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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갱 Oct 23. 2021

투 블라꾸, 리틀 캇또.

“머리 어떻게 해드릴까요?”



머리 하는 날


마침내 머리를 잘라야 하는 날이 왔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 한국어로도 설명을 잘 못하는 나에게, 말도 통하지 않는 오키나와에서 머리를 하는 것은 처음에는 꽤 어려운 일이었다 (원하는 헤어 스타일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은 소심한 나에게 더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일본어도 못하는데 괜찮을까?'

걱정 99%와 기대 1%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동네 미용실을 찾아 나섰다.

 

슈퍼마켓 앞에 있던 미용실과 이발소. © Google Maps


집 근처에는 두 가지 옵션이 있었다. 슈퍼마켓 앞에 있던 미용실과 이발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 “성인 헤어컷 900엔”이라는 광고가 붙어있는 이발소를 지나치라고 말했다 (어디서 본 글인데, 이러한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은 무수히 많은 경험, 빅데이터에서 얻은 통찰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미용실로 먼저 발걸음을 향했다. 하지만 미용실 아주머니가 남자는 옆에 이발소로 가라고 했고, 그렇게 1년 동안 내 머리를 책임져주던 이발소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첫 만남


파란클럽과 비슷한 아우라를 뿜는 이발소로 문을 고 들어갔다. 입구에서 라면가게에서나 봤을 자판기가 날 먼저 맞이했다.


'이런 데서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건가?'

일본어로 어지럽게 쓰인 자판기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어깨까 오는 긴 노란색 머리가 인상적인 헤어 디자이너 형님께서 친절히 티켓 발급을 도와주었다. 1000엔짜리를 지폐를 넣으니 100엔 거스름돈과 '커트'라고 쓰인 쪽지가 나왔다. 쪽지를 디자이너분께 건네드리고 자판기 옆 소파에 앉았다.


이발소 안에선 이미 몇몇 사람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래도 장사가 좀 되는 곳인가 보네'라는 생각을 하고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그런데 거기엔 (편협한 내 견해로) 헤어 스타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듯한 사람들만 보였다. 서로 다른 이유로 커트할 머리가 얼마 없어 보이는, 까까머리 중학생 또래 남자아이와 백발의 할아버지. 소파에 앉아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앞서 간(?) 이발소 동지들의 상태를 흘끗거리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조또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어렸을 적 동네 목욕탕 이발소에서 본 이후로 한동안 본 적 없던 이발소 의자에 앉아서 내 머릴 맡겼다. 일본어를 잘 못하는 나와 영어를 잘 못하는 헤어 디자이너 형님. 그리고 900엔 저가를 메인 셀링포인트로 광고하는 이발소의 아우라 [1]. 과연 그 예상만큼이나 우리의 첫 번째 만남은 좋지 않았다.

(왼쪽) Before. 설레는 맘으로 이발소에 앉아서. (오른쪽) After. 부인을 울린 머리스타일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일본어 중 하나인 '조또'. 이 말을 뱉은 게 실수였을까? 조금 잘라 달라는 내 말을 짧게 해 달라는 걸로 오해한 것일까? 그 큰 차이를 '조또'라는 공통된 단어로 설명한 결과, 처참한 상황을 초래했다. 


디자이너 형님의 날카로운 가위 끝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는 머리카락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짧게 머리를 자르고 온 나를 본 경희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보였다. 내가 자기 관리를 포기한 것 같아서 슬펐더라나.


[1] 다른 미용실의 커트 평균 가격은 2-3,000엔이었다. 900엔이면 반 값도 안 하는 셈이다.



투 블라꾸, 리틀 캇또


하지만 첫 번째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몇 주 후에 다시 같은 이발소를 방문했다. '머리가 망하면 어때, 머리는 다시 자랄 텐데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마음가짐이었다. 내 머리를 보며 눈물을 보인 경희에게는 미안하지만, 디자이너 형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고 싶었고, 말이 (아마도) 통하지 않을 다른 미용실에 가서 겪을 수 있는 실패를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오키나와에 지내는 1년 동안 계속 같은 이발소에 다니게 되었다. 이상할 때도 많았지만, 몇 번을 손짓 발짓을 하며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설명하다 보니, 나중엔 제법 맘에 드는 스타일이 나왔다. 심지어 이발소가 맘에 들어서 주위에 추천도 해줬는데, 평소 삭발에 가까운 머릴 하고 다니던 친구 G가 제일 만족해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후 집 앞 미용실에서 오랜만에 한국어로 같은 질문을 들었다.


"머리 어떻게 해드릴까요?"

'그래도 내 스타일을 알 던 곳인데'라는 생각이 들며, 오키나와 단골 이발소가 다시 생각났다.


“투 블라꾸, 리틀 캇또" [2]

나를 알아보시고 매번 이렇게 먼저 물어보던 그 머리 긴 디자이너 형님. 이제 찾아오지 않는 나를 기억할까? 맘이 변해서 안 찾아온다고 속상해하지는 않을까문득 그리워진다.

       

[2] “투 블럭 스타일로 조금만 잘라주세요”라는 뜻을 가진 나와 디자이너 형님과의 코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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