급하게 원샷하고 바로 돈벌레를 덮쳐 유리잔 감옥에 가두었어요. 얼마나 놀랐던지 머그컵형 유리잔이었기 망정이지 작은 유리잔이었으면 다 덮기 불가능했을 정도였어요.


 일단 한숨을 돌린 뒤 유리잔을 살짝 들어 살충제를 주입해서 돈벌레를 질실사 시키기로 했어요. 전 미신도 믿지 않고, 벌레를 싫어했으니까요. 거실에 있던 살충제를 가져와 유리잔을 살짝 들어 독가스를 주입하기 직전이었어요. 돈벌레가 말을 건네더군요.


"이봐! 잠깐만...."


 돈벌레의 말을 듣자마자 제 머릿속엔 '또! 뭐야!'라는 짜증이 밀려오더군요. 임신한 돈벌레였을까요.... 아니면 또 무슨 로맨티시스트 돈벌레였을까요.... 벌써 세 번째 겪는 일이라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고 차분해지더군요. 눈을 질끈 감고 돈벌레에게 물었어요.


"그래. 넌 또 무슨 사연인데?"

"벌레들 사이에서 소문을 좀 듣고 온 거야. 뭐 저번에 모기 여사님이랑 매미 총각 도와준 거 우리 세계에서는 이미 전설이 되었거든.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어...."

"야! 나 원래 벌레 싫어해! 살충제 있는 거 보면 모르겠냐? 그리고 모기랑 매미는.... 그냥 도와준 거야. 나한테 큰 피해도 줄 것 같지 않고 그리고 걔네들은 죽어가고 있었잖아."

"내 크기를 봐. 우리도 최장수 돈벌레가 7년 정도야. 나도 늙었어. 부탁이 있어서 왔어."

"그래.... 한번 풀어봐라. 단, 나도 이런 건 더 이상 싫으니까... 별것 아니면 바로 독가스다 알았지?"

"난 옆동네 혼자 사는 할머니 댁에 살아, 너도 봤을 거야. 그 다리 절면서 폐지 수집하는 할머니 알지?"

"응, 그 카트 끌고 다니시면서 폐지 모으시는 분 말하는 거지? 나도 많이 보긴 했지."

"내가 그 집에 오래 살았어. 난 이미 애기 때 방구석을 돌아다니다가 할머니에게 발각된 적이 있었어. 그런데 날 그대로 살려두시더라고. 돈벌레라고...."

"그렇지 어르신들 그거 많이 믿으시지.... 그게 옛날엔 사람들이 습한 장롱이나 쌀뒤주에 돈을 많이 숨겨둬서 우연히 습한 곳을 좋아하는 너희들이 있는 걸 보시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름을 지어준 거였잖아."

"그래 맞아. 그래서 내가 그 집에 6년 넘게 살 수 있었어. 그동안 수백 번 할머니께 발각되어도 언제나 날 조심스레 보내주셨지. 그 덕에 어쩌면 나도 우리 돈벌레 세계 최장수 기록을 세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이구! 경하드리옵니다. 그런데 오늘로 끝이네 이제 살충제니까. 별 이야기도 아닌 것 같네. 그만 끝내자."


 전 유리컵을 살짝 열어 살충제를 분사하려고 했어요. 그때였어요. 돈벌레가 외치더군요.


"자, 잠깐! 나 돈 좀 빌려줘!"


 제가 무슨 소리를 들었던 걸까요. 믿기지가 않았어요. 명색이 돈벌레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으니까요. 전 순식간에 열이 받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이런!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 선물 도둑질하는 소리를 들어봤나! 나 참 황당해서. 뭐? 돈을 빌려 뭐? 아니 네가 돈 가지고 뭐할 건데?"

"저 그 할머니 댁에 5만 원만 줄 수 없을까? 연탄 사서 쓰시라고...."

"뭐? 야!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나도 가난에 대해서는 잘 알아. 그 정도 연세면 노령연금에 몸도 불편하셔서 장애연금도 받고 계실지도 모르고, 겨울 되면 연탄은행, 봉사단체 연탄 나눔 그런 거 많다고.... 그 할머니 정도면 충분히 받으셔. 그리고 나도 누굴 도울 형편이 아니란 말이야."

"알고 있어. 그런데 그런 건 300장 정도야. 그걸론 한겨울 두어 달이면 다 써. 할머니도 그걸 알고 계셔서 아주 추워질 때까진 아끼신단 말이야. 그리고 조금 들어오는 돈은 한 푼도 안 쓰고 모아 두고 계셔...."

"그럼 돈 많으시겠네.... 그건 본인 선택이지 누가 그걸 모으고 있으래. 진짜 노인네들 답답해서...."

"아들이 교도소에 있어 내년 봄이면 나와. 아들이 나와서 빨간 줄 그어진 채로 먹고 살 길도 못 찾을까 봐, 장사 밑천이라도 만들어주려고 몇 년째 그러고 계셔...."

"그럼 무조건 나쁜 사람이네 내가 그런 가정까지 왜 생각해야 돼?"

"아들도 순박한 사람이었어.... 뭔지도 모르고 배달만 하면 된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다가 그렇게 된 거야."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럼 내가 돈을 뭐라고 하면서 드리며, 또 돈 드리면 그걸로 연탄 안사고 모으시면?"

"그냥 아무 사회봉사 단체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이건 꼭 영수증 받아야 한다고, 이걸로 연탄 다 사시고 영수증 보관하고 있으시라고 하면 돼. 어차피 보름 정도야. 그 뒤엔 누군가 또 도움의 손길을 줄 거야. 하루 넉넉히 쓰시려면 4장이 들거든 4장 x 800원 x 15일 = 4만 8천 원... 그러니까 5만 원이면 돼."

"미안하지만 나도 어려운 사람이야. 왜 또 하필 나한테 왔냐.... 나에게도 지금은 너무나 큰돈이라 사정은 알겠지만 도와줄 수 없어."

"난 이곳까지 오느라 목숨을 걸었어. 네가 모기 여사님과 매미 총각을 도와준 사람이란 걸 들어서...."

"아니, 난 돈 없어! 넌 그냥 살려 보내줄 테니까 다른 집에 찾아가 보도록 해."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너에게 주려던 큰 행운도 없을 테니까."

"뭐, 뭐? 뭔 행운?"

"네가 만약 도와준다면 이번 주 로또번호를 알려줄게.... 네 지갑에서 로또 용지 냄새가 났어. 너 로또 사지?"

"어, 어 그렇긴 한데.... 이게 사기를 어디서 치려고! 네가 그걸 어떻게 맞춰?"

"나 돈벌레야! 그게 조상님들이 괜히 지은 이름이 아니라니까. 우리에겐 그런 능력이 정말 있거든. 네 마음 씀씀이를 보고 서로 좋겠다 싶었는데 안 되겠네 그럼...."


 벌레의 지능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봤어요. 지능까지 고려해 볼 필요가 없더군요. 그러고 보니 곤충들은 지진 같은 자연현상을 미리 감지하고 피하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일기예보보다 정확한 예측력도 있다고 본 것 같고요. 인간은 사기를 치지만 아직 벌레가 사기를 친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전래동화에도 그런 건 없었고요. 정말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돈벌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래 좋다. 그럼 5만 원 미션을 수행하면 바로 알려주는 거지? 대신 그때까진 유리잔 속에 가둬둘 거다."

"그래 콜! 넌 이제 인생에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될 거야."


 봉투를 하나 준비해서 겉에 "연탄 나눔, 영수증 필"이라고 적었어요. 조끼를 걸쳐 입고 모자를 꾹 눌러쓴 다음 폐지를 수거하시던 할머니의 뒤를 하루 종일 밟았어요. 정말 오래 밖에도 계시더군요. 발바닥이 아플 정도였어요. 할머니께서 댁에 들어가시자마자 노크를 했어요. 그리고 계획된 뻥을 쳤죠. 사회봉사 단체에서 나왔다며 봉투를 내밀었어요. 그리고 꼭 연탄만 사셔야 하며, 영수증을 찾으러 올 거라고요. 안 그럼 돈을 다시 회수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횡설수설하고요. 그래도 핵심은 잘 알아들으시더군요. 집으로 돌아와 유리잔 속 돈벌레에게 보고를 했어요.


"난 스파이 같은 걸 했어야 하나 봐. 완벽했거든."

"고맙다. 정말 고맙다."


 돈벌레는 몸을 일으켜 50여 개의 다리를 일제히 부르르 떨며 징그럽게 기뻐했어요. 정말 징그럽더군요. 전 돈벌레에게 우리의 계약된 마지막 용건을 말했어요.


"자! 그럼 로또 번호는?"


 돈벌레가 일제히 떨던 다리를 멈추더군요. 그리고 얼굴을 숙이며 이야기했어요.


"미, 미안해. 난 그런 능력이 없어. 널 속였어. 대신 너 편한 데로 날 죽이도록 해.... 정말 미안해."

"내 그럴 줄 알았다. 요놈!"


 전 흰색 A4용지를 꺼내 유리컵을 살짝 들고 밀어 넣었어요. 그리고 컵을 뒤집고 그대로 돈벌레 가둔 유리컵을 들고 밖을 나왔어요. 한 손으로는 유리컵을 받쳐 들고, 다른 손으로는 유리컵의 주둥이를 덮은 A4 용지를 누른 채로요. 길을 걷다 보니 돈벌레는 이미 체념한 듯 흐믈흐믈하게 컵 안에 널브러져 있더군요.


 빠른 걸음으로 할머니의 집 앞까지 갔어요. 오래된 집이라 벽면엔 갈라진 틈새가 많았어요. 그중 커다란 틈 한 곳에 유리컵을 댄 다음, 입구를 열어주었어요. 돈벌레가 저를 한참 쳐다보다가 그곳으로 들어가더군요. 그리고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말했어요.


"왜! 왜? 살려주는 거야? 난 널 속였는데...."

"음... 그게 말이야 최장수 돈벌레가 될 수 있는 재목을 내가 죽일 수는 없지 않겠어? 그리고 넌 다른 존재를 위해 목숨을 걸었잖아. 네가 도박에서 이겼을 뿐이야...."


 돈벌레를 보고 한번 '씩' 웃어주고 자리를 뜨려는데 돈벌레가 상체까지 내밀어 다시 그 징그러운 50여 개의 다리를 기쁘게 떨었어요. 뒤돌아 가며 돈벌레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어요.


"추운데 너도 들어가. 그리고 10만 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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